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엔카 컴나라 운영자 15.01.08 14:12
아래의 동영상(31분)을 보고 격분하지 않으면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으랴 !◆...감동글 게시판
<아래의 동영상(31분)을 보고 격분하지 않으면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으랴 !> 을미사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2][3]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들-신문사 사장, 후에 장관이 된 일본 지성인도 가담>
<명성황후 국장>
[에조보고서] ( 위키백과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윗 사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이 담긴 에조보고서를 작성한 본인 에조입니다. 그리고 밑에 사진은 시해사건에 함께했던 20인의 사진입니다. 에조 역시 시해사건에 참여했구요.
20인 모두가 일본인은 아니었습니다 친일파였던 조선인들 역시 가담했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자 일본당국은 가담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계략을 짰던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에조보고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 일제군이 궁궐로 침입하자, 황후는 궁녀들이 입는 옷으로 입고 궁녀처럼 분장을 합니다. 이에 일제군들은 애를 낳은 여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그렇게 황후가 누군지 가려내는 일을 해냅니다.
그 와중에 아들 순종의 부인이었던 민씨비 역시 한 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이 발생하고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고종과 아들 순종 그리고 민씨비가 보는 앞에서 국모의 배와 옆구리를 세번 칼로 찌릅니다.
그후 국모를 조용한 뒷뜰로 끌고가, 돌아가며 일본 특유의 변태짓을 국모에게 저지릅니다. 국모의 아랫도리를 벗겨내어 국부를 확인한 뒤, 이십명이 돌아가며 강간을 합니다. 에조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차마 자신은 하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 국모 살해에 모두가 다같이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명씩 돌아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이 모든 일을 없애기 위하여 불로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출처_ 네이트판, 위키백과, 지식인 명성황후 찌른 칼, 현재 일본 신사에서 보관 - 시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추정 - 신사 관계자 “ 이번 공개는 극히 이례적인 일 ”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2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사진 1> 쿠시다 신사 정문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사진 2>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칼이 뿜어 내는 살기는 방안을 서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
<사진 3>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사진 혜문스님 )
<사진 4>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 ( 사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 사진 5>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혜문스님 제공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 혹시라도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 것은 맞습니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대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켰다. “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 한일관계의 많은 업보를 담고 있는 칼이군요. 잘 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재를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궁사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사진 6> 히젠도 :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사진제공 혜문스님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 사진 7>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 있다. (사진제공 혜문스님 )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이 곳 옥호루(玉壺樓-복원)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으로 성씨인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이며,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노보예브레먀에 실린 세밀화는 구한말 한국에 머물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등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다른 초상화와 유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성황후의 외모에 관한 글은 구한말 외국인들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숍 여사는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나라들’에서 “1895년 1월 만난 명성황후는 4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며 “까만 머리색과 창백한 피부,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역시 저서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의 15년’에서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명성황후를 묘사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본 것으로 알려진 이폴리트 프랑댕 당시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는 저서 ‘한국에서’를 통해 “고종을 접견하러 갔다가 우연히 본 명성황후는 60cm 길이의 거대한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며 “매우 화려한 차림새였다”고 묘사했다.
을미의병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운동.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일본 낭인들에 의한 민비학살의 비보로 분노하고 있던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민비의 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즉시 '토역소'(討逆疏) 등을 올려 폐위에 반대함은 물론 나아가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하는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나타냈다. 1895년 8월 22일 서울에 창의고시문이 나붙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그의 문인 수백 명이 유생대회인 향음례(鄕飮禮)를 하는 중에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방법으로 공론을 모았다. 또한 10월 11일 충청북도 보은에서 문석봉(文錫鳳)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보은 장터에 격문을 붙이고 회덕으로 진격하여 관아를 습격, 무장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발표된 단발령은 거의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1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2월 아관파천 후 친러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했는데, 당시 유생들은 친러내각도 종전의 친일내각과 다를 바 없는 정권으로 인식했다.
의병의 공격대상은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고 친일내각을 받드는 지방관리, 의병에 대항하는 관군이나 일본군, 그리고 일본인 거류지와 그들의 시설물이었다.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유생들이었으며, 병사는 포수를 비롯해 농민전쟁을 경험한 농민이나 소작농민이 대부분이었다.
유인석을 비롯한 지도부의 유생들은 이항로계열의 척사이념을 바탕으로 했으며, 지도부와 병사 사이에 신분적·정치적 갈등이 일정하게 존재했다. 을미의병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발령이 발표되자 서울에 와 있던 김하락·구연영·조성학 등의 젊은 유생들은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포군(砲軍) 100여 명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1월 중순 이천·여주·안산·남양·죽산·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합쳐 박준영을 대장으로 김하락을 군수 겸 도지휘로 하는 2,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여, 이천과 광주에서 일본수비대를 격파하고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기세가 높아진 연합의병진은 서울진격을 목표로 2월 25일 남한산성을 공략·점령했으나, 3월 중순 일부 의병들이 관군에 매수됨에 따라, 김하락 의진이 안동으로 내려가 서울진격은 무산되었다.
이항로의 문인 이소응·이진응을 중심으로 한 춘천유생들은 400여 명을 포섭하여 춘천관찰부를 기습·점령하고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했다. 강릉에서는 1월 30일 민용호를 대장으로 평창·영월·정선 지방의 포수로 구성된 의병이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영동9군창의소(嶺東九郡倡義所)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면서 기세를 높였다.
충청도 홍주에서는 김복한·안병찬 등이 기의하여 일대를 장악했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그의 문인 서상렬·이필희와 기의하여 호좌창의진을 편성한 후 강원도의 일부 의병병력과 합류하여 단양군수·청평군수를 처단하고 충주부를 점거했다. 이때 유인석은 영월에서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보내 의병봉기를 호소했다. 경상도 진주에서는 안의출신의 유생 노응규가 1896년 1월 7일 기의하여 19일 진주성을 점령한 후, 부산진격중 일본군에 패전했다.
산청에서는 곽종석 등 200여 명의 유생들이 의병진을 편성한 후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기의하여 대구로 진격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했다. 전라도에서는 나주의 기우만 등이 광주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을 편성하여 위세를 떨쳤다.
을미의병의 격문들에 나타난 당면 목표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친일내각을 퇴진시킨 다음 일본군을 축출하는 것이었으나, 대개 군수의 굴복을 받거나 추방하고 단발령을 차단한 뒤, 동헌(東軒)이나 향교에 머물렀다가 해산했으며, 단발령을 강행하려던 춘천·충주·안동·강릉·예천·영덕·청풍·단양에서는 관찰사·군수·경무관 등 현직관리를 처단했다.
지역적으로 보면 갑오농민전쟁이 격렬했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 전투의병이 없었고 의진의 형성자체가 미미했는데, 이는 갑오농민전쟁으로 민력이 쇠진했거나, 유생과 농민의 대립이 극단적이어서 의진 형성을 위한 양자의 제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체적으로 을미의병은 1896년 여름 거의 해산했는데, 이는 농번기를 맞아 전투조직을 유지시켜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의 선유(宣諭)에 저항할 논리도 궁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의 지도부는 해산 뒤에 정미의병으로 재기하거나, 의병활동을 중단하고 은거, 계몽주의자로 전향, 관도에 천거되는 경우 등 각기의 학통과 의병경험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다.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250-2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가 옆 비각 안에는 유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있다. 말이 좀 어려운데 쉽게 설명하자면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동네를 표시하는 비석’ 정도가 되겠다. 비가 서있는 이 자리는 어렸을 적 그녀의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한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明成皇后誕降舊里’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음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飮敬書, 광무 8년 갑진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 새겨놓았다.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04년에 세운 것이며,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많이 퇴색되고 낡아서, 1970년도에 새로이 보수하였다.
비각 우측에는 아주 규모가 크고 역동적인 신도비가 서 있다. 숙종 대 인물인 민유중(1630~1687)의 신도비인데, 쪽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묘와 함께 여주시 향토유적 제5호이다. 민유중은 숙종대의 척신(戚臣)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 1595~1659)의 아들이며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동생이자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생부이다.
[문화재방송 캠페인]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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