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6.25 전쟁(한국전쟁) 4대 영웅

bsk5865 2016. 6. 26. 06:54

6.25 전쟁(한국전쟁) 4대 영웅 (맥아더 장군,리지웨이 장군,백선엽 장군,김동석 대령) 자유글

2015.09.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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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 한국전쟁 4대 전쟁영웅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선정한 4명입니다.)

 

이분들 중에서 몇명이나 아십니까? 보통은 1명 정도 아실듯하고
많이 아시는 분은 2~3명 아시려나요?

하지만 이분들 중에서 한분이라도 안계셨다면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점령 당했을지 모릅니다.
한분씩 간단하게 소개 드리자면..


1.맥아더 장군



솔직히 한국인이 맥아더 장군을 모른다면 정말 부끄러운일 아닐까요?
아니면..간첩..<퍽!(간첩도 알고 있을겁니다..)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서 남한을 거의 점령한 북한군에게 제대로 반격했죠.
(사실 이 작전 자체가 매우 무모했다고 하는데 제대로 성공한거 보면 정말 운도 좋았네요..)


2.리지웨이 장군



이분은 일반인 중에선 아는분이 희박할꺼 같습니다만
중공군 반격의 1등 공신이라고 할만 합니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다시 남한군과 미군,유엔군이 후퇴할 때 재반격해서
남한 국토를 수복하는데 앞장 서셨던 분입니다.


3.백선엽 장군



이 분은 은근히 인지도 있으신 분입니다.
바로 '백선엽 장군'님이시죠.한국인 중에선 6.25 전쟁에서 가장 공이 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승전을 하셔서 경상도랑 부산 일대 수비하는데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이때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잘 먹어야 잘 싸운다' 같은 명언들을 남기셨습니다.

하지만 친일 의혹이 있어서 논란이 많은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랑 비슷한 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4.김동석 대령



마찬가지로 한국인이신 분인데 인지도가 낮으셔서 안타깝습니다.
6.25 전쟁에서 첩보 역할을 잘 맡으셨고 공헌도 역시 대단하십니다.

(가수 진미령씨의 아버지이기도 하십니다.)


이 밖에도 6.25 전쟁 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받쳐 싸우신 분들이 많으십니다.
우리가 그 분들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이 네분 만큼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이 분들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 김씨 정권 밑에서 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http://blog.naver.com/choyh07/50057902532
북파공작원 대부 김동석은 누구인가?
 
‘전쟁영웅‘ 김동석(82) 예비역 대령은 철저하게 비밀을 요구하는
 첩보부대 특성상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오히려 회고록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될 정도로 지금까지 김씨는 한국전쟁과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 왔다.
 
김씨에 대한 평가는 미국 정부가 정전협정(1953.7.27)
체결 50주년을 앞두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한국전쟁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김씨를 맥아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대장과 함께 김씨 한국전쟁 4대영웅으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주둔 중인 미 제2보병사단은 2002년 5월7일
경기도 의정부시 소재 캠프 레드 클라우드 내 사단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을 만들고 김씨에게 ‘전쟁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육사 8기 출신인 김씨는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여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켜
부대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김씨는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입문해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에서 결정적 첩보를 수집하는 전과를 올렸다.
 
 김씨는 최초로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105전차사단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포로로 잡히자 끈질긴 설득작업을 벌인 끝에
평양 입성작전에 필요한 결정적인 정보를 수집해내기도 했다.
 
그는 육군첩보부대 1사단 지구대장을 거쳐
1952년부터 1961년 5.16쿠데다가 발생할 때까지
동해안 첩보업무를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었다.
 
그는 1954년 2월 강원도 통천 부근 원산 만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 납치했고
휴전 이후에도 동해안 일대에서 북파공작업무를 진두지휘했다.

김씨는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이 고향이다.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백범 김구선생 경호원 등을역임했고,
대한유도회 부회장(유도8단) 과
한미친선골프회 회장등을 지냈다.
 
김동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을 4분 차이로 놓쳤다고다.

"1952년 8월 북한군 17사단장 이.취임식 참석차 원산에 들른
김일성을 잡기 위해 현장에 투입됐는데 예상보다 이른 새벽에
평양으로 떠나는 바람에 놓쳤다"고 말했다.

당시 김일성이 남긴 담배 꽁초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2년 뒤인 54년 2월에는 적진인 강원도 통천에 침투,
 북한군 사단장 이영희를 설득해 귀순토록했다고 주장했죠.
 
김씨는 이같은 자신의 북파공작 활동을 담은
 'This man, 전쟁 영웅  김동석'이란 회고록을 최근 펴냈답니다. 
 
'This man'은
 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라네요. 
 
그는 50년 7월 강화도를 경유, 인천으로 잠입한 뒤 서울 지역에 주둔 중이던
북한군의 위치와 현황 등 상세한 첩보를 유엔군사령부에 보냈죠.
 
 맥아더 장군은 김씨의 첩보를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This man'이 보낸 것이면 오케이"라며
인천상륙 작전에 들어갔다 고 합니다. 
 
그때부터 김씨는 남북한 공작원들 사이에서
'This man'으로 불려 왔다는군요. 
 
김씨가 서울에서 국군에게 체포된 북한군 105전차사단
제1대대장 김영 소좌를 설득해
얻은 정보는국군의 평양 입성에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고 합니다. 
 
미국은 김씨의 공로를 인정해 2002년 5월 경기도 의정부
미 2사단 내의 전쟁박물관에 '김동식 전쟁영웅실'을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김씨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맡았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해방 직후 소련군에 체포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호송 중이던 박정희와
정일권을 헤이룽장성 부근에서 탈출시켜주었다"고도 주장했죠.

그는 육사 8기로 임관한 후
6.25 전쟁 중 육군첩보부대(HID)
창설 요원으로'공작원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일제 때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부친을 따라다니며 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 등을 익혔던 것이
첩보부대 창설에 관여하게 된 이유가 됐다고 했다는군요.
 
아직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김씨는 대령으로 예편한 뒤
강원도 삼척 군수와 강릉 시장,
목포 시장, 함경북도지사, 대한유도회 부회장 등을 지냈죠.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씨가 딸이랍니다.
<모셔온 글> 
 

★★★ ★★★★★★★★★  ★★★ ★★★★★★ 
  
※표시가없어 글쓴분을 알수는 없지만
자서전을 바탕으로  김동석이란 분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되어 있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 4월경 국가에 미친 영향에 비해 너무 조용히
돌아가신 전쟁영웅에 대한
사진과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국가적으로 엉뚱하게 큰 일들이 벌어져
잠시 기다리던 중입니다.
 
실례일지 모르지만 충분한 설명이 있는 이글 말미에 
한국전 영웅이 가시는 마지막 진을 첨부해 봅니다.
 
 -김사룡-
 

 

사진은 특수임무수행자모임의 반대규 고문이 촬영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영정을 모시고있다

 영정과 가족들

 슬픔에 젖은 아들과 가족들

 젊은 특수임무수행자들의 마지막 인사! 

 오열하는 딸 진미령

가족들과 도열해 있는 특수임무수행자들 

원로 국가 유공자들 

아들와 스님 

 분향

 분향

 전쟁 영웅의 아들과 딸

 장례삭장의 가족 친지 

 

보수들의 집회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반대규! 

 


白善燁 將軍.........위키백과사전
출생일시1920. 11. 23, 평남 강서
국적 한국

요약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휴전회담에 한국측 대표로 참여하여 휴전문서에 조인했다.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등을 역임하고 대장으로 예편한 후 중국, 프랑스, 캐나다 등의 대사로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다. 1950년 제1군단장,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예편과 동시에 주중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 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 5개국 주재대사를 겸임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한 후 여러 국가투자기관 및 기업체의 간부직을 역임했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다.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1950년 제1군단장을 지냈고, 휴전회담시 한국측 대표로 나가 휴전문서에 조인하기도 했다.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후 1960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과 동시에 주중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토고·세네갈·카메룬·차드·모리타니 주재대사를 겸임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했고,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하다가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이 되었다. 그밖에 여러 국가투자기관 및 기업체의 간부직을 역임했다




2016.03.15. 20:26

만구국군 백선엽, Until 8.15

 

백선엽 (이하 평문처리) 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0세, 1939년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 만주국의 펑텐 군관학교에 들어가고, 1942년 제 9 기 졸업생으로서 견습 군관이 되었다. 이듬해 만주국군 소위가 되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에서 소위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간도특설대는 부대장은 일본인을 두었지만 중대장 다수와 소대장 이하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갑 혼성 부대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360명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들 간도특설대는 위에 서술했듯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108차례나 공격했으며, 그들 손에 학살당한 민간인만 해도 172명에 달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약탈, 강간, 고문을 당했다.

 

백선엽은 이 부대에서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 경력으로 말미암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군과 나>에서 자신이 이 부대에서 김찬규,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춘근, 박창완 등과 함께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를 따르면 "간도특설대의 임무는 팔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44년 이후 열하성에서 팔로군이 활발히 활동하자 그도 이곳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정보 수집으로 높은 공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열하성의 작전이 끝난 후 평양에 들러 결혼, 곧바로 귀대했으나 귀대 직후 일제가 패망하게 되어, 영월구에서 만주국군 중위로서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되었다.

 

 

* 국군 백선엽, Until 6.25

 

광복 후 그는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던 조만식을 찾아가 비서로 채용된다. 그래서 그는 조만식의 비서로서 잠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는데, 김일성을 반대해 194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월남하였다. 월남 후 그는 12월 4일 창설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 46년 2월 26일에 장교로 임관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 5 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 5 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며,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했다. 이 때 당시 그는 대령이었다. 또한 그는 육본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여순의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했다. 이 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당시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체포된 박정희 (당시 소령) 의 구명에 힘을 썼다.

 

백선엽이 국군 1 보병사단장이 되고 나서 얼마 뒤, 6.25 전쟁이 발발한다.

 

 

* 맹장 백선엽, During Korean War

 

1사단장 당시 백선엽.

 

6.25 전쟁 발발 당시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던 도중 그는 급히 귀대해서 1사단을 지휘했다. 하지만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 앞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후퇴하는 도중에도 사단 편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능력을 과시했다. 개전 초기 사단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그의 사단을 포함하여 셋이었으니, 나머지 둘은 춘천에서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6사단,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강릉의 8사단이 전부였다.

국군이 소위 "Tank Fear", 즉 전차로 인한 공황을 겪으며 대구로 후퇴할 당시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전차 공황의 주된 범인이었던 소련제 T34/85 전차. 경사장갑과 85mm 주포가 특징인, MBT(주력 전차)의 조상님.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백선엽의 1사단은 미군의 2개 연대와 연합해 경북 칠곡에서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전투 중 한국군의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다수 이탈하고 있다."고 다급한 무전을 띄웠고, 백선엽이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백선엽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알려져 있다.

 

<다부동 전투(위키 백과):http://ko.wikipedia.org/wiki/%EB%8B%A4%EB%B6%80%EB%8F%99_%EC%A0%84%ED%88%AC> → 한줄 요약: 지면 X될 게 뻔했던 전투.

 

그 후 그는 미 1 기병사단, 미 24 보병사단과 함께 평양에 누가 먼저 입성하느냐를 두고 경쟁을 벌여 평양에 첫 번째로 입성한 부대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했던 1사단은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전선이 고착되자 그는 한국군 대표로 휴전협상에 나가기도 하였고, 협상 도중 강원도 일대의 동부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직접 군단장이 되어 강릉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해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하고, 이를 모태로 근대화된 군단인 2군단이 창설되게 된다. 이전에도 2군단은 있었으나 1950년 11월 중공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한 바 있다. 이듬해 그는 32세의 나이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에 대한 복지를 위해 힘썼으며, 군 근대화를 위해 미국 군사유학을 강화하였고, 10개 상비 사단 (11사단~20사단)과 10개 예비 사단 창설을 추진했다.

 

 

* 장군 백선엽, After 6.25

 

1954년 2월에 동양 최초로 제 1 야전군을 창설, 155마일 (약 250km) 에 달하는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 8 군으로부터 위임받았다. 그 후 43개월 동안 그는 초대 1군 사령관으로서 야전군의 기틀을 다지고 1957년 다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기여를 했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군인들의 청구운동에 의해 1960년 백선엽은 퇴역, 예편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의 교통부 장관으로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친동생 백인엽은 선인 재단을 설립하여 인천 대학교 등을 비롯한 사립학교를 운영하였으나, 내부 비리로 재단의 모든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이에 관해 백선엽은 여러 오해를 사기도 했다.

 

2009년 군에서 2010년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에게 원수 계급을 주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군 부분에 등록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반대를 받고 있다. 현재 생존중이며, 중앙일보사에서 백선엽 장군 회고록인 군과 나(2009),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2010)를 출판했다.

 

현재 한국전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 - 다고 들었 - 다.

 

 

* 백선엽, 그에 대한 평가는?

 

 

몇 가지 일화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평가를 받는 군인인지 설명이 될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이임식, 취임식 때는 으레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인삿말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 또한 미군 장성진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캡스톤 그룹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필수 코스가 바로 "백선엽 장군 만나고 오기."이다. 또한 주한 미 8 군에서 카투사를 대상으로 백선엽 장군 보드(General Paik Board)를 주관해,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제 의견입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매국노. 그의 경력을 보면 광복 전과 광복 후가 꽤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광복 전의 백선엽은 일제에 충실했던 교원이었고 군인이었습니다. 중국인 다수가 포함된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심심찮은 전공을 올렸고, 그가 속한 부대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하고 체포했던 부대였지요. 아무리 만주군이 일제에게서 그리 중요치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주군이었다는 경력은 과연 그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합니다.

 

그렇지만 광복 후의 백선엽, 특히 군에 들어가고 난 후의 백선엽은 매우 헌신적으로 군에 공헌했고,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자질이나 능력을 입증하지요. 만약 백선엽이 6.25 전쟁이나 그 이후, 긴장된 공기가 감돌던 시절에 없었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이 과연 존속할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인터넷에서의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누구는 매국노라고 말하고, 누구는 희대의 명장이라고 말합니다. 박정희의 경우 그 공로가 정말로 공로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를 두고 견해차이가 있어서 평가가 그나마 쉬워진 반면, 백선엽 장군은 공로가 매우 뚜렷하고 공헌한 바가 정말로 크기 때문에, 박정희보다도 평가가 어려운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뭐…. 아직 생존해 계신 분을 평가하는 것도 그렇지만요.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면 시간과 역사가 진정한 평가를 내려주겠지요.

http://cafe.daum.net/yang4672/UQJT/166?q=%B9%E9%BC%B1%BF%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