風景寫眞(內)

傳統韓屋의 名品 윤증古宅을 찾아

bsk5865 2013. 8. 21. 15:06

보낸사람 : 演好마을 운영자 13.08.21 09:38

 

傳統韓屋의 名品 윤증古宅을 찾아|☞ 자유게시판
淸閑 | http://cafe.daum.net/enka6300/D7cf/30357 

 

 

 

                  전통한옥의 명품 윤증고택을 찾아

 

 

어제(8/20) 친구들과 논산 노성에 있는 명재 윤증의 고택에 다녀왔다. 일기예보에는 오늘도 섭씨32도를 넘는 폭염일 것이라고 했으나 차에 내리니 선선한 바람까지 분다. 고택 경내에 들어서니 우리를 맞이한 것은 수백 그루의 백일홍이었다.

 

백일홍은 배롱나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서원이나 옛 선비들이 지은 아름다운 정자 주변 또는 선운사같이 산속 산사의 앞 마당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무줄기의 매끄러움이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대갓집 안채에는 식수가 금기시 되어왔다.

명재(明齋) 윤증( 尹拯, 1629~1711)은 그의 학문이 높고 깨끗하다고 온 나라에 퍼지자 숙종은 우의정 벼슬을 내리고 출사를 종용했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도 우의정에 올랐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그는 임종하면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하여 묘비에 ‘착한 선비’라고만 쓰도록 일렀다. 숙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개탄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도다.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지만
평생을 두고 그의 얼굴 보지 못하였네.
그가 떠났다 하니 내 마음 깊이 한 쌓이네.

윤증 고택은 TV에서 여러번 방영된 바가 있기 때문에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도 꽤 친숙하게 느껴지고, 방에서 내다 보는 전망이 좋다든지, 미닫이 여닫이 문이 과학적이라든지, 장독대가 엄청나게 많다든지 정도는 알고 있다.

고택은 1709년에 윤증 선생의 둘째 아들과 제자들이 초가에서 지내던 윤증 선생을 위해 지은 집이다. 여느 사대부 가옥과 달리 솟을대문이나 울타리가 없다. 바깥과의 경계도 구분 짓지 않았다.

청렴한 삶을 추구한 윤증은 85세에 별세하여 2년은 이 집에서 살 수 았는데, 끝내 이사를 하지 않고 초가집에서 긴 삶을 마감했다.

조선시대 상류층 전통가옥이 그러하듯 윤증고택(尹拯故宅) 역시 크게 보면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건물들은 서로 분리된 채 놓여 있으며 이들 사이에 담이 있다. 특이하게도 윤증고택에는 집 전체를 둘러싸는 담이 없다.


이런 구조적 특징 때문에 윤증고택에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장소들이 생겨난다. 보통 전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대문이 없다든지 더불어 건물 일부가 바깥에 노출된 채로 있게 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윤증고택(尹拯故宅) 근처에는 노성향교가 있다. 노성향교는 윤증이 지방 유림들과 교우하던 곳으로 본 고택에서 바로 보이도록 되어 있다.


윤증고택의 사랑채에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누마루가 있다. 이 누마루는 건물 좌측에 놓여 있다. 누마루가 이곳에 위치한 것은 윤증고택의 좌측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서원은 집주인인 윤증(尹拯)이 설립, 운영하는 서원이었다.


이 누마루에서 바로 서원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이 누마루가 앉혀 있는 사랑채 건물은 서원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서원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즉, 이 누마루는 망루같은 성격을 가진 곳이다.

이 누마루 좌측에는 사람들이 통행하는 통로가 있다. 집안사람은 물론 바깥사람들이 출입하는 통로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시각 및 접근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 누마루가 공개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랑채 건너편에 위치한 유사한 형식의 마루에 비하면 더욱 공개적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옛날집의 경우 사당채는 집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당이 집안과 집 밖을 구분하는 큰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당으로 출입하는 문 역시 그 울타리 안에 놓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증고택의 사당은 예외이다. 집 전체를 둘러치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사당건물은 물론, 출입문 역시 집 밖에 놓여진 꼴이 된다.


안채에는 네모난 마당이 있다. 크게 보면 이 마당은 ㄷ자의 안채 건물과 -자로 된 문간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문간채는 사랑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와 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안채, 문간채, 사랑채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고택의 사랑채에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대청이 있다. 사랑채 우측에 있는 대청이 바로 그곳이다. 이 대청은 좌측에 있는 대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통행로로부터 떨어져 있고 비교적 그 위치가 안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 대청은 세 면이 열려 있는 구조이다. 앞 쪽은 바깥쪽을 향해, 오른쪽은 화초 등이 가꾸어진 뜰을 향해, 그리고 뒤쪽은 사당을 향해 열려있는 식이다.


그만큼 이 대청은 주변과 다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지랖 넓은 대청이 되는 것이다


집 바깥에 나와 있는 것 같은 사당, 안채, 사랑채 등, 집의 이곳 저곳을 서로 묶어 주는 장치가 있다. 사당에 난 문이 그 하나이다. 사당의 문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사당이 아닌, 다른 시설들이 있는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또한 길이 나 있다. 이들 때문에 사당과 시설들과의 거리가 좁혀 진다. 실제적인 거리는 물론 심리적인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문이 가운데 있다면 권위적이기 쉽다. 즉, 사당 중심의 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당과 다른 시설과는 그만큼 거리감이 생기게 될 것이다


부엌 옆 건물 사이에는 북쪽은 좁고 남쪽은 약간 넓은 하늘을 향한 ㄷ자 구조물이 있는데, 겨울에는 북풍을 완화시키고 여름에는 남풍이 잘 소통하게 하는 역활을 하며 배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옛 도목수의 지혜가 놀랍다.


윤증고택 옆에는 파평 윤씨 가문 자제만 교육시키는 '종학당'이 있는데, 여기에서 42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힌다.


내 생각에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파평 윤씨자제가 이곳으로 유학을 온 것으로 본다. 그렇지 않으면 논산이라는 시골에서 어떻게 42명의 대과 급제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도 이곳에서 한학을 가르치는데 초급반은 입구 강당에서 시작하여 학문이 높아 갈수록 점점 위 건물로 올라간다 한다.


명재 윤증은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면서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했다. 이런 적선(積善)의 결과 그의 집안은 동학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고결한 선비정신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6.25전쟁 때 인민군이 이 고택을 접수하여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맞지 않고 고택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랫 마을에 미공군 소속 박대령의 본가가 있어 그가 이곳은 자기 마을이니 폭격을 하지말아 달라 부탁하여 고택이 무사하였다 한다.

점심은 같이 간 친구의 연고로 종가 집 음식을 먹는 기회를 가졌다.

이 지방에 ' 노성(魯城) 윤씨 식도락하고, 연산(連山) 김씨 묘 치장하고, 회덕(懷德) 송씨 집 치장한다’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는데, 옛날에 노성 윤씨는 음식을 잘해서 먹기로 유명했고, 연산 김씨는 묘소 치장을 잘하기로 유명했고, 회덕 송씨는 집을 잘 짓고 사는 걸로 유명했다 한다.

이 이름난 노성 윤씨 종가 집 점심에 가양주까지 마셨으니 참으로 호강을 누린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을이면, 특히 서리내릴 때쯤 끓여 주시던 아욱국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 마트에서 가끔 아욱을 사다 끓여 먹었곤 하는데 영 그 추억의 향기가 나지 않아 매번 실망하곤 했다. 실로 몇 십년만에 제대로 된 아욱국의 그윽한 향기를 즐길 수 있었다. 아마 직접 노지재배한듯하다. 그리고 별로 짜지 않은 간장과 향이 짙은 오미자 차가 인상에 남는다.


식후에 사랑채 대청으로 자리를 옮겨 묘령의 여인이 탄주하는 25현 가야금(원래 가야금은 12현인데 북한원래 가야금은 에서 먼저 개량했다 함)두곡까자 즐겼으니 그야말로 오늘은 문화적으로 보낸 하루였다.


우리는 명재 윤증 선생의 13세
손인 윤완식씨의 상세하고 친절한 해설을 들었다. 그는 학창시절을 논산에서 보내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0여 년 전에 명재고택으로 돌아왔는데 윤증의 직계 장손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현재 한옥체험협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는데, 그만큼 한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예약(070-8224-6515, 0106310-1139)을 하면, 윤증고택에서 숙박(home stay)도 할 수 있다 하니 무너지고 있는 현금의 전통문화를 체험시킬 겸 손자를 데리고 하룻 밤을 자는 것도 의의가 깊을 것이다.

                                                                                                      淸閑 執筆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