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나의사랑-송민도 작사 손석우 작곡 손석우
一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二 나 혼자 만을 그대여 생각해 주 나 혼자 만을 그대여 사랑해 주 나 혼자 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 주
言論에 加해진 無差別 彈壓 강제합병을 앞두고 통감부는 합병에 방해가 되는 여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1910년 7월 18일, 통감부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사진〉는 신문사 사장과 편집인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항일 논조를 철저히 탄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인심을 선동하는 기사와 비분강개조의 논설을 엄금하며 위반하는 자는 치안방해죄로 엄중 처벌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전까지는 형식상으로 대한제국 내부(內部)가 관장했던 신문검열 업무도 통감부 경무총감부가 직접 맡게 했다. 이는 통감부가 한국의 경찰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취하게 된 조치라고 강변했다.
아카시의 부관 야마가타 시즈카(山形閑)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무장 항일 투쟁을 '의병'으로 부르지 말 것, 이들을 선동하거나 은연중 동정하는 내용을 보도하지 말 것, 한일관계를 소원케 하거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기사를 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대한매일신보, l910.7.19., '경무총장의 경고', 경성신보, '韓字新聞の取締').
통감 데라우치가 서울에 부임한 뒤 20일이 지나지 않아서 신문 6개, 잡지 1개에 발행정지(정간) 명령이 떨어졌다. 8월 3일에는 황성신문•일한통신을 한꺼번에 압수•정간처분 하였고, 3일 뒤에는 조선일일신문(일어, 8.6.), 서울 프레스(영어, 8.6.), 조선신문(일어, 8.10.), 대한민보(8.18.)에 정간을 명했다.
대한매일신보는 8월 17일 정간당했다가 10일 뒤 합병 발표 3일 전인 26일에야 속간했다. 한국어 신문, 일어 신문, 민족지와 친일지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탄압이었다.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간의 이유는 '치안방해'라는 간단하고도 포괄적인 조항이었다. 일본인 발행 '조선일일신문'은 광고에 과격한 문자가 있다는 이유로 정간과 함께 사법처분을 받는다는 보도도 있었다(대한민보, 1910.8.7.).
경무총감부는 세 사람 이상은 집회를 금지하는 동시에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이라도 합병에 방해가 되는 기사의 국내 유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검열관을 시모노세키에 파견하여 사전에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국내의 언론은 완전히 재갈이 물렸고 해외 소식도 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만화>(일본인 발행 '일한통신'과 친일지 '국민신보'의 거짓기사를 풍자한 '대한민보' 만평, 1910.3.8.).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