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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동진
‘봄이 오면’ ‘가고파’ ‘조국찬가’… 국민애창곡 1000여곡 남겨
▲ photo 이보림 |
김동진(金東振)은 국민 누구나가 평소 즐겨 부르는 가곡 ‘봄이 오면’과 ‘가고파’를 작곡한 한국의 대표 작곡가다. ‘내 마음’ ‘수선화’ ‘목련화’ 등 주옥 같은 가곡으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온 그는 신창악곡 오페라 ‘심청전’ 등 10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열정적인 음악인이다.
북한 공산당에 반동으로 몰린 김동진은 6·25전쟁 때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월남한다. 그후 ‘행군의 아침’ ‘조국찬가’ ‘6·25의 노래’ 등 수많은 군가와 국민가요를 지어 북한 공산당의 ‘탄압’에 복수했다. 그는 서양의 발성법과 우리 고유의 판소리를 결합한 신창악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한류음악’의 원조이기도 하다.
김동진은 1913년 3월 22일 평남 안주에서 김화식(金化湜)과 백금주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김찬성에 이어 목사 일을 보던 부친은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지휘하다 2년6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다 조부와 함께 순교당했다. 김동진은 강화(江華) 김씨로 경주 김씨의 갈래이다. 신라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의 7세손을 기세조로 한다. 이 사람은 고려 명종 때 하음백(河陰伯)에 임명되어 당시 강화에 내란 평정에 공을 세워 ‘강화 김씨’를 하사받았다. .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남도 안주다. 나의 할아버지가 본촌인 평남 숙천 송저리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후 얼마 뒤에 목사가 되셨다. 본촌에서 나와 안주로 와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목사 일을 보았으며, 나의 부친도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계속 안주에서 목회를 하셨다.… 안주는 작은 도시이며 경의선 철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경편철도로 신안주에서 20리 정도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안주는 옛 성터로서 고적도 많고 산수가 아름답다. 그 유명한 청천강을 끼고 안주역에 도착하면 백상루가 눈앞에 나타난다. 백상루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껴 누각에 오르면 북으로 청천강의 기다란 강이 맑고 빛나게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가고파’ 김동진 자작 에세이)
김동진은 어린 시절 부친이 목회하던 교회의 풍금을 치며 놀다가 배운 노래를 짚어보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부친은 여름방학을 맞아 귀갓길에 바이올린을 사다준다. 부친은 평양신학생이었고, 김동진은 11세 초등학생이었다. 이즈음 겪은 3·1독립만세 사건을 김동진은 떠올리고 있다.
“할아버지가 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으며, 아버지가 교회의 조사일을 보고 계실 때였으므로 만세사건의 사전 계획은 전부 우리 집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태극기를 야밤중에 몰래 숨어 제작하던 일이며 선언문 등의 전단을 프린트하는 작업, 그밖에 독립만세 부를 장소 등을 전부 집에서 일본 순사놈들의 눈을 피해가며 은밀히 계획하였다. 그때 그 비장하게 굳어 있던 어른들의 표정은 무섭기조차 하였다. 비록 어렸을 때 일이지만 비밀리에 하던 일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며, 만세 부르던 당일 교회에서 일제히 일어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가며 만세를 부를 때 나도 어린 마음에 들떠 그 꽁무니를 따라 나갔다.”(‘가고파’)
김동진은 1927년 안주 유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에 진학해 미국인 선교사 말스베리에게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악과 대위법 작곡법을 배운다. 전 국민의 애창곡 ‘봄이 오면’은 그가 중학 5학년(18살) 때 작곡한 것이다.
“나는 숭실중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학교 음악실에 가서 혼자 바이올린 연습을 끝내고 풍금을 치면서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소 애송하던 파인 김동환님의 시 ‘봄이 오면’에서 ‘건너 마을 젊은 처자’의 악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동시에 나의 손가락은 어떤 선율을 짚고 있었다. 곡이 완성된 후, 나는 한 방에서 같이 지내던 장택욱군에게 처음 그 노래를 배워주어 함께 불렀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기숙사에 퍼졌으며 숭실전문학교에까지 파급되어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애창되었다.”(‘호심의 독백’ 김동진)
김동진은 문학에도 상당히 흥미를 가져 ‘봄이 오면’뿐만 아니라 주요한의 ‘부끄러움’, 이광수님의 ‘외붓 한 자루’ 등은 늘 외우고 다니던 애송시였다. 그는 말스베리 선생으로부터 정식으로 바이올린 지도를 받는다. 또 피아노 조율법도 배워 용돈을 벌게 되어 이후 학교 생활에 큰 도움을 받는다. 1932년에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해서도 말스베리 선생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며, 성악은 루스 부인에게 배운다. 루스 부인은 숭실농과대학 선생의 부인으로 유명한 성악가였다.
“나는 늘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학의 작곡과를 지망한 학생이나 작곡하는 이들에게 ‘작곡가가 꼭 되고 싶다면 먼저 유명한 연주가가 되라’고 권한다. 연주를 못하고는 음악 세계를, 특히 멜로디 세계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음악의 언어, 즉 작곡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작곡한다는 것이 음악 세계의 사람으로서 음악의 언어를 잘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주는 꼭 필요하다.”(‘가고파’)
대학 1년생인 김동진은 대동강 뱃사공들의 흥겨운 뱃노래를 ‘어떻게 하면 그대로 오선지에 옮길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어야지어 어야지여’…. 그는 공부방으로 돌아와서는 끙끙 앓으며 곡을 붙여나갔다. 가사가 미처 다 정리되지 않아 곡부터 작곡됐으며, 훗날 김동진과 동창인 시인 김현승이 처음 가사를 붙였고, 더 먼 뒷날 이 곡에 절수(節數)를 늘릴 적에 역시 그의 친구인 시인 양명문에게 의뢰해 절수를 늘렸다. ‘뱃노래’는 김동진의 절친한 학우인 이용준(바리톤)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평양 음악회에서 발표해 대단히 좋은 평을 받는다.
대학 2학년 때 김동진은 양주동 선생으로부터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은상의 시조 ‘가고파’ 10수(首) 강의를 들었다. 그 시조가 너무나도 큰 감명을 주어 곧 작곡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김동진은 그때 이 시조를 현제명이 작곡해 늘 독창하는 것도 듣고 또 그 악보도 보았다. 자기도 이 시를 가지고 한번 작곡해 보겠다는 열정에 북받쳐 즉흥적 감흥이 떠오를 때마다 노트에 적어 두곤 했다.
“하루는 어떤 기회로 ‘봄이 오면’과 함께 ‘가고파’를 나의 스승에게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면서 ‘너는 작곡가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바이올린만 아니라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등을 배우도록 하라’ 하시면서 나에게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부 가르쳐주셨다. 이 노래는 그후 친구들이 많이 불러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이처럼 이 노래가 유명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며, 그 당시에는 몇몇 성악가들의 애창곡으로 무대에도 올려졌다.”(‘가고파’)
김동진은 나머지 6수는 ‘가고파 후편’이라고 이름 붙여 40년 후인 1973년에 완성시켜서 발표한다.
“아마도 40년 만에 곡을 완성한 예는 음악사상 없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20대 작곡 감정과 60대의 작곡 감정이 전혀 다를 것이로되 예술이라는 것은 몸은 늙어도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내가 20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여 늘 숙제로 삼았던 곡을 60대에도 20대의 감정을 가지고 연결하여 완성한 것이다. 내가 작곡을 전공하게 된 동기도 이 ‘가고파’ 때문이었다.”(‘가고파’)
김동진은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재학 중 이미 6~7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당시 평양에서 명창 이동백이 이끄는 창극단의 심청전과 춘향전의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신창악 운동의 밑거름이 된다.
김동진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 하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바이올린과를 택하며, 졸업연주회에서는 부루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 악장을 연주한다.(‘가고파’)
193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김동진은 만주로 향한다. 당시 만주 신경에서는 새로 교향악단을 조직하기 위해 널리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부친의 친구인 신경교회의 김창덕 목사가 그를 꼭 그리로 오라고 종용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만주국 수립 10주년 기념 경축 음악회에서 한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만주 등 5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할 때 일본 유학 시절의 작품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제1악장’을 직접 지휘해 대호평을 받는다.
가곡 ‘내마음’과 ‘수선화’는 당시의 작품인데, ‘수선화’는 낭만적인 성격의 그를 매료시킨 나머지 거의 즉흥적으로 건반 위에서 작곡된 것이다. 특히 ‘내마음’은 그가 늘 애송하던 초등학교 시절 은사 김동명의 시로서, 적공을 들인 작곡의 사연이 돋보인다.
“신경에서 유명한 남호라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이 곡의 멜로디를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악상을 얻지 못하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조일(朝日) 통로를 걸어 동보극장 앞을 지나칠 때 돌연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의 선율이 떠올랐다. 나는 잊어버릴세라 입속으로 중얼대며 연습장에 와서 오선지에 옮기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 곡이 완성될 무렵, 이인범·김생려씨 등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후생악단이 신경에서 순회 음악회를 하였는데, 이때 이인범씨가 내 집에 놀러왔다가 아직 정리도 안 된 ‘내마음’의 초고를 그대로 갖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 노래를 불러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에 퍼졌던 것이다.”(‘목련화’ 김동진 가곡집)
1945년 8월 15일 김동진은 만주에서 평양으로 귀국한다. 평양국립교향악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해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약한다. 이 시기 작품으로는 ‘신 밀양아리랑’과 주요한의 시 ‘부끄러움’, 김영삼의 ‘섬색시’가 있으며, 만주 시절에 시작했던 ‘심청전’은 이때 비로소 완성한다.
‘가고파’는 광복 이후 공산치하 이북에서도 많이 불렸는데, 한번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돌연 국립극장장이 중지를 시켰다.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나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이 문구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니 현재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금지곡으로 찍어버렸다. 김동진은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숙청된다. 조부와 부친은 투옥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끝내 옥사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동진은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월남한다. 그때가 12월 4일. 김동진은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 건너야 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결의와 모험심이 강한 사람만이 철교 위를 다람쥐처럼 기어올라 대동강을 건너고 있는 서늘한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부르면서 철교를 건넜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혹한이 몰아치는 북서풍의 차디찬 바람도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손끝이 아찔아찔하고 엉금엉금 옮기는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가고파’)
김동진은 그때 대동강을 건너면서 두 누이동생과 숙부도 만났다. 그중 한 누이동생 선옥(87)씨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임진강을 거쳐 서울에 온 김동진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헌병의 심문을 받는 순간 그들 일행의 신분을 확인해줄 증거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궁여지책으로 ‘당신 가고파라는 노래 아시오?’ 물었더니 의외로 두 헌병 모두 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그 노래를 작곡한 김동진이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 헌병이 자기가 내 음악회를 본 적이 있다면서 그때의 상황을 말하라는 데까지 질문이 발전하고 나서야 두 헌병이 ‘가고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때 비로소 ‘가고파’가 오히려 여기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마음’ 김동진 가곡집)
이후 김동진은 군가보급합창단을 지휘하는 한편 ‘행군의 아침’ ‘병기애호의 노래’ 등 많은 군가를 작곡한다. 어릴 적 친구인 시인 양명문과 함께 향로봉을 비롯해 여러 번 일선 병사를 위문하며, 가는 곳마다 사단가, 부대가를 작곡해 ‘음악으로 보국’한다.
군 복무했던 사람들은 새벽에 ‘행군의 아침’을 부를 때마다 늘 뭉클한 마음이 솟곤 했다고 한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비록 군가이긴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새겨보면 김동진의 독특한 분위기가 와 닿는다.
“‘행군의 아침’은 내려와서 맨 처음 작곡한 거예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찻간에서 작곡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조, 마이너를 좋아해요. 그래서 단조를 썼지.”(‘김동진 인터뷰’ 월간조선 1999년 3월호)
김동진은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장을 거쳐 1953년 서라벌예대 교수가 된다. 당시 주로 영화음악을 다루면서 소월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 ‘길’ ‘초혼’ ‘못잊어’와 ‘창문을 열면’을 작곡한다.
1964년 경희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74년 경희대 음대 초대학장이 되며 1981년 예술원 회원이 된다. 김동진이 일생의 대작으로 꼽는 ‘심청전’은 1978년에 완성한다. 만주에서 쓴 것을 몽땅 찢어버리고 판소리를 배우면서 46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1979년 신창악회를 창설해 회장직을 맡는다. 신창악이란 판소리의 창법을 가곡과 오페라에 접목하려는 시도다. 우리 전래의 창이 구전으로만 전수되는 것이어서 이를 악보로 남겨 성악곡으로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1950년대에 문공부에서 판소리 채보사업이 있었어요. 그때 나운영, 김성태, 나, 셋이서 춘향전 판소리 채보하는 사업을 맡았는데… 그때 김소희한테 가서 1년 동안 집을 드나들며 배웠어요. 심사 결과 내 것만 오케이됐어. 국악 하는 사람들 모아놓고 채보한 대로 내가 노래 불렀거든요. 판소리 명창 임방울 알죠? 그때 그분이 새로운 판소리 명창이 나왔다고 그랬어요. 신창악에도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인재가 나와야 해요.”(‘김동진 인터뷰’)
김동진은 1986년에 판소리 채보집 ‘한국정신음악 신창악 작곡집’을 내며, 1990년에는 신창악 발표회를 연다. 김동진은 2009년 7월 31일 서울 금호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영락동산에 안장된다.
김동진은 월남해서 결혼한 이보림(83·재령 경신여고 졸업)씨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신영(60·경희대 체육학과 졸업)씨는 신일고 교사를 역임했으며, 차남 신원(50·미 코넬대 조경학 석사, 경희대 박사)씨는 경희대 교수로, 강현경(47·홍익대 조경학 석사)씨와 결혼했다. 딸 신화(55·서울대 음대 피아노과 졸업)씨는 강영재(60·미 조지아대 식품위생학 박사, 컨설팅 회사 운영)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김동진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동진 선생은 우리 가곡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구적 작곡가다. 그분의 작곡법은 곧 우리 후학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유절(有節) 가곡에서 통절(通節) 가곡을 만드신 분이다. 유절 가곡은 애국가 같은 것이다. 몇 수의 시가 있다면 각 수마다 똑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는 것이다. 김동진 선생보다 시대가 조금 앞선 홍난파나 현제명의 가곡이 유절 가곡이다. 이에 비해 통절 가곡은 각 수마다 다른 멜로디를 붙인 것이다. ‘가고파’가 그렇다. 각 수마다 그 시어(詩語)의 정서, 이미지를 살려 제각기 다른 곡을 붙이는 것이다. 가곡이 한국적이냐 아니냐라는 찬반론은 차치하더라도 김동진 선생이 한국 가곡의 한 정형을 만들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리 가곡을 애창 가곡 수준에서 예술 가곡으로 한 차원 높이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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