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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면-김지연///藥令市에 全國의 物産이 모이다

bsk5865 2014. 7. 29. 10:5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7.29 06:38

 

 찬바람이 불면-김지연///藥令市에 全國의 物産이 모이다(D)|★....演歌 게시판

黃圭源 | 0 http://cafe.daum.net/enkamom/KTiH/5388 


찬바람이 불면-김지연


찬바람이 불면-김지연

작사 작곡 김성호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가는 바람 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떨어지는 낙엽 위엔 추억만이 남아 있겠죠

한때는 내 어린 마음 흔들어 주던
그대의 따뜻한 눈빛이
그렇게도 차가웁게 변해 버린 건
계절이 바뀌는 탓일까요

찬바람이 불면 그댄 외로워 지겠죠
그렇지만 이젠 다시 나를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지만 이젠 다시 나를 생각하지 말아요


藥令市에 全國의 物産이 모이다

황성신문 1908년 5월 27일자에 다음의 기사가 있다.

"대구에 약령시 터가 협착하야 관찰군수와 일반 인민이 논의하야 남문 성벽을 헐고 그 기지에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관찰사가 북성(北城) 인민의 말만 듣고 북성 가에 설치하려고 몰래 운동하다가 농상공부에 탄로되야 약령은 영원히 남성의 기지로 정하였다더라."

개항 전부터 대구와 공주에서는 영시(令市)가 열렸다. 대구와 공주의 영시는 약재를 취급하는 특수 시장으로서 성립하였으나, 개항 초에 이미 일반 상품을 취급하는 시장으로 발전해 있었다. 1890년대에는 전주•진주•충주에도 영시가 창설되었다. 전주 영시는 그 지역 감사가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설했다. 이들은 개시(開市)기간을 달리하여 진주 영시→대구 영시→공주 영시 순으로 열렸다.

일본 외무성 통상국이 편찬한 '통상휘찬'에 의하면, 대구 영시는 남문부터 북문까지 통하는 거리가 약 1㎞이며 길의 좌우는 모두 점방으로 여기서 물품을 파는 자는 대개 각 도의 여객(旅客)이었다. 1900년 가을 전국으로부터 6만명이 이 시장에 몰려왔다고 한다. 상인은 만명 정도였는데, 그중 보부상이 7~8할을 차지했다.

1885년 거래된 물품을 보면, 경상도 물산은 대구의 무명•비단, 안동•상주•영천•자인의 모시•삼베, 경주•성주의 약재, 동래의 구리, 기타 잡화이다. 그 밖의 각도 물산은 전라•충청의 염색한 비단•모시, 안성•전주의 유기, 경기의 털가죽, 개성의 인삼, 함경도의 삼베, 강원도의 약재, 평안도의 비단 등이다. 동래에서 오는 것은 일본제이고 평안도의 비단은 중국제였다. 당시 대구 영시는 약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특산물이 집산되어 거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된 약재와 비단도 거래되는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였다.

영시는 개항기에 수입품을 활발히 취급하고 외국인 행상을 끌어들여 성장하다가, 1900년경부터 쇠퇴하여 한일합방 당시에는 대구 영시만 남았다. 대구 약령시〈사진〉는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열렸는데, '조선은행월보'는 1911년 가을에 열린 시장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시는 지금 남대문 밖에 열리고 있는데, 지방에서 모여드는 사람이 매우 많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5~6시까지는 사람의 어깨가 서로 맞닿을 지경이다. 비단 약재의 거래뿐만 아니라 다른 상가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영시 덕분에 조선상인들이 매일 얻는 금액은 4000원(圓) 내외로 추계된다. 영시 기간이 1개월이라면 총액은 13만~18만원에 달한다. 그중 약재거래는 7만~10만원 정도이다. … 대구정거장에 1월 중 약재 발송량은 271톤, 도착량은 120톤이라고 한다. 열차편을 이용하지 않고 집산하는 양은 대략 위와 같거나 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약재가 평소에는 전무(全無)한 것으로 보건대 영시가 얼마나 번성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대구 영시는 1918년경부터 점차 침체하여 약재만 취급하는 특수 시장으로 복귀하였다. 철도 등 교통의 발달과 도시시장의 성장으로 원격지 유통의 거점인 영시는 쇠퇴하였던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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