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 그 사람-주현미 작사 정은이 작곡 남국인
一 희미한 불빛 사이로 마주치는 그 눈길 피할 수 없어 나도 몰래 사랑을 느끼며 만났던 그 사람 행여 오늘도 다시 만날까 그날 밤 그 자리에 기다리는데 그 사람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아 그 날밤 만났던 사람 나를 잊으셨나 봐
二 희미한 불빛 사이로 오고 가는 그 눈길 어쩔 수 없어 나도 몰래 마음을 주면서 사랑한 그 사람 오늘밤도 행여 만날까 그 날밤 그 자리에 기다리는데 그 사람 기다려도 오지를 않네 자정은 벌써 지나 새벽으로 가는데 아 내 마음 가져간 사람 신사동 그 사람
三 희미한 불빛 사이로 오고 가는 그 눈길 피할 수 없어 나도 몰래 사랑을 느끼며 만났던 그 사람 행여 오늘도 다시 만날까 그 날밤 그 자리에 기다리는데 그 사람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아 그 날밤 만났던 사람 나를 잊으셨나 봐
總督府가 成均館을 解體한 까닭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이 일제 강점 직후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1911. 6. 15.)에 따르면 성균관을 폐지하고 총독 감독하에 경학원(經學院)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는 것이다. 총독부가 발표한 '경학원규정'(조선총독부령 제73호)의 제1조를 보면, '경학원은 조선 총독의 감독에 속하여 경학을 강구하며 문묘를 제사하며 풍교(風敎) 덕화(德化)를 비보(裨補)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원래 성균관은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을 충렬왕 때 성균감(成均監)이라 고치고 뒤이어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조선 개국과 한양 천도 후에 숭교방(崇敎坊:지금의 명륜동)에 터가 정해져 태조 7년(1398)에 성균관의 교사를 창건하였다. 교육과 인재 양성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성균관은 생원(生員)•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소과)에 합격한 15세 이상의 양반 자제에게만 입학자격을 부여했다.
본과생의 정원이 초기에는 200명이었고 후기에는 126명으로 조정되었다가 말기에는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에게는 국가가 모든 교육비용을 부담하였으며 과거(科擧)에도 특전을 주었다. 성균관의 교육내용은 유교의 경전인 사서오경과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기본으로 하였다〈사진〉(성균관대 유교학과 학생들이 명륜당에서 전통방식에 따라 공부하는 모습). 성균관 유생들은 국정에 불만이 있을 때 지금의 대학생처럼 '수업거부'[이를 권당(捲堂)이라 함]나 '집단 귀가'[성균관을 비운다는 뜻으로 공관(空館)이라 함]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했다. 세종 때 궐내에 불당을 세우려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으로 '공관'하여 세종이 크게 노한 적도 있었다.
성균관은 조선 전기에는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었으나 17세기 이후 각 지방에 서원(書院)이 발달함에 따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본래 기능이 더욱 약화되었는데, 일제 강점 직후 경학원으로 바뀜으로써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이다.
총독부는 경학원을 총독의 직속기구로 만들면서 그 역할을 경학 연구, 석전제(釋奠祭)의 거행, 풍속 교화 등으로 축소시켰다. 성균관이 전통적으로 수행했던 국가 인재양성이란 고유 기능을 제거하고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필요한 교화 선전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총독부는 또한 경학원을 통해 유교의 충효이념을 일본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려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따라 지방의 유력 인사들을 끌어들여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에 협조를 유도하려고 했다. 1911년 7월 31일 경학원 직제에 따라 새로 임명된 대제학 박제순(朴齊純), 부제학 이용직(李容稙), 사성 이인직(李人稙) 등이 모두 대표적인 친일인사라는 점에서 총독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환원되었고, 그 해 11월 전국의 유림 1000여명이 모여 교육기능을 가진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결의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