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진인해운유한공사
'중국의 광활한 동북지역은 고구려 땅이었다.'
우리가 흔히 중국과의 영토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나라는 '고구려'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닌, 고구려가 받들어 계승한 나라 '고조선'의 영토에 관심을 가져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진시황제가 방문하여 극찬을 했다는 하북성의 최대 관광지인 "진황도가 우리 땅"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황도가 가진 이 역사적인 비밀은 무엇일까? 월간중앙 <역사탐험2003.10월호>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여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경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는 동일 문화권 고구려, 부여, 三韓은 고조선 계승국가 윤내현 단국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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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夢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兆)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고, '통전'(通傳)에는 갈석산은 노룡현(老龍縣)에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만리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唐)시대의 노룡현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에서는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었으며(또는 끝났으며) 그 지역이 요동이었다고 했는데 '태강지리지'에서는 만리장성이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점이다.
수성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하나였다.
낙랑군은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영토였고 그 이전에는 고조선 영토였다. 그러므로 위 기록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원래 고조선 영토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석산이 국경선상에 있었음을 말한다. 낙랑군 수성현은 원래 고조선 영토가운데 맨 서쪽 국경지대에 있었으며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위치하여 그 동쪽은 고조선이었고 그 서쪽은 중국이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문헌상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토를 보면서 진황도가 고조선의 일부인 우리 영토였던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이를 고고학적 시각에서 접근해 보도록 한다
앞서 확인했던 문헌상의 고조선 영토에서, 각종 대표적 유물의 발굴지역을 살펴봄으로서 다시한번 진황도가 초기 고조선의 활동무대의 일부였음을 확인해 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세종대 역사학과 하문식 교수의 글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고인돌은 축조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고인돌 축조는 당시 사회의 어떤 일보다 중요한 대역사(大役事)였다. 그러므로 건축·역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 당시 사회의 구조와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축조는 고인돌의 크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공동체 나름의 집단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의 영역인 요동과 서북한 지역의 고인돌에서 찾아지는 독특한 특징은 대형 고인돌의 분포와 장례 습속이다. 이 지역의 고인돌 분포를 자세히 보면 일정한 범위에 걸쳐 대형 탁자식 고인돌이 자리한다.
대표적으로 요동반도의 개주 석붕산(盖州 石棚山)·보란점 석붕구(普蘭店 石棚구)·장하 대황지(庄河 大荒地)·해성 석목성(海城 析木城) 고인돌과 서북한의 안악 노암리·은율 관산리·여난 오덕리·배천 용동리 고인돌이 황해를 중심으로 둥글게 호를 이루면서 분포해 '환황해(環黃海)고인돌문화권'의 설정도 가능하다 최근 북한 학자들은 규모가 큰 고인돌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소국(小國)의 지배자와 관련시키고 있다.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에서 널리 이용된 장례습속은 발굴 조사 결과 화장(火葬)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화장된 사람 뼈가 찾아진 고인돌은 40여곳이나 된다. 특이한 장제(葬制)의 하나인 화장은 고조선의 문화전통을 잘 보여주는데, 이것은 후대의 강상묘(崗上墓)나 누상묘(樓上墓)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다른 문화 요소보다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장례습속인 화장이 이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고조선의 문화 범위와 영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를 검토했다. 그 결과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 지역에서 요동을 거쳐 평양에서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중심지가 주변의 상황과 변화에 따라 옮겨졌다는 이동설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고조선 중심지의 이동설을 일부 연구자들은 절충설이라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자료가 빈약한 고대사의 이해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 적극적 노력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 조사와 그 연구 결과를 있는 그대로 투시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객관적 안목을 가져야할 것이다.
中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遼寧)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吉林)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史)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黑龍江)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內蒙古)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金淸)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大脈)·근맥(根脈)”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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