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2世(J.Strauss2,1825-1899) 왈츠의 王은 ‘왈츠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의 長男으로 1825年10月25 日 빈에서 태어났는데 아들 슈트라우스 2世는 銀行家가 되길 願하는 아버지의 反對를 무릅쓰고 어머니 안나의 理解로 바이올린 敎習을 받았으며, 父母의 別居 後에는 本格的으로 드레크슬러(Joseph Drechsler) 에게 作曲을 배우면서 天賦的인 才能을 發揮하였습니다.
1862年,그 當時 有名 歌手였던 9歲 年上의 헨리에테 트레프츠(Henriete Trefz)와 結婚,이듬해 宮廷舞蹈會 樂長이 되면서 러시아 巡演에 올랐고,이 무렵부터 大規模의 演奏會用 舞曲 樣式의 開拓에 힘썼었습니다. 이 舞曲 洋式은 1870年頃에 이르러 頂点에 達했고,以後에는 오페레타와 왈츠의 創作에 專念하였습니다.
슈트라우스의‘10大 왈츠’라 일컬어지는 傑作들은 1864年 以來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第1番 《조간》(1864年)에 이어 番號順대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1867年), 《예술가의 생애》(1867年),《빈 숲속의 이야기》(1868年),《술・여자・노래》(1869年),《천일 야화》(1871年의 오페레타,《인디고와 48명의 도적들》속의 왈츠를 요한의 死後에 整理),《빈기질》(1871年),《남국의 장미》(1880年의 오페레타 《여왕님의 레이스 손수건》 中),《봄의 소리》(1882年),그리고 第1番《황제》(1888年)에 이르기까지 當時 貴族과 富戶들의 人氣를 받으며 꾸준히 作曲되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왈츠 第1番 《조간》은 當時 파리의 오페레타 名人으로 人氣를 누리던 오펜바흐와의 競爭을 爲해 1864年 만들어졌으며,오펜바흐 는 競爭 後 슈트라우스에게 오페레타의 作曲을 勸誘했다고 합니다. 1878年 헨리에테 트레프츠가 죽자,半年 後 30歲 年下의 聲樂徒 릴 리디트리히(Lily Dietrich)와 再婚하였습니다.
그러나 品行이 方正하지 못한 아내와의 葛藤으로 結局 1886年 離婚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아텔레 도이치(Adele Deutsch)와 세 번째 結婚式을 올렸습니다. 그女와 살게 된 그는 祝福받은 幸福한 晩年을 보냈습니다. 1899年6月3日,요한 슈트라우스 2世는 肺炎으로 因하여 74歲의 生을 磨勘하였고,1萬 빈 市民의 盛大한 葬禮式 行列이 그의 죽음을 哀悼하였습니다. 遺骸는 中央墓地의 브람스 곁에 묻혔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世는 아버지에 比해 보다 洗鍊되고 豊富한 感性으로 무려 749曲의 作品을 남겼습니다. 創作上,1870年 以前에는 舞蹈 音樂 作曲과 編作및 그 演奏 活動에 專念하였으며 그 以後에는 오페레타와 大規模 舞曲 時代라 할 만큼 대단한 活躍을 하였습니다.
왈츠 中心의 오페레타는 프랑스風 의 舞曲을 받아들여 빈 경가극의 새 지평을 열었고, 管絃樂의 壯大한 效果面 과 獨自的인 旋律 和聲이 돋보이는 왈츠 分野는 그의 가장 큰 功績으로 評價되고 있습니다.
왈츠《봄의 소리 Fruhlingsstimmen 》 이 曲은 왈츠임에도 不拘하고 춤을 爲한 것이 아니라,演奏會를 爲해 作曲된 것으로 ‘빈풍의 왈츠’가 아닙니다 作曲 年代는 1882年이고, 소프라 노 솔로 曲으로 作曲되었지만 管絃樂 曲으로 많이 演奏됩니다.
그러나 콜로 라투라의 목소리를 들려 주는 아리 아로도 종종 演奏됩니다. 그래서 曲의 構造에 있어서도 아리아이기 때문에 카멘차(樂器일 境遇는 勿論 각 樂器가 獨奏한다)가 揷入되어 있으며,序奏와 몇 個의 왈츠 및 後奏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론도 形式을 取하고 있습니다.
輕快하고 가벼운 느낌의 왈츠이며, 젊은이들이 속삭이는 사랑의 對話 같은 雰圍氣가 느껴집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