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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 조회 68 |추천 0 | 2013.01.27. 18:38
진주만기습공격직전 일본준비상황
일본이 꿈꾸는 大東亞共營圈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간의 전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 미군과 일본군은 항공전력 확장에 몰두해 왔으며 일본 항공부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중국과 소련과의 분쟁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고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시적으로 미군을 압도하고 전승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친 航空戰力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정복의 유혹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8월 일본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지도를 펴놓고 大東亞共營圈의 야심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장래에 치를 피의 대가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 했다.
독일의 유럽 정복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 제국을 표류하게 했으며 이들이 공격을 받아도 본국에서의 지원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영국은 말레이 제국과 함께 싸우고 있었으나 일본이 말레이 제국을 침공해도 이를 방해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일본이 벌인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 육군과 공군의 위력이 드러났으며 일본 대본영은 소련이 너무나도 강대한 상대임을 간과하고 있었다. (노몬한전투 → http://cafe.daum.net/korjaphistory/SpsB/4)
1941년 겨울, 소련 육군이 모스크바로 후퇴하고 있을 때 동쪽과 남쪽에는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있었다. 중국 전쟁은 일본 육군의 전쟁이었다. 만약 일본지휘부가 서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전쟁을 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일본 해군이 해군항공대를 사용해 누릴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편에는 아직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미국이 있었다. 미 육군은 작았지만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미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육군을 건설할 힘이 있었으며 1941년의 일본 함대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많은 군함과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 해군은 30년이 넘게 미군과의 전력 비교를 전제로 전쟁계획을 짜 왔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본은 미국에 대항해 서태평양을 방어하는 내용의 훈련을 해왔다.
1940년에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1940년 7월 미국은 야심찬 새 해군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 해 9월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함에 따라 미국은 중요한 석유공급을 포함하는 통상금지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가 본 미래 해군세력의 계산은 간단했으며 태평양지역에서 기회의 문은 닫히고 있었다. 1937년에 시작된 전투함 건조계획이 1941년에 거의 끝나게 됨에 따라 그해 말까지 일본과 미국의 함정비율은 7대 10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함정 건조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이 비율은 1943년에는 5대 10, 1944년에는 3대 10으로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만약 일본이 행동을 취하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일본은 무방비 상태의 동남아 유럽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서태평양지역에서 방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 미국을 패배시켜야 했다.
서태평양 지역의 미해군력은 1912년에 하와이에 개항된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었다. 1940년 5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태평양함대가 미본토 서해안항구 대신 진주만에 영구 주둔하도록 지시했다.
1939년 8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야마모토 제독은 미 태평양함대의 하와이 배치를 ‘우리의 목에 들이댄 칼날’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하와이에 전진배치된 미 함대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진주만은 일본군의 이상적인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가? 해군의 전통적 사고방식은 외해에서 본격적인 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해군 항공력은 정찰이나 교란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나 최종 결전은 전함의 주포로 결판날 것이다. 미 해군 역시 이러한 기본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의 계획은 장거리비행정이 마샬군도 기지에서 출발해 5,500마일을 비행 후 진주만을 폭격, 미 함대를 바다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런 유틀란트 스타일의 해전을 태평양에서 재현할 생각이 없었다. 1940년 봄에 실시된 함대훈련에서는 전함에 대한 뇌격기의 공격력을 시범했다. 이는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낼 뿐만 아니라 항공기의 강력한 공격으로 태평양함대를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1941년 1월 야마모토는 믿을만한 장교들로 비밀기획그룹을 편성했다. 해군 항공의 전문가인 오오니시 제독은 하와이를 공중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무관을 지낸 겐다 미노루 소령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겐다 소령은 1940년 11월 타란토에 투묘 중인 이탈리아 함대를 영국의 해군항공기가 공격해 대성공을 거둔 상황을 보고했다.
겐다 소령의 의견은 미군 기지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은 가능하지만 위험요소가 크다는 것이었다. 모든 항공모함과 최소한 400대의 항공기가 필요했다. 공격에 참가하는 조종사는 1차목표인 전함의 갑판 위에 철갑폭탄을 정확히 명중시킬 만큼 고도로 훈련되어야 했다. 어뢰 공격을 하는 뇌격기 조종사도 적함의 홀수선에 저공 저속의 수평공격을 정확히 가하는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었다.
1941년 4월 야마모토는 비공식적인 예비작전계획을 연합함대 참모들에게 시달, 세부검토에 들어갔다. 일본 해군대학은 4개월 후 이 계획으로 전쟁연습을 실시했다. 이 첫 번째 전쟁연습에서 미 전함 1척 격침, 항모 2척 격침, 항모 1척 대파라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전쟁연습은 첫 번째 연습보다 결과가 나빠서 공격함대는 항모 2척과 항공기 127대를 상실했다.
선임해군장교들은 이 작전이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기동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될 나구모 주이치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직위해임을 내세우며 나구모를 설득시켜 이를 받아들이게 했다. 10월 초까지 이 계획은 승인되었으며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6척이 이 작전에 배치되었다. 나구모는 이 획기적인 작전을 위해 세부 준비를 해나갔다. 작전을 철저히 세분화시켜 계획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정보기관은 진주만을 비롯한 오아후섬과 여러 비행장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호놀룰루 동쪽 5마일에 있는 광활한 천연항만의 한복판에는 포드섬이 위치하고 있고 이곳에는 항모항공전대의 중앙정비시설로 사용되는 거대한 해군항공기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드라이독과 유류저장탱크, 7개의 미 육군항공기지가 있었다. 이들의 북쪽에는 할레이와 기지, 동쪽에는 버로 기지, 중앙에는 휠러 기지, 그 옆에는 히컴 기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항만 입구 서쪽에는 이와 해병 항공 기지가 있었다. 섬의 동쪽에는 카탈리나 PBY 초계비행정을 보유한 카네오헤 해군 항공기지가 있었다. 오아후섬과 해군 기지의 큰 모형이 만들어져 조종사들은 이 곳을 극비리에 눈으로 익혔다. 일본 가고시마만의 천해가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진주만의 지형조건과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어뢰공격의 정확성이었다. 해군의 최고 조종사들에 의해 6개월간의 훈련이 수행되었지만 결과는 아직도 실망스러웠다. 어뢰 투하고도는 너무 높거나 낮아서 착수 후 항주하는 데 실패했다. 겐다 소령은 저공 어뢰공격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어뢰공격 없이 이 작전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암호명 작전 Z 공격은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되었다. 그 달 11일까지는 어뢰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바다에 어뢰를 안정적으로 투하하기 위한 목제 안정장치를 부착한 개량 어뢰 인도는 지연되었다.
일본과 미국의 협상은 예정일자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야마모토는 공격개시일자를 일본 시각으로 12월 8일로 재조정했다. 이 날은 오아후 시간으로는 12월 7일 일요일이었다.
에토로푸 섬 기동함대는 11월 22일까지 일본 북쪽 안개덮인 쿠릴열도의 가장 큰 에토로푸 섬 히토카푸 만에 집결했다. 나구모의 함대 31척은 11월 26일 정박지를 출항해 동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12월 2일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진주만 공격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 승조원들은 함내 방송을 통해 목적지를 알게 되자 환호했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6일 나구모의 기동함대는 무선침묵과 안개를 이용해 전속력으로 목적지로 항진했다. 최종해상급유를 실시한 후 유조선은 일본으로 회항했다. 기동함대의 주력은 <아카키>, <카가>, <소류>, <히류>, 새로 건조된 <쇼가쿠>와 <즈이카쿠> 등 6척의 항공모함이었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순양함 <도네>, <지쿠마>, <아부쿠마> 등은 경계진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 주력함대의 전방에는 이미 27척의 잠수함이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상선 항로를 우회하고 미군 초계기의 감시를 피해 항해를 계속한 기동함대는 12월 7일 새벽에 하와이 북쪽 230마일 거리 해역에 도착했다. 일본 함대에서 최초로 발진한 항공기는 순양함 소속 수상정찰기였다. 항공모함의 비행갑판과 격납갑판에서는 정비사가 항공기를 점검하고 있었고 무장사들은 폭탄, 어뢰, 기관총탄 등을 탑재하기에 바빴다.
바다는 비교적 잔잔하고 옅은 안개가 끼어있어 기동함대의 은폐 및 공격지 발진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기함 아카키 함상의 나구모 사령관은 표적에 대한 최신정보를 수령했다. 8척의 전함은 전함투묘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항공모함은 없었다. <렉싱턴>, <호넷>, <요크타운>, <사라토가>는 어디로 갔을까?
요크타운은 대서양에 있었고 사라토가는 샌디에이고에서 수리 중이었다.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와 웨이크섬의 해병부대에 공급할 항공기를 나르는 중이었다.
오전 6시 30분에 첫 공격편대가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을 시작했으며 30분 동안 183대가 출격했다. 이 중에 1,800파운드급 철갑폭탄(16인치 포탄을 개조해 제작)을 장비한 수평폭격기 B5N 케이트 49대는 전함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리고 비행장 폭격용으로 250kg 폭탄을 탑재한 아이치 D3A1 발 급강하 폭격기 55대, 그리고 폭격기들을 엄호하고 지상에 기총소사를 가할 A6M 제로 전투기 43대도 있었다. 호위전투기를 이렇게 많이 배치한 것은 중국전선에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 폭격기는 현대식 전투기의 공격에 아주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에뜨랑제의 태평양전쟁사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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