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이정기 13.12.1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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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적국으로 잡혀가는것이 나라가 약해 패전한것이 이유인데 나라와 사대부 대신들과 남자들에게 책임이 있는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때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와 왜병들은 운종사에서 비구니 여승들을 데리고 하룻밤 자고는 다음날 떠나면서 운종사를 불태워 버렸다. 임신한 여승들은 운경산(현 남산)기슭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때부터 남산밑 토막집을 「이방인의 아이를 밴 집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운종사의 여승들처럼 임진왜란과 6.25를 거치면서 오늘날 이태원은 외국인들이 유난히 모여사는 관광특구가 되었다.
잡혀간 사대부 이하 전 백성들은 부인과 딸을 데려오기 위해 특히 친정쪽에서 포목 금 은 등을 지불하고 데려오는데 이를 속환이라하여 환향녀(還鄕女)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나라에서는 청나라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홍제천 냇물인 연신내에서 몸을 씻고 한양에 들어오게 하면서 '연신내 목욕 면죄부'를 부여했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견강부회(牽强附會)도 이만저만한것이 아니되는데 당시의 잣대로는 나라 약해 패전한 슬픔으로 당연지사였겠다. 인조실록에서 사관이 주석에 달기를,【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법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1637년(인조15)1월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풀고 한겨울 들판에 수항단(受降檀)을 쌓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으로 기어서 172개 계단을 올라가면서 청태종 홍타지에게 세번 절을 올리되 한번 절 할때마다 세 번씩 아홉번을 돌계단에 이마를 부딛쳐야 했다.
그것도 그냥 부딛치는것이 아니라 이마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태종 귀에 들려야 했고 이마가 터져 피가 나서 그 피가 가슴까지 흘러내려야 항복이 받아들여졌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다.
결국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볼모로 삼고 50만의 양민을 데리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청군은 납치한 50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돈을 받고 보내주었는데 이를 속환이라 한다.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소현세자는 2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군비를 확장하는 등 원대한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재위 10년 만에 의문의 세상을 떠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역사의 정의란, 시대적으로 항상 역사는 과거를 후회하는 오늘의 찰라와 순간을 자각하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앞날을 내다보며 실천해 나아갔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현재의 순간에도 적용된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이 광해군이 계속 집권 했더라면 청과 형제지간으로서 부국강병 정책을 마음껒 펴서 개화가 일본의 명치유신보다 200년 앞지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또는 소현세자가 의문으로 사망하지 않고 임금이 되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의 개화가 앞당겨 졌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서인과 인조가 명나라에 대해 지나친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주의 노선을 이어 갔더라면 두 번에 걸친 정묘·병자호란은 없었을 뿐 아니라, 청나라와 동등한 형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제 36년 식민 치욕없이 동북아 독립국가의 일원으로 막강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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