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1.20 17:01
-단편소설- '적기가'에 얽힌 아찔한 '추억'★....일반 게시판
단편입니다만 소설이라 긴 글입니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인기 몰이를 하고 있어 그 즈음, 제가 어릴적 부산에서 겪었던 일을 엮어 써두었던 얘기가 생각나, 컴에서 이 글을 꺼집어 내어 소담 회원님들께 띄웁니다.
(이 단편을 제가 종합문예지 [한국문인]이란 잡지에 공모에 응하여 신인문학상으로 당선되어, 2013년 초 소설가로 등단하였습니다.)
-단편소설-
‘인공기’에 피어나는 ‘적기가’ 추억
이헌진 (돌이캉놀자) 작
며칠 전 컴을 앞에 놓고 ‘촛불시위’ 상황을 뒤지다가 넷 신문 한 귀퉁이에 ‘민노당 당사에 인공기가 왠 말인가’ 하는 제목이 눈에 띠어 열었더니, 5. 6층 되는 건물의 중앙 외벽에 세로로 2층에서 5층쯤까지 ‘민주노동당’ 이란 당명을 색인 돌출된 간판이 걸려 있고, 건물의 앞 측 모서리에 게양대 두 봉이 솟아 있는데 세밀히 살펴보니 건물 중심 쪽의 다소 높은 게양대에 인공기가 낮은 게양대에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고, 이런 형상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는 기자인지 시민인지 모를 두 사람의 모습이 함께 찍혀 있는 사진이 올라 있다.
칠십을 넘긴 내 몸체에 수분이 메마르고 무디어진 피부신경에 반사적으로 섬뜩한 전율이 인다.
언제인가 KBS tv가 이라크 출병보도를 하면서 40초가량 북한의 혁명가요인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깔아 방영할 때, 바로 그 때 내 살갗에 일었던 바로 섬뜩한 그 전율이 분명하다고 느끼면서, 왜 이런 감전된 듯한 피부감응이 일어나는지--, 골몰이 생각하다가 옳지, 6.25 사변 직전 어린 시절에 겪었던 한 아찔한 그 추억의 잔영이 그 원인이다 싶어 눈을 감고 60여 년 전의 아득한 소년 시절의 그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내가 부산 대신초등학교 5학년 때, ‘적기가’로 인해 낭패를 볼 번하였지--.
6. 25 사변이 터지기 2-3년 전이었다. 대신동에 있는 구덕공설운동장에 부산상고와 경남상고의 축구대항결승전이 있었다.
당시 ‘부상고’는 ‘경상고’보다 역사도 깊고, 학생들의 질도 높아 인문고인 경남고나 부산고 등에 버금가는 명문학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도 이 학교 출신이다. 한편 경남상고는 운동장 남 쪽 담장 길 건너에 교사가 있었고, 재학생들은 소위 깡패들이 많았고, 그들은 자칭하여 '경상옴재이'라 칭하였다.
그 누가 “하필이면 '옴쟁이'가 뭐꼬” 하고 물어 볼라치면, “옴이란 겁나능 피부빙인데, 우리를 함부로 건디렸다가는 옴이 올라 낭패 볼끼다이” 라고 응수하는 공갈용 애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상하게도 이런 ‘옴쟁이’들이 어린 청소년들에겐 부산의 다른 고등학생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애정을 받고 있었다. 싸움질 잘하고, 각종 경기 때마다 응원단장의 몸놀림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응원단의 특출한 율동과 질서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산여고 예쁜 여학생들을 옆에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학생들을 보면, 십중팔구가 경상고 학생인 것을 보면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지 싶다.
그 당시 경남상고는 부산상고의 축구 실력에 눌려, 언제나 3대 0 이상의 스코어로 패했다. 부상 축구선수 중에 별명이 황소라는 주장선수가 있었는데 골문 앞에서 슛하는 솜씨는 지금의 박지성에 뒤짐이 없는 일품이었다.
경상 팀이 패배할라치면, 옴재이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산상고 선수와 응원단들을 운동장 복판에 몰아넣고, 발치기, 주먹질, 박치기 등 비 신사적 난투극을 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 구경꾼에게 짜릿한 기분을 선사했고 어린 나에게도 흥분이 이는 즐거움을 주었다.
이런 천적인 부상과 경상의 축구시합이 있든 어느 날, 나는 두 살 아래 인 동생과 축구장 본부 스탠드 옆 관람석 한자리에, 여러 어른들 틈새에 비집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한데, 그 날 시합에는 경상에서는 난데없이 노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농구선수가 축구선수에 끼어 있었다. 그는 힘이 장사요, 키는 팔대장 만한 거구였다. 아니나 다를 까, 시합 중에 노장군은 공차기는 뒷전이고, 부상의 황소 뒤만 따라다니더니 그 황소가 골대를 향해 슛 하려는 순간에 정면으로 돌진하여 그 우람한 오른쪽 다리를 높이 들고 황소의 가슴팍을 향해 앞차기로 일격하니 그 황소는 고목처럼 쓰려졌다. 부상 응원석에서는 흥분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관중들도 기막힌 사실을 보고 '해도 너무 한다'고 웅성거리는데, 넘어진 황소는 수분 간 하늘을 보고 큰 대자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운동장으로 들어온 구급요원들이 들것에 실고 나갔다.
이렇게 경기의 흥미가 극을 다할 때, 내 귓전에 익숙한 '적기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기에 옆을 쳐다보니--, 아니!, 내 동생이 그 힘찬 음파를 예쁜 입술을 모아 신나게 공기 속으로 굴리고 있지 않는가. 마침 내 뒤쪽에 서있던 어른 두 사람이 매가 참새를 노리듯 내 동생 옆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히더니 조용하고 다정하게 "아나 니, 그 휘파람 소리 참 좋네, 그 소리 한 번 더 불어보거라" 하니 그 때야 내 동생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겁에 질려 거만 "응 응" 울음을 퍼트리는 것이다.
나는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위급한 사태를 어린 동생에게 맡겨둘 수 없어, 동생이 입을 열기 전에, 단호하게 두 어른을 보고 "야는 내 동생인데 와 울리는 기요"하고 고양이에게 쫓기어 막다른 구석에 몰린 쥐처럼 대어 들자. "일마야, 니 동생이 방금 분 휘파람 소리는 예사 노래가 아잉데, 애 놈이 오데서 누구한테 배웠능가 알아야 한다 말이다"하는 것이다.
이 때 초등 5년생인 내가 어디서 그런 기지가 생겼는지---. 숨을 들이쉬고 나도 적기가를 휘파람으로 불어대며, "와요, 이 노래가 우쨋다 카능기요. 이 노래는 대신초등하교 정문에 가보면, 해이고보(평행봉의 일본어)가 있는데 거기에서 동네 행님들이 불러사서 신나서 우리들도 배운기라요"하고 능청을 떨었더니 "아 이놈아 새끼가 거짓부리 하능 구마, 너거 집이 오데고 가보자" 하고 내 손을 잡고 끄는 것이 아닌가.
정말 집에 끌려가면 큰일이다 싶어, 마음을 가다듬고 "아재들이 누깅가 모르지만, 우리 아부지는 요, 합천 군수였고, 내 칭구 아부지는 지금 도청 총무국장 이OO씨라요, 그라고, 울 아부지와 둘도 없는 친군기라요, 가볼라카면 가보자고 요" 하였더니 그만 풀이 죽어 이 국장님도 니가 잘 알고 있다 말가"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라모 너거 아부지 성명이 뭐꼬" 하는 것이다.
"문짜 기짜요 성은 이가 이구마, 어디 가서 거짓부린가 알아 볼라카면 알아보라고요" 하였더니
둘이는 이마를 맞대고 잠시 수군수군하다가, 우리 형제를 찬찬히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카기색 소년단의 당꾸스봉을 깨끗이 입고, 얼굴이 초롱초롱한 모습을 보고 거짓말은 아니다 싶었던지 "앞으로 이런 노래는 절대 부르면 안되는 기라 알았제--" 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카기색 당꾸스봉은 도청 학무국에 다니시는 삼촌이 소년단 유니폼인데 가져와 우리 두 조카에게 준 것이다.
정말 아찔한 위기를 모면한 꼬마 형제는 축구시합도 끝나기 전에 집에 돌아와서 안방에 있는 작은 형에게 운동장에서 있었던 사실을 보고하였다.
당시 작은 형은 경남상고의 5학년 재학생으로 노장군과는 동기이고, 경남상고의 육상 400미터 선수인 '야나가와' 와도 동기였다. 이 두 사람은 당시 학연(우익학생단체)에 대항하는 학맹(좌익학생단체)의 주동 인물로 우리 작은 형도 학맹 동조자였다.
이런 형과 나와의 나이 차는 아홉 살로 동생과 나는 형을 마치 하늘의 신 같이 존경했고, 그리고 두려워하였다.
이 작은 형이 나로부터 두 동생이 겪은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듣더니 나에게 칭찬하기는커녕 그 매서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는데 하늘이 별이 수 분간 번쩍이는 아릿한 고통을 주었고, 내 동생에게는 양 볼을 사정없이 서너 차례 후려치자 초등 삼년 생인 여린 뺨은 대번에 벌겋게 부어오르더니 2-3일 후에는 푸르게 멍 자욱을 남겼다가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야 제 살결로 돌아 왔다.
나는 지금도 내가 뺨을 맞은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이유 없는 폭력이라고 형을 원망하고 있다.
우리 집은 동대신동 전차 종점에서 아래쪽으로 두 번째 왼편 동신초등교 뒤편쪽으로 돌아서서 길 왼 편에서 다섯 번째에 있는 네 칸 외줄백이 한식 기와집이었다. 제일 안쪽에 작은 방이고 그 뒤쪽이 부엌이며, 다음 현관 마루 뒤쪽에 방 두 개가 있었고, 대문 쪽으로 간이 부엌이 달린 방이 있었다.
대문 옆은 재래식 화장실로 배설물이 항문을 빠져나오고 이삼초가 지나야 바닥에서 풍덩하는 반향이 들리기 때문에 행여 구멍으로 빠질까 조심하며 근심을 풀었던 기억이 난다.
이 집은 아버지가 자식들의 공부와 과부이신 작은 고모님을 위해 장만하여 둔 집이었다.
내가 동생의 적기가 휘파람 소리 때문 아찔한 위기에서 기어코 벗어나야 했던 이유는 우리 집 대문을 들어서자 첫 방이 당시 남노당부산지부인지, 공산당경남지부인지 조직명은 알 수 없지만 지하활동을 하는 빨갱이 어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무슨 숙덕공론인지 몰라도 자주 회합을 하는 아지트로,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나의 고종사촌인 최 필구 형이기 때문이다.
작은 형은 그 고종형으로부터 쇠뇌 당하였고, 그로부터 배운 적기가와 다른 빨갱이노래들을 자주 불렀고, 이 때 어린 동생들인 우리 귀에까지 귀에 못이 박히듯 익숙해진 곡조였다.
그러니 축구장에서 있었던 동생의 적기가의 휘파람을 추궁당한 일은 어린 두형제의 토끼 같은 가슴에 아찔한 공포를 심어주지 않을 수 없었고, 만약 경찰이 우리 집에까지 들어와 첫 방문을 열고 벽장을 뒤지고 그 속에 들어있는 빨갱이 문서를 찾아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섬뜩한 소름이 끼친다.
나는 요즘 초등 5년생을 보며, 저런 꼬마였던 내가 어떻게 그런 어른스런 꾀를 낼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스스로 맹랑한 소년이 분명하였다고 감복한다.
그 날 이후 작은형이 흥얼거리든 '적기가'는 차츰 빈도가 줄어들었고, 운동장 '위기' 내용을 필구 형이 알게 되었는지 우리집 빨갱이 아지트엔 공산당 아저씨들의 출입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벽장 속에 몰래 숨겨 둔 삐라나 문서들은 말끔히 치워지고 새 벽지로 도배되었음을 내가 그 방에 들어가 확인하였다.
한번은 필구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쪼겐 놈이 참 대단타 니는 큰놈 될끼다, 공부 열심히 쪼아라" 하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작은형으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필구 형으로부터 들어 기분이 별로였다.
그 즈음 필구 형이 우리 집 작은 형 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 날이 많아지고 외출하는 회수가 뜸하여 졌다. 대문소리가 바람에 삐꺽해도 필구 형의 얼굴에 불안의 기색이 스쳐 가는 것을 나는 감지하였다. 공산 지하활동이 순조롭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하루는 작은형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작은 형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살그머니 눈을 떠보니 필구 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결에 들은 대화는 --필구 형 세포 원 중 한사람이 친척의 밀고로 경찰에 끌려갔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동생과의 운동장에서 있은 재치 있는 '대응의 고백'을 다소 의심하여 우리집 아지트 분위기가 바뀌고 있지 않나 싶어 섭섭하였는데, 이 소리를 듣자 '그러면 그렇지 이유는 다른데 있었나 보다' 하고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의 빨갱이 소탕작전이 어부가 거물을 당기듯 옥조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되었다.
내가 부산대신초등학교로 전학 오기 전으로 8. 15해방이 되든 해인지 그 다음 해인지 싶다.
합천읍 내에 치안대니, 경비대니 하며, 어디에서 몰려 왔는지 알 수 없는 애국청년 아저씨들이 서로가 경찰서를 먼저 점령하여 실권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어수선한 혼란기였고, 우리 집 건너편에 살던 일본 경찰의 배부장이란 악질 조선사람 형사를 소위 치안대원들이 가는 밧줄로 묶고 철사로 코를 꿰어 좁은 동내에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또 합천군청에 불이 났었던 그 즈음, 필구 형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우리 집은 합천 경찰서 북편 콩크리트 담과 경계를 하고 있었다.
본 채 큰방에 어머니가 차린 깔끔한 술상을 마주하고 아버지와 필구 형이 막걸리 잔을 비우며 주고받던 대화를 초등 2년인 내가 호기심을 갖고 들었다.
필구 형이 -- 외삼촌!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었고, 곧 남노당이 정권을 잡으면, 가난한자도 없고 큰 부자도 없이 모든 백성이 고루 고루 잘사는 좋은 나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외삼촌께서도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 한 자리 하실 것입니다-- 라는 취지로 운을 띄우자.
--아나, 필구야! 니 공산당에 물들어 지하운동하능거 말릴 수 없다 마능 너무 과격한 행동은 하지 말거라-- 하시면서, --이 세상사는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잘 살끼고, 남의 눈치나 보고 깨으런 놈은 빌어 묵고 사는 기 당연한 이치인기라, 그런데 니 말 대로, 누구나 잘사는 세상으로 바뀌기도 어려울 뿐더러,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능 기라--. 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들이었다.
‘네가 초등 2년 쯤 사타구니 고추가 채 여물기도 전인데, 어찌 그런 가물가물한 기억을 들추어 내는가’ 하며 신빙성을 사시하는 분도 있으리라.
솔직히 나도 노망 직전의 내가 어떻게 반세기가 지난 까마득한 옛 일을 그림을 보듯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 좌우간 내라는 인간은 좀 엉뚱한 데가 있고, 당시에도 나이보다 올되었던 모양이다.
필구 형은 큰 고모님의 두 아들 중 맞인데, 볼과 턱에 밀도 높은 수염의 시퍼런 면도자국이 흰 얼굴 바탕에 조화되어 어울렸고, 쌍거풀 눈에서 번득이는 광채는 상대의 기를 죽이고, 부드러운 선의 코는 곧게 얼굴 중앙에 자리하여 두터운 입술을 돋보이게 하며, 얼굴 전체는 사각형으로 당차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는 치렁치렁하며 굵고 힘찼다.
내 막내 삼촌과 비슷한 또래인데, 잘생긴 삼촌이 여자다운 모습이라면, 필구 형은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막내 삼촌은 일정 시 합천군청 서기였는데, 해방이 되자 '변 창구'라는 이름의 아주 부랑한 빨갱이 치안대 대장이 합천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세력 다툼의 과정에서 경찰서 옆에 있는 군 청사에 음밀하게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작은 삼촌에게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하였다.
아마 부산에 사는 필구 형이 우리 집을 찾게 된 것은 이일로 아버지가 불렀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필구 형이 다녀가고 난 뒤 작은삼촌은 곧 치안대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필구 그놈 정말 똑똑한 놈인데---, 아깝다" 고 어머님께 하는 말씀을 가끔 들었다. 나는 그 필구 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아니하였다. 작은 삼촌을 괴롭힌 치안대장이라는 사람과 처음 만날 때 서로 보듬어 안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것을 내 동생이 보았다고 내게 귀뜸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필구 형이 가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미군이 합천에 주둔하더니, 우리 아버지는 합천군수로 발탁되었다. 미국말 잘하는 합천교회 목사가 추천하여 합천군수로 발탁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해방 후 합천군을 대표하는 초대 행정기관장이 되셨다.
필구 형은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봉구였다. 봉구 형은 명절에 몇 번 본 기억이 있는데 아주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봉구 형은 부산 자유시장에서 용두산 쪽으로 난 여러 길, 중 간 쯤 나 있는 길 어구에 집이 있었는데, 일층을 가게로 개조하여 복지원단 장사를 하고있었고, 생활이 넉넉한 것 같았다. 그러나 마산에 있는 큰 고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못한다고 작은 고모가 원망하는 것을 가끔 들었다.
다시 운동장 사건이 있은 후로 돌아가서 필구 형이 부산 대신동 우리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 대문을 두드리며, "이모님! 이모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누고" 하자 "봉굽니더 문 좀 열어주이소" "그래 봉구 니가 우짠 일이고" 하며 신발을 끌고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자. 봉구 형 뒤에서 무지막한 형사들이 밀어닥치며 신발을 신은 채 작은 형 방문을 열고, 겁에 질려있는 필구 형을 보고 "니가 빨갱이 최 필구 맞제" 하자, 필구형은 체념을 하였는지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포승줄에 묶이어 끌리어 나갔다.
필구 형이 거처하는 방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봉구 형이 경찰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다 고자질 하였나 보다고 생각되었다.
필구 형의 그 매섭던 눈빛이 고양이 앞 쥐처럼 공포에 저려있었다. 강한 사람도 자기를 능가하는 폭력 앞에는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 필구 형이 개처럼 끌려가면서 보인 절망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필구 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작은 형은 봉구 형에 대하여 자기 친형을 경찰에 팔아먹은 파렴치한이라며 경멸하였다.
그 후 일여 년 쯤 지나서 내가 경남중학 일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났다. 토성동의 학교는 군 병원으로 바뀌고, 우리들은 강당을 쪼개어 칸을 질러 수업하다 여름 방학을 만났고, 나는 고향 합천으로 갔다.
그런데 방학 중 합천에 가 있을 때, 공산군이 점령하였다.
당시 작은 형은 경남상고를 졸업하고 합천금융조합에 취직하고 있었다.
합천읍에는 비행기 공습이 잦아 시골로 피란을 다녔는데, 이때쯤 작은 형은 공산주의 사상에 회의를 느꼈고, 차츰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다.
공산군이 마치 반도를 다 점령한양 우리들 앞에서는 의기양양하였으나 매일 매일 멀지 않는 산 넘어 남쪽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그리고 수없이 많은 부상병과 패잔병이 합천초등학교 임시야전 병원으로 혹은 지리산 쪽 황매산을 향해 걸어서, 사람에게 업혀서, 혹은 들것 등에 실려 가는 것을 보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 내무서원들이 충혈 된 눈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보충병들을 모집 훈련시키며, 그 들의 입을 통해 '적기가' 등 행진곡을 토해내었지만 공허하고 미래가 없는 듯한 절규였으며, 특히 형에게는 한 때 무지개의 꿈을 심어주든 적기가를 포함한 빨갱이 노래들이 도처에 늘려있는 인민군 시체를 위한 장송곡이거나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는지 모를 일이다.
'적기가'를 신나게 부르든 내무서원인가 하는 놈이 우리 형제가 아끼든 '가루'라는 개가 있었는데, 이 '가루'를 잡아 보신을 해야겠다고 아버지에게 강요하자, '가루'는 이 말의 뜻을 알아차렸든지 슬그머니 빠져나가 어디론지 가버리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데, 3일 후인가 이 '가루'가 피난 집으로 어설렁 그리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영물의 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과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돌아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가루'를 본 적기가를 입에 달고 있던 못된 빨갱이 새끼가 "쫀깐나 개새끼! 니가 어디 갔다 이자사 오는기야요" 하드니, 아버지에게 보신용으로 제공할 것을 명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루'보다 두 배가 넘는 돼지를 사서 줄테니 '가루'를 그냥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우리 인민군은 조런 약 개를 먹어야 힘이 솟아 미제 놈을 까부술 수가 있는 기야요," 하며, 마루 밑에 웅크리고 있는 '가루'를 향해 따발총을 몇 발 쏘자 꾕 소리를 내며 죽었다. 이를 본 어린 내 동생은 눈물을 흘렸다.
형님은 '가루'의 죽음을 보고 공산군에 대한 증오가 깊어갔고, 고추며, 가지, 배추포기 등을 일일이 세며, 공출을 부과하는 것을 보고, 필구 형이 말한 공산주의 국가가 국민을 위한 이상주의 국가가 아님을 깊게 깨달은 모양이다.
작은 형이나 우리 동생들도 그 이후 '적기가'를 들으면, 분노했고, '적기가'는 사람의 혼을 빼는 주술적 가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는 이 땅에 위 같은 악몽을 떠 올릴 '적기가'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50여년의 시공을 넘어서, KBS가 무려 40초간이나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뿌린 그 음파를 내 귀로 확인은 못하였지만, 그 잔존 음파가 내 피부에 닿았는지, 소름이 치솟는 것을 느꼈는데 또 ‘인공기’가 서울 하늘에 펄럭이는 사진을 본 나는 아찔한 소름이 끼쳐 옴을 느끼면서 6.25의 아픔을 모르는 세대, 해방의 감격을 모르는 세대들의 촛불 시위를 보면서 혀를 껄껄 차며 안타가워 할 뿐, 겨우 이런 글이나 넷에 띠울 수밖에 없음을 한탄하며 긴 글을 맺고 저장을 한 후 컴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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