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한국전쟁) 4대 영웅 (맥아더 장군,리지웨이 장군,백선엽 장군,김동석 대령) 자유글
2015.09.17. 23:00
http://blog.naver.com/jpk0107/220484625355
‘전쟁영웅‘ 김동석(82) 예비역 대령은 철저하게 비밀을 요구하는
오히려 회고록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김씨는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이 고향이다.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당시 김일성이 남긴 담배 꽁초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2년 뒤인 54년 2월에는 적진인 강원도 통천에 침투,
그는 회고록에서
정일권을 헤이룽장성 부근에서 탈출시켜주었다"고도 주장했죠.
그는 육사 8기로 임관한 후 6.25 전쟁 중 육군첩보부대(HID)
목포 시장, 함경북도지사, 대한유도회 부회장 등을 지냈죠.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씨가 딸이랍니다.
사진은 특수임무수행자모임의 반대규 고문이 촬영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영정을 모시고있다
영정과 가족들
슬픔에 젖은 아들과 가족들
젊은 특수임무수행자들의 마지막 인사!
오열하는 딸 진미령
가족들과 도열해 있는 특수임무수행자들
원로 국가 유공자들
아들와 스님
분향
분향
전쟁 영웅의 아들과 딸
장례삭장의 가족 친지
보수들의 집회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반대규!
출생일시 | 1920. 11. 23, 평남 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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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한국 |
요약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휴전회담에 한국측 대표로 참여하여 휴전문서에 조인했다.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등을 역임하고 대장으로 예편한 후 중국, 프랑스, 캐나다 등의 대사로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다. 1950년 제1군단장,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예편과 동시에 주중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 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 5개국 주재대사를 겸임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한 후 여러 국가투자기관 및 기업체의 간부직을 역임했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다.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1950년 제1군단장을 지냈고, 휴전회담시 한국측 대표로 나가 휴전문서에 조인하기도 했다.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후 1960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과 동시에 주중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토고·세네갈·카메룬·차드·모리타니 주재대사를 겸임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했고,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하다가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이 되었다. 그밖에 여러 국가투자기관 및 기업체의 간부직을 역임했다
만구국군 백선엽, Until 8.15
백선엽 (이하 평문처리) 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0세, 1939년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 만주국의 펑텐 군관학교에 들어가고, 1942년 제 9 기 졸업생으로서 견습 군관이 되었다. 이듬해 만주국군 소위가 되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에서 소위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간도특설대는 부대장은 일본인을 두었지만 중대장 다수와 소대장 이하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갑 혼성 부대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360명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들 간도특설대는 위에 서술했듯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108차례나 공격했으며, 그들 손에 학살당한 민간인만 해도 172명에 달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약탈, 강간, 고문을 당했다.
백선엽은 이 부대에서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 경력으로 말미암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군과 나>에서 자신이 이 부대에서 김찬규,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춘근, 박창완 등과 함께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를 따르면 "간도특설대의 임무는 팔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44년 이후 열하성에서 팔로군이 활발히 활동하자 그도 이곳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정보 수집으로 높은 공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열하성의 작전이 끝난 후 평양에 들러 결혼, 곧바로 귀대했으나 귀대 직후 일제가 패망하게 되어, 영월구에서 만주국군 중위로서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되었다.
* 국군 백선엽, Until 6.25
광복 후 그는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던 조만식을 찾아가 비서로 채용된다. 그래서 그는 조만식의 비서로서 잠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는데, 김일성을 반대해 194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월남하였다. 월남 후 그는 12월 4일 창설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 46년 2월 26일에 장교로 임관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 5 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 5 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며,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했다. 이 때 당시 그는 대령이었다. 또한 그는 육본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여순의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했다. 이 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당시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체포된 박정희 (당시 소령) 의 구명에 힘을 썼다.
백선엽이 국군 1 보병사단장이 되고 나서 얼마 뒤, 6.25 전쟁이 발발한다.
* 맹장 백선엽, During Korean War
1사단장 당시 백선엽.
6.25 전쟁 발발 당시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던 도중 그는 급히 귀대해서 1사단을 지휘했다. 하지만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 앞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후퇴하는 도중에도 사단 편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능력을 과시했다. 개전 초기 사단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그의 사단을 포함하여 셋이었으니, 나머지 둘은 춘천에서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6사단,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강릉의 8사단이 전부였다. 국군이 소위 "Tank Fear", 즉 전차로 인한 공황을 겪으며 대구로 후퇴할 당시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전차 공황의 주된 범인이었던 소련제 T34/85 전차. 경사장갑과 85mm 주포가 특징인, MBT(주력 전차)의 조상님.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백선엽의 1사단은 미군의 2개 연대와 연합해 경북 칠곡에서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전투 중 한국군의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다수 이탈하고 있다."고 다급한 무전을 띄웠고, 백선엽이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백선엽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알려져 있다.
<다부동 전투(위키 백과):http://ko.wikipedia.org/wiki/%EB%8B%A4%EB%B6%80%EB%8F%99_%EC%A0%84%ED%88%AC> → 한줄 요약: 지면 X될 게 뻔했던 전투.
그 후 그는 미 1 기병사단, 미 24 보병사단과 함께 평양에 누가 먼저 입성하느냐를 두고 경쟁을 벌여 평양에 첫 번째로 입성한 부대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했던 1사단은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전선이 고착되자 그는 한국군 대표로 휴전협상에 나가기도 하였고, 협상 도중 강원도 일대의 동부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직접 군단장이 되어 강릉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해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하고, 이를 모태로 근대화된 군단인 2군단이 창설되게 된다. 이전에도 2군단은 있었으나 1950년 11월 중공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한 바 있다. 이듬해 그는 32세의 나이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에 대한 복지를 위해 힘썼으며, 군 근대화를 위해 미국 군사유학을 강화하였고, 10개 상비 사단 (11사단~20사단)과 10개 예비 사단 창설을 추진했다.
* 장군 백선엽, After 6.25
1954년 2월에 동양 최초로 제 1 야전군을 창설, 155마일 (약 250km) 에 달하는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 8 군으로부터 위임받았다. 그 후 43개월 동안 그는 초대 1군 사령관으로서 야전군의 기틀을 다지고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기여를 했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군인들의 청구운동에 의해 1960년 백선엽은 퇴역, 예편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의 교통부 장관으로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친동생 백인엽은 선인 재단을 설립하여 인천 대학교 등을 비롯한 사립학교를 운영하였으나, 내부 비리로 재단의 모든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이에 관해 백선엽은 여러 오해를 사기도 했다.
2009년 군에서 2010년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에게 원수 계급을 주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군 부분에 등록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반대를 받고 있다. 현재 생존중이며, 중앙일보사에서 백선엽 장군 회고록인 군과 나(2009),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2010)를 출판했다.
현재 한국전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 - 다고 들었 - 다.
* 백선엽, 그에 대한 평가는?
몇 가지 일화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평가를 받는 군인인지 설명이 될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이임식, 취임식 때는 으레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인삿말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 또한 미군 장성진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캡스톤 그룹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필수 코스가 바로 "백선엽 장군 만나고 오기."이다. 또한 주한 미 8 군에서 카투사를 대상으로 백선엽 장군 보드(General Paik Board)를 주관해,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제 의견입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매국노. 그의 경력을 보면 광복 전과 광복 후가 꽤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광복 전의 백선엽은 일제에 충실했던 교원이었고 군인이었습니다. 중국인 다수가 포함된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심심찮은 전공을 올렸고, 그가 속한 부대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하고 체포했던 부대였지요. 아무리 만주군이 일제에게서 그리 중요치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주군이었다는 경력은 과연 그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합니다.
그렇지만 광복 후의 백선엽, 특히 군에 들어가고 난 후의 백선엽은 매우 헌신적으로 군에 공헌했고,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자질이나 능력을 입증하지요. 만약 백선엽이 6.25 전쟁이나 그 이후, 긴장된 공기가 감돌던 시절에 없었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이 과연 존속할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인터넷에서의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누구는 매국노라고 말하고, 누구는 희대의 명장이라고 말합니다. 박정희의 경우 그 공로가 정말로 공로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를 두고 견해차이가 있어서 평가가 그나마 쉬워진 반면, 백선엽 장군은 공로가 매우 뚜렷하고 공헌한 바가 정말로 크기 때문에, 박정희보다도 평가가 어려운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뭐…. 아직 생존해 계신 분을 평가하는 것도 그렇지만요.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면 시간과 역사가 진정한 평가를 내려주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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