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때문에-문희옥 작사 박용진 작곡 박용진
一 몰라주네 몰라 주네 그대만을 사랑하는 맘 정만 남겨두고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는 무정한 당신 그렇게 가버린다고 마음 마저 떠나나요 아 야속한 사람아 잊을 수 있다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오늘도 아 정 때문에 운다
二 몰라주네 몰라 주네 그대만을 사랑하는 맘 정만 남겨두고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는 무정한 당신 그렇게 가버린다고 마음 마저 떠나나요 아 야속한 사람아 잊을 수 있다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오늘도 아 정 때문에 운다
그렇게 가버린다고 마음 마저 떠나나요 아 야속한 사람아 잊을 수 있다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오늘도 아 정 때문에 운다 정 때문에 운다
鐵道 自立을 꿈꾼 朴琪淙 경인선(1899)•경부선(1905)•경의선(1906)•호남선(1914)•경원선(1914) 등 한국의 간선철도는 모두 일본이 부설했다. 철도 부설은 광복 이후 일본이 내세운 소위 '식민지 시혜론'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철도 부설을 시도한 한국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영남지선철도회사 등을 잇달아 설립한 박기종(朴琪淙•1839~1907)〈원내 사진〉이 그 주인공이다.
부산포 가난한 상민 집안에서 태어난 박기종은 어려서부터 일본어를 익혀 일본을 상대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김기수를 수반으로 한 제1차 수신사가 일본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통사(通事:통역관)로 발탁돼 일본의 근대 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박기종은 철도와 기차에 충격을 받았고, 자기 손으로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일본에 철도가 부설된 것은 그보다 4년 전인 1872년이었다.
통사 자격으로 수신사 일행을 수행한 이후 박기종은 무관 벼슬을 얻어 관계로 진출했다. 부산항 경무관(警務官)으로 근무하던 1895년 부산 최초의 신식학교인 개성학교를 설립했다. 개성학교는 1908년 공립부산실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이어졌다. 20여년간 개항장 부산항의 치안과 관세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국가 중흥을 위해서는 산업을 개발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두 아들을 일본 광산•철도학교에 유학 보냈다.
60세가 되던 해인 1898년 외부 참서관(정3품)으로 중앙 관계에 진출하게 되자, 그는 부산항과 하단포를 연결하는 경편철도〈사진〉(동래온천장 왕복기차•1910년대)를 부설하겠다는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하철도회사를 설립했다. 부하철도는 여러 번 측량을 실시했지만,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한 번 실패에 굴하지 않고 이하영•지석영•이인영 등 부산 출신 유력인사를 규합해 대한철도회사(1899)를 설립하고, 서울~원산, 원산~경흥을 잇는 경원선과 함경선 부설권을 확보했다. 경의선 부설권을 확보한 프랑스회사가 3년이 지나도록 착공하지 못해 특허를 상실하자 대한철도회사는 경의선 부설권마저 가져갔다.
계획대로 철도가 부설되었더라면 박기종은 서울과 이북을 잇는 간선철도 운영권을 모두 장악한 '철도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외자 도입을 거부하고 민족자본을 고집하다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특허 기간인 1년이 지나도록 착공하지 못하자, 경원선과 경의선 부설권은 궁내부 직할 철도국으로 환수되었다. 1902년 박기종은 영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 부설권을 확보했지만,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자금•기술 부족으로 일본의 경부철도회사에 부설권을 매도하고 철도 부설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국 정부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한국 내 모든 간선철도를 군사철도로 부설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 간선철도의 부설권과 운영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박기종은 청장년 시절 어업으로 축적했던 막대한 재산을 철도 부설에 쏟아붓고 1907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