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노을05 운영자 15.07.21 10:36
우리나라 建國 大統領 李 承晩 , 이렇게 待接해도 되겠는가 ?
7월 19일은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이자
6.25남침에도 우리나라를 지켜내시었던 우남 이승만 박사의
50주년 기일입니다.
아직도 반공주의자였던 그 분을 미워하는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은
그의 공로는 다 감추고 그의 실정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인
건국 대통령을 이렇게 대접해도 괜찮은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주영 저 '이승만 평전'
우리나라가 대륙문화권에서 해양문화권으로 옮겨가는 긴 문화의 전환기인
1875년에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난 이승만, 살 때 서울로 이사하여 성장.
양녕대군의 5남 장평부정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집안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일찌기 한문을 공부한 그는 부모님의
소망대로 어려서 부터 여러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그 당시 부패한 사회라
권세 있는 집 아들이 아니면 과거에 붙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낙방을 한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고 기독교 선교사들과
함께 하면서 영어를 배워 졸업식 때 대표롤 영어로 연설을 하여 칭찬을 받았다.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속하여, 5년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이 때에 기독교에 입문.왕정폐지를 주장하였으므로 고종이 만나 설득을 하려
만나자고 하였으나 그가 거부하였다.
1904년 하와이로 떠나 기독교학교와 단체 운영. 워싱턴으로 가서 조지워싱턴
대학과 하바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 때에 하와이 교민들의 지원을 받았다.
3.1운동 뒤에 여러 개의 임시정부의 요직에 추대되었다.
한성임시정부에서 대한공화국 대통령이 되고,
그후 중국상하이 통합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요인들 중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
많아 반공주의자인 대통령과 마찰이 잦았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활발한 외교로 독립운동에 매진.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이 되었어도 미군정의 반대로 귀국이 늦어졌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들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파업을 하고 우익 인사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이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북한에선 이미 소련군이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주의 정부를 만들었으므로, 남북 단일 정부 수립 운동은
무위로 돌아갔다.
유엔에서 남한만이라도 민주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그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절대 다수로 초대대통령에 당선.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 4 3 사건도 선거방해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김대중, 노무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처럼 만들어 국가기념일로
정하여 문제가 있다.
.농지개혁을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노력하고 있는데,
북에서는 군비확충을 하여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하려고 일으킨 전쟁이 6.25 전쟁이다.
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미군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참전하여 대전에서 방어히려 하였으니역부족으로, 결국 그해 8월 1일 낙동강까지 밀렸다.
유엔군과 국군의 맹공격으로 북한군이 고전 중,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실행하여 공산군이 38선 북쪽으로 퇴각.
미국 정부의 반대에도 이 대통령의 강력한 북진통일 주장이 맥아더에게 먹혀들어,
계속 북진 1050년 12월 4일 평양을 함락하고,
혜산진과 초산 등 압록강까지 진격, 통일이 눈앞에 있었으나
중공군의 개입과 인해전술로 다시 후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대전까지 빼았겼다.
그해 3월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말 38선까지 이르렀을 때
미국과 소련이 휴전합의를 하다.
이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도 1953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휴전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무기 공급을
내세워 미국이 이를 수락한 때문에 군사적인 열세에도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되고
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전후 복구에도 미국의 후원을 많이 받는 일에도 이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1954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에 이 대통령의 나이 80 고령이있으므로, 야당후보가
부통령이 되면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것을 염려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하여(나도 부정선거운동에 동원되었으나 협조하지 않았고 그날 기권하였다).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선출. 이에 격분한 국민들이 마산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고려대학교 학생들과 대학교수들의
시위에까지 확산.경무대(청와대)앞에서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4.19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다).
이런 과정을 자세히 알게 된 이승만대통령은 결국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1960년 4월 27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1~2주간 지난 후에 구;국할 거라고 생각하고 가방 2개 달랑 들고
하와이로 갔지만, 그 후 정부에서 귀국을 허락하지
돌아오지 못하였다.
5.16 혁명 후 이대통령은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군사정부에서 반대, 크게 낙심한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후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긴 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90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동작동 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그의 곁에는 54세에 결혼하여 그를 보필하여 온
부인 프란치스카 여사와 양아들과 하와이 교민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이대통령은 장기간 집권으로,독재를 하고 3선개헌 헌법 개정, 언론탄압, 3.15부정 선거 등의 실책으로 국민들의 버림을 받았으나,
일제하여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에도 유엔의 지지를 받아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나라의 기반을 닦았고,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실시, 원자력 연구소 설치하였고,
6.25전쟁 위기에도 나라를 지키는데 전생애를 바쳤으나
먼 이국 하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독일의 아데나워대통령도 같은 시기 장기 집권을 하고 여러가지 부정적인 축면도 있었으니 오늘날
독일 국민들이 초대 대통령으로 존경을 하고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 중에 적지 않는 좌파 사상를 가진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버젓한 기념관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잊혀진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도 좌파 정치가들은 대통령의 묘소참배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대 정부의 대통령 기념관을 지으면서도 건국 초대 대통령을 홀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歷史人物函'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泳三 小考 (0) | 2015.12.03 |
---|---|
[毛允淑.任永信] 숨겨진 두 女人의 功勞 (0) | 2015.11.25 |
일본천황의 고백’ - 나는 한국인의 후손이다 (0) | 2015.07.19 |
孝宗-鳳林大君 이야기 (0) | 2015.07.08 |
阿部信行,岸 信介, 安倍晉三 [安倍總理의 祖父들] (0) | 201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