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엔카 컴나라 운영자 14.02.03 11:58
일본총리 왜 야수꾸니 신사참배 안되나 ?
야수꾸니 신사
1. 일본 신사의 유래와 종류
신사(神社)란 일본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민간종교의 하나로 신도(神道)라는 단어가 종교의 이름 과 같다.
그리고 그 신을 모신 곳 즉 사원(寺院)이 신사(神社)이다.
요즘 종교는 인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신분의 이름이나 그의 사상을 상징하는 단어를 앞에 붙여 불교(佛敎), 基督敎(예수교), 유교(儒敎), 등 가르칠 교(敎)자를 붙이는 대신 일본은 길도(道)자를 붙여 신도(神道)라 통칭한다.
신도즉 신사는 우리의 전통신앙처럼 가르침이 없어서 종교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 다.
일본의 신사에 대한 호칭은 신사, 신궁, 궁, 대사, 사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중 '신궁(神宮)'은 특히 황실과 관계가 있는 신을 모신 신사를 가리킨다.
'대사(大社)'는 신사의 규모를 대, 중, 소로 나누었을 때 '대사(大社)'의 격을 받았던 신사를 가르 키며. '사(社)'는 큰 신사로부터 제신을 권청받아 소규모로 모시는 신사를 가리킨다.
일본인들의 신을 섬기는 의식인 각종 마쓰리(축제, 이벤트, 행사)는 신사를 통하여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주고 있다.
일본에는 80.000 여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신이 너무 많아서 팔백만신(八百万神)이라는 말 도 있다.
일본인들은 어디를 가나 그 곳을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본다.
역대 일본 천황도 신이되어 일본 민족을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신사에 모신다.
역사상 인물들은 물론 유명한 학자는 '학문의 신' 돈을 많이 번 거부는 '부의 신' 그외 좋은 짝을 맺어주는 '중매의 신' '건강의신' '장수의신' '도예의신' '농사의신'등 그들이 소원을 빌면 성취한다는 미신적인 사고와 행사가 이어오고 있다.
백제에서 망명한 왕족을 모신 신사도 있다.
2.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강점기남산에 자리잡은 조선신궁 / 사진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민통합을 위하여 각지에 신사를 건립하고 이 신도를 보호 육성하여 ‘천 황제(天皇制)’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했다.
그리하여 ‘천황’ 및 천황의 선조를 신사에 모시고 살아 있는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도 이용했다.
한반도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군사·경제·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사·신도 가 침투하기 시작하였고. 1910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을 강요했다.
관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 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고하는 곳이 생기게 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
의 고조와 함께 이제 그 강요의 마수가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뻗쳐 이를 거부하는 많은 순 교자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나는 1944년 일제때 시골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면 운동장 한쪽에 만들어 놓은 석조건축물 신사 앞에서 묵념으로 '천 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대 일본제국의 식민임을 다짐'한 후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에서도 수업전에 상징적 신사 사진을 벽에 붙이고 그곳을 향해 다짐하는 시간도 있었다.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를 설치케 하고, 도시나 마을에도 잘 보이는 위치를 선정하여 상징적 건축 물을 지어 참배를 강요하였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절과 신사가 구별이 잘 가질 않는다.
일본의 절은 단청을 하질 않기에 더더욱 외관으로는 절인지 신사 인지 쉽게 구분 하기가 어렵다.
신사는 모시는 신이 통일돼 있질 않아, 말 그데로 잡신을 모신 셈이니, 어떤신을 모셨냐에 따라 소 원을 빌러 오는 사람의 소망도 각각일 듯 싶다.
평상시에는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도 아닌듯 싶은게 신사의 모습이다.
3. 야수꾸니 신사와 도쿄재판
일반인의 참배장소
야수꾸니 신사는 1869년 메이지천황 시절 황군의 혼령을 위로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 다.
신사 표시 팻말
처음 이름은 '혼령을 부르는 곳'이란 뜻의 쇼콘샤(招魂社)였으나 1879년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인 지금의 이름 '야스쿠니'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11차례 전쟁의 전몰자 246만 여명의 위패가 안치되 어있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1급 전범 14명을 안치해 놓은 곳이라 일본 정치인들의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우리나라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전범들의 사진 게시
정문에 서 있는 오오도리이(大鳥居:신사 앞의 건조물)
정문에 서 있는 오오도리이(大鳥居:신사 앞의 건조물)는 높이가 무려 25m나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이레이노이즈미(慰靈の泉)', 즉 '위령의 샘'이다.
전장에서 싸우다가 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한 병사들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란다.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원 동상
오오무라 마스시로우(大村益次郞)의 동상
광장 한가운데는 오오무라 마스시로우(大村益次郞)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근대 일본 육군 창설자로 이 야스쿠니 신사 창건에도 절대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니 일본의 군 을 상징하는 인물로 동상을 세워놓은 것이다.
군견과 군마의 위령상
전장에서 죽은 말의 위령상, 군견 위령상, 비둘기상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인상적인 것은 신사 뜰에 놀고 있는 하얀 비둘기들이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일본 각지에서 기증해온 비둘기들이란다.
'야스쿠니(靖國)'의 뜻이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이어서 흰색 비둘기를 키우는 것 같은데 속이 보 인다.
그런데도 이곳이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처럼 돼버린 것은 어쩐 일일까.
야스쿠니신사는 제국주의 침탈의 향수로 가득 차 있다.
유슈간(遊就館)에는 청일ㆍ러일ㆍ전쟁의 유품과
제1차 세계 대전, 만주ㆍ지나 사변, 그리고 대동아 전쟁의 유품과
2차 세계 대전 때 활약했던 함상 폭격기 스이세이(彗星) 로켓 특공기
오우가(櫻花), 인간 어뢰 가이덴(回天) 등도 있었다.
그리고 일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군인칙유(軍人勅諭)의 비석이며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원 동상, 같은 전쟁기념물이 곳곳에 있다.
일제시대 강제로 징용되어 끌려갔다가 죽은 한국인도‘일본을 위해 전사했다'는 이유로 21,000명이 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4. 아베총리의 야수꾸니참배를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
아베 총리 야수꾸니 신사 참배
2014년 1월 9일 일본 아베신조(安倍晋三)총리가 많은 졸개들을 거느리고 야수꾸니 신사를 2번째 참 배하였다.
(일차는 1913.12.26 취임 1주기 참배).
한국과 중국은 물론 2차대전 피해국가인 동남아시아 여러나라와 미국 러시아등이 반대하는데도 강 행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군대의 힘으로 침략행위를 하는 동맹군(독일, 일본, 이딸리아)과
세계평화를 위해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과의 2차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마지막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아래 글은 김준섭 국방대교수가 2014.1.13.
국민일보 글로벌 포커스에 실은 내용을 참조한 글--
1946년 5월 3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일본군 전범에대한 재판이 도교에서 열렸다.
이를 도교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이라 한다.
이때 키난수석검사(미군정산하)는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무고한 사람(1000만 명이상)을 희생시킨 전쟁의 책임자 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고 말하며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여 (A급전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을 교수 형에 처하고, 16명에게는 종신형, 2명에게는 금고형이 언도되었다.
이들중 14명이 이곳에 안치되어 신격화 하거나 영웅시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우파정치인과, 학자, 평론가, 일부는 이 도교재판을 '승자에 의한 정치쇼'였다고 비판한다.
그 비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인물 하나가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 케였다.
아베총리는 평소 기시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거론한다.
아베총리는 그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 에서 "A급 전범이란 도교재판에서 '평화에대한 죄' 와 '인도(人道)에대한 죄' 라고 하는 전쟁이 끝난 뒤에 만들어진 개념에 의해 처벌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 이라 하면서 "국제법상 사후법에 의해 행해진 재판은 무효라고 하는 논의가 있 다."고 말한다.
그런데 1978년 10월 17일 교수형에 처하거나 형기중 병사한 A급전범 14명을 ' 쇼와의 순교자'라며 합사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야수꾸니 참배가 문제가 되는 발단이다.
야수꾸니 신사자체는 전전(戰前)의 국가신도(神道)가 해체되어 종교 법인에 불과하나 전범이 있는 곳에 정부의 각료가 공식 참배한다는 것은 '도교재판'의 역사 인식을 정면 부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연합국이 시행한 '정의의 심판'에 의해 내린 판결 을 정면 부인하는 격 이기때문에 2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악마" 라고 말하였다.
2014년 1월 27일.
작성자 / 學軒 양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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