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노래-소년소녀합창단 작사 정인보 작곡 김성태
一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二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三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檀君 1993년 10월,북한은 평양시 강동군 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하면서,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단군릉 에서는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 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는데,이 유골을 전문연구기관에서 감정한 결과 하나는 남자,하나는 여자의 것이며 약 5,0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되었기에 이 능에 단군부부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 뒤 북한은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그전까지 신화적 인물로 여겨온 단군이 실존인물이며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 시조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 및 외국 역사 학계에서는 북한이 사용한 조사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회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평양에 있는 단군릉이 진짜 단군의 능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단군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 인물 이라는 사실은 남한에서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 가운데 단군에 대해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의 모습은 역사라 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그래서 단군신화라 불렸지만,이는 단군 이라는 역사적 존재에 대한 고대 사람들의 서술 방식이 신화적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글 귀 하나하나를 현대적 의미로 풀어가다 보면 단군과 그가 건국한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단군은 하늘의 신인 환인의 서자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기에서 서자란 말 그대로 맏아들이 아닌 아들을 가리킨다. 환웅이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자 환인이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매,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듯 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며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삼위태백에 대해서는 묘향산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라고도 하고 중국의 서쪽에 있는 어느 곳이라고도 하는등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천부인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 견들이 있지만,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의 상징이라 파악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스스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했다. 그는 바람을 주관하는 풍백(風伯). 비를 다스리는 우사(雨師) 구름을 다스리는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환웅이 바 람 • 비 • 구름의 신을 거느렸다는 기록에서 그가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종교적 권능도 동시에 갖춘 권력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군의 어머니는 곰이 인간의 몸으로 변한 웅녀이다. 같은 동굴 에 살던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늘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폼을 얻을 것이라 했다.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했으나 곰은21일 동안 이를 잘 지켜 여자의 폼을 얻었다. 그러나 혼인할 사람이 없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런 웅녀를 보고 환웅이 잠시 사람의 폼이 되어 혼인한 뒤 얻은 아들이 단군왕검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는 외부에서 유입된 세력을 의미한다. 단군신화의 이 부분도 곰을 신성시하는 종족과 호랑이를 신성시하는 종족이 함께 살고 있는 곳에 단군 세력이 들어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호랑이를 신성시하는 종족과의 결합은 실패했고, 곰을 신성시하는 종족과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맺어 고조 선을 건국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곰은 유라시아(Urasia.유럽과 아시아를 이르는 말)북부지역이나 아메리카북방지역 그리고 중국에서도 신성시되었던 동물이다. 또한 곰이 21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쑥과 마늘만으로 연명했다는 것은 일종의 성년식을 거쳤다 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신성한 존재인 곰이 일정한 자격까지 갖추어 하늘신의 아들과 혼인하는 데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음을 보여주며,한발 더 나아가 단군의 출생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대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대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지만,조선 후기부터 만주의 랴오닝 지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현재는 오히려 이것이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요 임금과 같은 시대(기원전 2300년경)에 고조선을 세웠다고 전하는 부분은,단군과 같은 정치권력자는 청동기시대에나 출현하는데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기원전 10세기 전후이므로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그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고조선의 중심지가 만주 지역이라면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건국 연대를 기원전 2000여 년까지로 끌어올릴 수 있다. 단군이 2300년 무렵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사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후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전한다.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 이에 대해서는 단군왕검이라는 말이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왕 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가
고조선이 멸망한 뒤 그 지역은 한나라의 군현이 되었다. 고구려가 고조선 지역을 차지한 것은 그로부터 400여 년이 흐른 뒤였다. 그 무렵 이미 삼국은 제각기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별로 없었고,그러다 보니 단군에 대한 관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단군신화는 일부 고조선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 민간 신앙의 형태로 이어져왔을 뿐이다. 고려 전기까지는 삼국 이전의 역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고,따라서 단군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단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 장기간에 걸친 대몽항쟁을 겪으면서이다. 전 국토가 유린되는 엄청난 국난을 겪으면서 고려 사회 내부의 결속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로 단군을 주목한 것이다. 당시 편찬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는 단군을 우리 역사의 첫 장에 올려 단군이 우리 모두의 공통된 뿌리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때부터 단군과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택함으로써 고조선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보여준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 단군을 제사 지내는 묘당을 만들어 정기적인 제사를 지내는 등 단군을 민족의 기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단군에 대한 숭앙(뽕때)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후 중화주의(中華主義,중국을 세계관)의 영향으로 단군보다 기자를 중시했으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겪으면서 단군에 다시 주목하게 되고,조선 후기 실 학자들에 의해 고조선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서양 세력과 일제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 서 단군에 대한 의식은 다시 높아졌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대종교 등 단군 신앙 운동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에게 단 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아챈 일제는 식민사학(植民史學,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항일민족의식의 성장 을 막기 위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국사 연구들의 총칭)을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의미를 깎아 내리려 했다. 뿐만 아니라,학교를 통해 이러한 생각들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광복 후 단군은 새 국가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뿌리로 정착했다. 단군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할 때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할 때마다 끊임없이 주목의 대상이 된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