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나라사랑
孫世一(언론인•11대, 14대, 15대 국회의원)
정치권력의 제도화가 덜 된 국가일수록, 그리고 그 국가가 처한 상황이 위기적일수록, 그 나라 정치지도자의 개성과 리더십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李承晩의 전기를 쓴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이 세속적이기도 하고 선비스럽기도 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이승만 자신은 스스로 선동가임을 자처했는데, 그러한 이승만이 한국현대사에 다양한 영향을 압도적으로 끼친 것은 당연했다.
이승만은 민족보다도 국가를 중요시한 정치지도자였다. 이승만이 독립협회의 젊은 지도자로 급부상한 것은 1897년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년도 채 안된 1898년3월10일 부터였다. 이날 독립협회주최의 만민공동회가 서울 종로에서 열렸는데, 스물네살의 이승만이 연사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 집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중집회였다. 이승만은 졸업식 행사에서도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영어연설을 하여 참석한 내외국인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매일신문」 발행은 새 한국의 실질적인 탄생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에도 배재학당에 나와서 협성회의 토론회를 이끌던 이승만은 주간으로 발행하던 「협성회 회보」를 1898년4월부터 일간지로 바꾸어 「매일신문」을 발행했는데, 이 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였다. 이때까지는 서재필의 「독립신문」도 주 3회 발행하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우리 회원이 일심 애국하는 지극한 충성의 간담을 합하여 이 신문상에 드러내노라”하고 자신들이 애국심을 강조했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매일신문」발행에 대하여 “이 작은 신문은 새 한국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 ―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인 경력의 진정한 시작이었다”라고 썼다. 이렇게 시작된 이승만의 정치인 경력은 일생을 통하여 말과 글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박영효(朴泳孝)의 쿠데타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1899년1월부터 무려 5년7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했다. 그는 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일반 사회에서라면 불가능했으리만큼 많은 양의 독서와 저술활동을 했다. 감옥에서 영어를 완벽하게 익힌 것도 뒷날 이승만의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옥중전도와 콜레라환자 치다꺼리 등을 통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의 신앙은 사회구원이었다. 개인구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충군애국이 무엇인지, 세상을 건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만 제 몸 하나와 제 영혼 하나 구원 얻는 것만 제일이라 할진대 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참 이치와 예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한다 이를지라”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신념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추구한 보편적 이념인 이른바 자본주의적 근대성 인식과 같은 맥락의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근대성’ 강조
이승만의 자본주의적 근대성인식은 이종일(李鍾一)의 부탁으로 옥중에서 쓴 「제국신문」 논설에 잘 드러나 있다. 이승만은 2년3개월 동안이나 「제국신문」 논설을 비밀리에 써내보냈는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필요성을 직접 강조한 논설도 여러 편 썼다. ‘재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과 같은 논설은 그러한 논설의 대표적인 보기였다.
“총명이 있고 학식 넉넉한 사람은 말하기를 점잖은 사람이 어찌 재물을 알리오 하며, 혹 자질(子姪)이나 친구 중에 재정에 유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짖어 가로되 선비가 재욕에 탐착(貪着)하니 그럴 도리가 어디있으리오 하며 재반 계책으로 기어이 그 사람들이 재물을 모르도록 인도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한갓 버린 사람을 만드니, 이런 오활(迂闊)한 일이 어느 학문에서 나왔는고. 자기만 빈한하고 버린 사람이 될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빈한하고 버린 사람이 되게 하야, 이러한 사람의 행위를 차차 본받는 사람이 많아 전국이 빈한하야 세상에 크게 해가 되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리오. 심지어 풍속에 이르는 말이 엽전 한냥 수효를 세지 못하여야 참 점잖은 재상이라 하니, 이렇게 돈 백푼을 세지 못하면 나라의 큰 경제하는 벼슬을 어떻게 하리요. 이런 사람들의 의논과 같을 진대 나라가 부강하기는 고사하고 전국 인민이 밥만 얻어먹기도 어려울지라.···”
러일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서둘러 『독립정신』을 저술하여 국가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한 것이 참 걱정”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글을 보고 깊이 깨닫는 뜻이 생길진대 사람마다 마음속에 내나라 독립권을 보존하는 것이 나의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겨, 아무 때나 아무 일에나 독립을 위하는 자리에는 죽기까지 나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한편으로 남에게 이 생각을 전하여 하루 이틀 일년 이년에 전국사람이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하여주는 것이 제일 긴급하며 제일 중대한 일이라.···”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그의 대표적 저술인데, 국내에서는 출판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1910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되었다.
“아이젠하워나 맥아더 급 군인을 한국군고문으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임박한 1948년3월20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한국의 파시스트니, 반동분자니, 극우분자니 하던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빨리 우리나라를 자유롭게 만드는지를 보고 놀랄 것이오. 토지개혁법이 첫 번째 법률이 될 것이고, 그 밖의 많은 자유화작업이 뒤를 이어 이루어질 것이오.···”
이처럼 이승만은 토지개혁사업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국가과제로 인식하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착수하여 뒷날 농민들로부터 “이 박사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는 칭송을 들었다.
건국과 관련하여 이승만이 얼마나 강렬한 의욕에 차 있었는가는 1948년4월5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나 맥아더 장군이나 웨드마이어 장군과 같이 외국에 알려진 육군장교 한 사람을 앞으로 창설될 한국군의 고문으로 초빙할 것과 보수를 많이 주더라도 6개월쯤 일해줄 수 있는 일급의 금융문제, 특히 외환관계 전문가 한 사람을 은밀히 물색해 보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이 편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육군 고위장교초빙문제 보다도 일급의 금융전문가를 물색해보라고 지시한 일이다. 그것은 이승만이 외환관리를 비롯한 경제문제도 직접 챙기겠다는 의욕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재임기간 내내 외환관리문제를 직접 챙겼다.
이승만은 대통령취임식날 오후부터 바로 집무를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이 조선은행의 백두진(白斗鎭)과 최순주(崔淳周), 식산은행의 장봉호(張鳳鎬) 세 사람을 불러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안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 만든 것이 2차세계대전의 원인”
이승만 정부의 통치이념의 기반은 항일정신과 반공주의였다. 제5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임문환(任文桓)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이승만의 일본과 공산주위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승만은 임문환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최초의 친일파 국무위원으로서 시험대에 올렸으니까 잘 하시오”하고 말 했다. 임문환과 함께 새로 임명된 내무부 장관 이순용(李淳鎔), 법무부 장관 조진만(趙鎭萬) 세 사람이 국회에 신임인사를 하러 갔다가 모두 거부당했다. 내무는 미국국적 보유자이고 법무는 일제 강점기의 판사, 임문환은 일본총독부 고등관 경력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신임인사를 거부당하고 돌아온 임문환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내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내건 적이 있었오. ···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문제는 옛날에 잊었소.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러시아는 공산당이기 때문에 언제고 민주주의에 져요. 그때까지 주의하고 있으면 돼. 일본은 달라요. 미국에 밀착해서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해갈 거요. 내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본 일본은 산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산비탈이 논이 되어 있습디다.··· 이처럼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 가지고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요. 언젠가는 상업이니 뭐니 하는 구실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올 거요.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아는 당신들 친일파가 나라를 지켜야 하오. 지금은 오로지 자중해서 시험대에 올려진 당신이 바람막이가 되는데 전념해야 해.”
임문환은 이승만의 이러한 설득에 크게 감동했다고 썼다.
이승만의 반일론 가운데 가장 독특한 주장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승만은 1941년에 출판한 영문저서 『일본내막기』에서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듦으로써 세계정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고 또 그것은 미국이 1882년에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규정된 ‘거중조정’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미국정부는 1882년의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이승만은 줄기차게 요구했다.
공산주의 비판논설 ‘공산당의 당 부당’
이승만이 임문환에게 러시아는 공산당이기 때문에 언제고 반드시 민주주의에 진다고 단언한 것도 주목된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했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자신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에 실린 ‘공산당의 당 부당’(1923.3) 이라는 짤막한 논설에 잘 표명되어있다. 이때는 상해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인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논설에서 먼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은 “인민의 평등주의” 주장이라며서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빈부격차에 의한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고는 공산주의의 부당한 점으로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2)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는 다섯 가지를 들고, 이 다섯 가지 주장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이승만의 주장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2)의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의 부당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는 공산당의 주장대로 자본가가 다 없어져서 “재정가[기업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묘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라고 하여 시장경제체제의 경쟁의 원리와 기술혁신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구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1989년 가을의 마지막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술혁신이 이토록 발달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5)의 주장에 관해서는 다음과같은 말로 반박했다,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한다는 러시아로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이라 더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여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며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내어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 지라.···”
이처럼 공산주의는 이승만이 추구하는 자유독립국가와는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였다.
“계약서에 에스칼레이션 클로스 들어있는가?”
대통령 이승만의 비전은 종교적이리만큼 숭고한 이상주의인 동시에 철저한 현실주의였다. 그것은 경제문제, 특히 달러문제에 대한 집념과 식견 때문이었다.
이러한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몇가지 실례를 살펴보자.
제3대 총무처 장관 한동석(韓東錫)은, 이승만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숫자에 밝았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도 예산이나 경제정책, 특히 달러의 운영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꼽꼼이 챙겼다는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이 벌어지고 있던 1952년4월에 이승만은 국회부의장 장택상(張澤相)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모든 것을 자네만 믿네”하고 말했다. 이승만과 장택상은 일찍이 미국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장택상은 이승만에게 인사문제와 재정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달러만은 내게 맡기고, 인사문제는 서로 의논해서 함세.”
6.25전쟁 휴전이후 한국경제부흥의 3대 핵심 건설사업은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판유리 공장의 건설사업이었다. 그중에서도 충주 비료공장 건설사업은 화학비료 자급자족의 길을 여는 동시에 석유화학공업건설의 선도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1953년에 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단) 자금 300만 달러로 타당성 조사를 끝내고 1955년5월에 미국 맥크로 하이드로-카본사와 건설계약을 체결했다. 부흥부의 장관 이하 간부직원들이 함께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난 이승만이 물었다.
“계약서에 에스칼레이션 클로스(escalation clause) 들어있는가?”
그러나 에스칼레이션 클로스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장관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고 전 부흥부장관 신혁확(申鉉碻)은 술회했다.
이승만 정부의 마지막 부흥부 장관 송인상(宋仁相)은 이승만의 경제정책비전을 한결 폭넓게 증언했다.
이승만은 1957년6월에 송인상을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장관! 자네는 이코노미스트야. 경제를 잘 아니까 경제에 관한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인 자기에게 몇 가지 권한을 유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면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역시 환율문제였다.
“이것은 나와 상의하기 전에는 어떤 결정도 그들[미국인들]과 해서는 안되네”
하고 이승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째는 일본인들과의 관계문제였다.
“일본에서 물건을 사오거나 경제에 관한 일을 할 때에는 미리 나에게 알려 주어야 해. 미국 친구들은 원조를 주네 하고서는 일본에서 모든 물건을 사들여 오기만 해.··· 심지어 집짓는 일까지 그들에게 설계를 주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세 번째는 다음과 같은 일이라고 이승만은 말했다.
“외국 정부나 외국인과 무슨 협약을 맺거나 원조자금의 사용명세를 결정할 때에는 꼭 나에게 먼저 물어보아야하네. 외국말로 써오는 계약서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싸인을 해버려 나중에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아.···”
송인상은 이렇게 회고하면서, “그분은 미국대통령이나 미국정부를 상대로 우리의 국가의지를 관철시키는 높은 수준의 정치경제적 안목을 가진 분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 건설
그러나 항일정신이나 반공주의 그 자체가 이승만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나 목적일 수는 없었다. 항일정신 내지 반일감정은 국권회복과 자유민주국가건설을 위한 투쟁의 원동력일 뿐이었다. 그리고 반공주의도 이승만이 추구하는 근대적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그 존재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투쟁의 이데올로기였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이승만의 이상과 목표는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교회의 핍박』에서,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서 처음되는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 가지고 아시아주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겼다고 썼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하와이 동포사회를 한국을 동양에서 처음되는 기독교 국가로 건설하기 위한 ‘기지’로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하와이 팔도’가 한문 글자는 다르지만 ‘조선 팔도’의 ‘팔도’와 발음이 같으므로 우리의 남조선이라 이를 만하다”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되기를 기약하겠도다”라고 쓰기도 했다.
기독교국가의 정치체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이며 경제체제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은 그러한 기독교 국가의 이상적인 본보기는 미국이라고 인식했다.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논설과 『독립정신』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명했는데,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말한 유명한 민주주의의 정의, 곧 흔히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라고 번역되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의역해서 썼다. 처음 「제국신문」 논설에서는 “그 정부에 세 가지 본의가 있나니, 일은 백성이 세운 정부요, 이는 백성을 위하야 세운 정부요, 삼은 백성이 행하는 정부라”라고 번역했다가, 『독립정신』에서는 “일은 백성이 하는 것이요, 이는 백성으로 된 것이요, 삼은 백성을 위하야 세운 것이라”라고 다듬었다.
청교도적 자본주의정신을 體現한 지도자
1948년에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에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한민당 등 다른 정파는 새 정부의 권력구조, 곧 정부형태를 가지고 심한 갈등을 벌였는데, 이승만이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이유로 든 것은 그것이 일본이나 영국처럼 왕제도를 버리기 어려운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기간 동안 하루에 한끼밖에 먹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떼에도 그는 빠뜨리지 않고 식사기도를 했다. 이승만의 식사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 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도 내용은 대통령 재임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승만은 국가 지도자의 기본적인 임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청교도 후예들인 미국 시민들이 행동적 금욕주의, 근검절약, 목적의 합리성, 일(노동)에 대한 소명의식 등 막스 베버가 말하는 미국의 청교도적 자본주의 정신을 체현한 지도자였다. 하와이에 있을 때에 이승만이 가장 즐겨 부른 찬송가가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하는 제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 성경구절을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이 일과였는데, 대통령 재임기에 주로 읽은 성경구절은 「마태복음」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라는 구절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의 신앙은 투쟁적이었다.
그랬던 그가 망명지 하와이에서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면서 한 기도는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을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이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처럼 평생을 소명의식 속에 살았다. ■
보낸사람: Facebook 17.09.05 10:17
孫世一, '민족보다도 국가를 더 중시한 李承晩' 대통령 재임기에 주로 읽은 성경구절은 「마태복음」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라는 구절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의 신앙은 투쟁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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