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養常識函

[스크랩] 동북3성과 하북성은 고조선의 고토

bsk5865 2016. 8. 30. 19:18

출처 : 진인해운유한공사

 

 

'중국의 광활한 동북지역은 고구려 땅이었다.'
우리가 흔히 중국과의 영토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나라는 '고구려'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닌, 고구려가 받들어 계승한 나라 '고조선'의 영토에 관심을 가져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진시황제가 방문하여 극찬을 했다는 하북성의 최대 관광지인 "진황도가 우리 땅"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황도가 가진 이 역사적인 비밀은 무엇일까? 월간중앙 <역사탐험2003.10월호>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여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경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는 동일 문화권
고구려, 부여, 三韓은 고조선 계승국가


윤내현 단국대 대학원장


 

고조선(단군조선)은 우리역사상 첫번째 국가이면서 단일국가로는 가장 넒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쪽은 지금의 북경(北京)근처에 있는 난하(欒河), 북쪽은 중국과 몽골의 국경인 얼구나하(客爾古納河), 동북쪽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흑룡강(黑龍江), 남쪽은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을 국경으로 한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에는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당경을 거쳐 다시 아사달로 네번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이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면 그 영토는 상당히 넓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13세기 중국 사학자 증선지(曾先之)가 그린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의 지도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만주를 포괄하고 있으며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인 만리장성은 발해의 서북쪽에서 끝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제국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한 곳은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기 전 221년(진시황 26)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고조선의 서쪽 국경이 요동에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시기는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으로, 고조선(단군조선)시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요동의 의치인데, 고대의 요동과 지금의 요동은 그 위치가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고조선과 진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어디일까.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은 갈석산(碣石山)지역이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효무본기(孝武本紀)등에 등장하는 갈석산의 위치는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잇는 지금의 갈석산과 일치한다.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夢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兆)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고, '통전'(通傳)에는 갈석산은 노룡현(老龍縣)에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만리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唐)시대의 노룡현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에서는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었으며(또는 끝났으며) 그 지역이 요동이었다고 했는데 '태강지리지'에서는 만리장성이 낙랑군의 수성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점이다.

수성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하나였다.

낙랑군은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영토였고 그 이전에는 고조선 영토였다. 그러므로 위 기록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갈석산이 원래 고조선 영토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갈석산이 국경선상에 있었음을 말한다. 낙랑군 수성현은 원래 고조선 영토가운데 맨 서쪽 국경지대에 있었으며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위치하여 그 동쪽은 고조선이었고 그 서쪽은 중국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요동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요동이란 원래 동쪽의 먼 곳이라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동쪽의 국경지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이동하였다. 오늘날 요동이 고대의 요동보다 동쪽에 있는 것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어 중구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증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기 전 3세기 진시대의 상황이다. 그런데 진시대보다 앞선 시기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이보다 동쪽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쪽에 있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염철론'(鹽鐵論)에는 연(燕)나라는 갈석산을 요새로 하여 사곡에 의해 끊기고 요수로 둘러싸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인데 당시 연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 제국보다 앞선 전국시대에도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갈석산과 지금의 난하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은전(殷傳)과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서기 전 1100년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조선이 서기 전 1100년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인데 '한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는 후대의 낙랑군 조선현이 바로 옛날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현은 수성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기자가 망명해 살았던 곳은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전 1100년께도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었으며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서한은 초기에 고조선과의 국경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옛 국경 초소를 수리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서한은 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므로 이 기록은 진·한시대 이전에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난하 유역보다 서쪽에 위치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대체로 난하와 갈석산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때로는 그보다 훨씬 서쪽에 있기도 했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예(濊)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고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인 것이다. 당시 예는 지금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지역을, 옥저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 고구려는 평안북도와 중국의 길림(吉林)성 남부 및 요녕(遼寧)성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記) 한사군급열국기(漢四郡及列國紀)에는 한(삼한)과 부여를 포함한 비류·시라(신라)고구려·남옥저·북옥저·예·맥 등 여러 나라는 고조선의 단군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하였다. 이 지역들이 고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동일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나라에 제천의식이 있응ㄹ 때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를 부여에서는 영고,고구려에서는 동맹,동예에서는 무천, 한에서는 5월제와 10월제라고 하였다. 부여는 언어와 법칙 등 여러 가지 일들이 고구려와 대부분 동일하였고 고구려 사람들은 부여의 별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상으로 문헌상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토를 보면서 진황도가 고조선의 일부인 우리 영토였던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이를 고고학적 시각에서 접근해 보도록 한다

 

 

 

앞서 확인했던 문헌상의 고조선 영토에서, 각종 대표적 유물의 발굴지역을 살펴봄으로서 다시한번 진황도가 초기 고조선의 활동무대의 일부였음을 확인해 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세종대 역사학과 하문식 교수의 글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상략) 고조선의 강역 문제를 언급할 때 고문헌과 중국 동북지역(주로 요령성)이나 북한의 발굴 자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고문헌의 영역과 고고학 자료에 보이는 문화상의 영역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 결과 고조선의 강역이나 문화상을 이해하는 고고학적 자료는 주로 비파형동검·미송리형토기·고인돌 등이 대표적이고 비교적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검 몸의 모습이 마치 중국의 옛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중국 요령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기에 '요령식동검', 고조선과 관련있다고 하여 '고조선식 동검', 곡선의 날을 가져 '곡인청동단검' 등으로도 불린다. 생김새를 보면 검 몸의 아래 부분은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 형태와 비슷하고 가운데에는 돌기가 있으며, 이 돌기의 양쪽으로 날이 희어져 들어간 모습이다. 이 동검은 검의 몸과 자루를 따로 주조하여 결합했다. 이것은 같은 시기의 중국식 동검인 도씨검(桃氏劍)이나 북방계인 오르도스동검과 구별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푸른 원 안이 고조선문화권 유물들이 집중 출토된 요서지역이다.

 

 

 

 



비파형 단검
(평남 안주시에서 출토)


미송리형 단지
(평북 의주군 미송리에서 출토)
비파형 동검은 1930년대 중국 요동반도의 노철산 곽가둔(老鐵山 郭家屯)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주로 요서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찾아지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형식 변천이 있어 청동기를 통한 고조선 연구에 하나의 기준이 되는 표지유물(標紙遺物)이다.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요서 지역의 조양(朝陽)을 중심으로 찾아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조양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적, 영성 남산근(寧城 南山根) 유적이 초기 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지역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십이대영자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부채꼴 청동도끼·청동 손칼·청동끌·청동낚시바늘 등의 생산용 연모, 말재갈, Y자 모양과 十자모양의 청동꾸미개, Z모양 무늬가 연속적으로 있는 청동거울이 찾아졌다. 특히 청동거울은 요동 지역인 본계 양가촌(本溪 陽家村)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해 두지역의 문화 교류나 전파를 시사한다.

남산근 유적은 돌덧널무덤(石槨墓)이 대표적인데 많은 청동그릇과 무기·연모·거마구(車馬具)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찾아진 청동기는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남산근 유형'이라고 하며, 서쪽으로 난하유역에서도 그 문화의 자취가 찾아지고 있다. 또한 이 유형의 관련유적에서는 중원 청동기에서 볼 수 있는 예기(禮器)와 비슷한 청동 그릇과 청동꺽창, 북방 계통의 오르도스동검, 짐승을 장식한 청동기가 발견되어 주변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조양을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의 초기 비파형 동검 문화는 중원 지역이나 북방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 문화와는 뚜렷이 구별되며, 이 지역의 중심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북부 지역)와 관련 있는 이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곧 초기 고조선의 강역이나 중심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사와 관련되는 연모가 출토되는 요서지역의 초기 비파형동검문화는 북방 유목민의 문화가 될 수 없으며, 이 지역에서만 찾아지는 독특한 청동 유물로 볼 때 중원 청동기와도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요서 지역에서 형성된 이른 비파형동검문화를 이룩한 주체는 동이족(東夷族)이며, 그들은 초기 고조선이니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주민이었다.

왜 우리는 근대 역사학 연구가 시작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누구나 알 수 있는 초기 고조선의 강역 문제에 관하여 혼돈과 논란 속을 헤매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초기 고조선의 활동 무대인 요서 지역에서 형성된 이른 비파형동검문화를 중원 청동기문화나 북방 시베리아 청동기 문화의 변방 문화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고조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에서 상황 변화가 생기자 그 중심지를 요동 지역으로 이동했던 거서 같다. 이러한 변화의 자취를 보여주는 대표적 고고학 자료의 하나가 미송리형토기(美松里形土器)다.

이 토기는 압록강 하류 근처의 의주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처음 찾아져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토기의 모습은 밑바닥이 납작하고 몸통은 상당히 통통한 편이며 목 부분으로 올라가면서 넓어져 마치 표주박의 양쪽 끝을 자른 것처럼 생겼다. 몸통과 목 부분에는 여러 줄의 묶음식 줄무늬가 있고, 몸통에는 띠 모양이나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대칭으로 있는 독특한 형태의 토기다. 미송리형토기는 그 생김새와 특성 그리고 출토 유적에 따라 박수장경병(薄手長頸甁), 현문호(弦紋壺), 곡경호(曲頸壺), 쌍방-미송리도호(雙房-美松里陶壺), 평저표형장경호(平底瓢形長頸壺)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1960년대초 처음 찾아진 후 북한 학자들이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으로 이해하면서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로 인식돼 왔다. 그러다 1970,80년대 중국 동북 지역이 발굴 조사 결과 이 토기가 상당히 넓은 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자 중국 고고학자들도 새로운 관심을 자게 되었다. 현재 미송리형토기는 주로 요하 이동(以東)과 대동강 유역의 북쪽인 서북 지역에서 찾아지고 있다. 즉, 북쪽으로는 요령성 철령, 남쪽으로는 평안도 지역이다.

이처럼 미송리형토기는 앞에서 설명한 비파형동검과 달리 오셔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그 동쪽지역에서만 발견돼 그 문화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보면 요하와 혼하(渾河) 상류 지역인 청원(淸原)·무순(撫順)·법고(法庫)·태자하(太子河) 유역 그리고 한반도의 압록강~청천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으로 옮겨진 이후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 출토 범위를 통해 준왕(準王)과 관련된 고조선 영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송리형토기가 출토되는 요동이나 서북한의 일부 지역은 조양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고조선이 평양의 위만조선으로 자리잡기 이전의 고조선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고조선 사람들이 살다 묻힌 무덤의 하나인 고인돌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분포하는데 한반도를 기준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그 중심권을 이룰 만큼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요동지역과 대동강 유역의 서북한 지역은 분포 범위에 비하여 밀집 정도가 높다

 

 

 



고인돌은 축조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고인돌 축조는 당시 사회의 어떤 일보다 중요한 대역사(大役事)였다. 그러므로 건축·역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 당시 사회의 구조와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축조는 고인돌의 크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공동체 나름의 집단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의 영역인 요동과 서북한 지역의 고인돌에서 찾아지는 독특한 특징은 대형 고인돌의 분포와 장례 습속이다. 이 지역의 고인돌 분포를 자세히 보면 일정한 범위에 걸쳐 대형 탁자식 고인돌이 자리한다.

대표적으로 요동반도의 개주 석붕산(盖州 石棚山)·보란점 석붕구(普蘭店 石棚구)·장하 대황지(庄河 大荒地)·해성 석목성(海城 析木城) 고인돌과 서북한의 안악 노암리·은율 관산리·여난 오덕리·배천 용동리 고인돌이 황해를 중심으로 둥글게 호를 이루면서 분포해 '환황해(環黃海)고인돌문화권'의 설정도 가능하다 최근 북한 학자들은 규모가 큰 고인돌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소국(小國)의 지배자와 관련시키고 있다.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에서 널리 이용된 장례습속은 발굴 조사 결과 화장(火葬)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화장된 사람 뼈가 찾아진 고인돌은 40여곳이나 된다. 특이한 장제(葬制)의 하나인 화장은 고조선의 문화전통을 잘 보여주는데, 이것은 후대의 강상묘(崗上墓)나 누상묘(樓上墓)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다른 문화 요소보다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장례습속인 화장이 이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고조선의 문화 범위와 영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를 검토했다. 그 결과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 지역에서 요동을 거쳐 평양에서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중심지가 주변의 상황과 변화에 따라 옮겨졌다는 이동설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고조선 중심지의 이동설을 일부 연구자들은 절충설이라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자료가 빈약한 고대사의 이해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 적극적 노력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 조사와 그 연구 결과를 있는 그대로 투시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객관적 안목을 가져야할 것이다.

 

 

 

 

“백두산은 중국문화 중요 발원지”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25 02:56

 

 

중국정부 차원의 동북공정을 이어받아 랴오닝() 성의 ‘요하문명론’과 지린() 성의 ‘장백산문화론’이 한국사() 공략의 좌우 협공을 펼치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백산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장백산문화론의 비판적 검토’에서 이 같은 맥락의 분석을 제기했다.

장백산문화론은 중국이 백두산(장백산) 일대 개발을 추진 중인 ‘백두산공정’을 역사·문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다. 요하문명론은 동호-숙신-예맥을 아우르는 고대 문명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조 교수는 2000년 결성된 지린 성 장백산문화연구회가 주도하는 이 문화론이 백두산을 ‘중국문화의 중요한 발원지’로 규정해 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흡수하는 작업의 핵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장백산문화권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 등 동북3성을 넘어 네이멍구() 동부, 극동 러시아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다. 종족 구성도 후대에 등장한 여진족을 중심에 놓고 고대 한국사를 흡수하려는 책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문화권의 4대 종족으로 여진계 숙신, 한국계 예맥, 몽고·거란계 동호에 한족계인 화하를 덧붙이는 ‘물타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숙신-읍루-물길-여진-만주로 이어지는 여진계를 이 문화권의 토착 중심족으로 규정하고, 그 주요 정권은 부여-고구려-발해-대금-후금-청으로 못 박고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고대 한국계의 역사를 후대 금청()의 역사로 종속시킨 뒤 중화민족의 역사로 환치하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도 한반도계 백두산만 빼놓고 불함산(숙신·읍루)-개마대산(고구려)-도태산(남북조)-태백산(당대)-장백산(요·금 이후)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장백산이란 이름은 요 성종 통화 30년(1012년) 때 여진족 관련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반면 한국 사료에서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출원지를 백두산으로 명기한 데서 나온다.

 

조 교수는 특히 ‘삼국유사’의 신라 신문왕-성덕왕대(8세기) 기록 등 2곳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근맥()”이란 기록을 함께 제시해 백두산이란 우리 이름이 중국의 장백산보다 최소 300년 앞섰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읍루는 부여에 속했고, 여진과 만주의 전신인 말갈은 고구려-발해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동일운명 공동체였으며 후대의 여진-만주도 중국보다 고려-조선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고 반박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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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면에 있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육안으로 보인다’의 의미는?],

[“독립운동가의 손녀라고? 반골의 피는 어쩔 수 없군.”...], [모스크바서 고구려/독도 문제 관련 국제세미나 개최],

['임꺽정' 작가 홍명희가 월북한 까닭은?]를

 

/자주국방다물, 밀리터리/면에 있는 [‘대한민국 독도’의 재발견]을

 

/음모,테러/면에 있는 [쥐나의 백두산 공정], ['리앙쿠르암' 안되는 이유?…섬과 암석의 차이], [우리 땅 우리 魂 시리즈]를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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