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34 제76차文化遺産踏査; 龜尾-倭館지역(4-4); 朴正熙大統領 生家
朴正熙大統領 生家 -경상북도기념물 제86호-
朴正熙大統領 生家는 大韓民國 제5대∼제9대 朴正熙(1917~1979) 대통령이 1917년 11월 14일
父親 朴成彬 公과 母親 白南義 女史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龜尾普通(初等)學校와
1937년 大邱師範學校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던 가옥으로, 경북 龜尾市 上毛洞에 있다.
(*上毛洞은 善山郡 龜尾面 上毛里였으나 1978년 善山郡 龜尾邑과 漆谷郡 仁同面을 統合
龜尾市로 승격, 구미시와 善山郡을 다시 합쳐 龜尾市가 되면서 龜尾市 上毛洞이 되었다.)
대통령이 태어난 아래채는 좌측에 앞뒤로 1칸씩의 온돌방, 우측에 방앗간과 외양간 1칸씩이
배치되었으며, 앞쪽 온돌방이 박대통령이 공부하던 방이다.
朴正熙 대통령의 本貫은 高靈이며, 先祖 때 高靈에서 星州로 옮겼다가 1914년 현 위치인
上毛洞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00년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전형적인
농촌가옥이다. 1964년 龜尾市가 안채 및 사랑채를 丹粧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으며,
生家 안에는 1979년에 설치한 焚香所가 있다.
朴正熙大統領 生家 사진
(01) 朴正熙 大統領, 祖國 近代化의 主役, 새마을운동의 創始者
나는 물론 人間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데 錯誤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當代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를 항상 念頭에 두고 일해왔습니다. – 박대통령의 回顧錄 중에서 -
아! 朴正熙
그는 알렉산더 大王같이 호쾌한 英雄도 아니고, 나폴레옹 같은 電光石火의 天才도 아니었다.
부끄럼 타는 英雄이고 눈물 많은 超人, 그리고 소박한 한 庶民이었다. 그는 韓國人의 哀歡을
느낄 줄 알고 그들의 숨결을 읽을 줄 아는 土種 韓國人이었다.
(02) 새마을로! 세계로! 미래로!
1970년대 초 보릿고개시대에 朴正熙 대통령께서 잘 살아보자며 主唱하신 국민개혁운동인
새마을운동 초기 勤勉, 自助, 協同의 旗幟아래 새마을을 가꾸는 極寫實的 상징물로 半萬年
歷史에서 世界經濟大國이 되게 한 위대한 大革新運動이었음을 기억하고 共感하여
大韓民國의 희망으로 삼아 和合團結로 世界로, 未來로 나아가는 뜻의 작품이다.(*幟: 기 치)
2011.11.14 -발주자; 龜尾市長 -작가; 송종환
(03) 멋진 담장길
(04) 朴正熙 大統領 生家 -경상북도기념물 제86호- -경북 구미시 상모동 171
이 집은 大韓民國 제5대~7대 대통령을 지낸 朴正熙(1817~1979)가 태어나 1937년
大邱師範學校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生家 내에는 안채 및 사랑채와 1979년에 건립한 追慕館이 있다. 건립 당시 안채는
草家였으나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改築하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高靈 朴氏 29世孫으로
그의 先祖는 星州에서 若木으로 移居했다가 1916년 현 위치인 上毛洞으로 移徙하였다.
(05) 現存 生家
이 건물은 朴 大統領 父母님께서 1916년 若木에서 이곳으로 移住하여 신축한 건물이나
너무 허술해 1960년말경 현재모습으로 補修하였다.
(06) 朴正熙 大統領이 태어나고 공부하시던 房
朴 大統領께서는 1917.11.14 이 방에서 탄생하시어 1937년 大邱師範學校를 졸업 후
聞慶普通(初等)學校 敎師로 부임할 때까지 공부하시던 방이다.
朴 大統領께서 공부하시던 책상, 책꽂이와 호롱불이 있다.
(07) 부엌과 헛간
(08) 안채
(09) 朴大統領 부모님께서 신축한 건물그림 사진
朴 大統領 父母님께서 若木에서 이곳으로 移住하여 신축한 건물 그림이다.
1950년 6∙25戰爭으로 본채는 燒失되고 아래채(현재 草家건물)는 소실되지 않았으나
너무 허술해 1960년 현재 모습으로 補修하였다.
(10) 生家 復元 後 방문한 朴正熙 大統領 (1)
(11) 生家 復元 後 방문한 朴正熙 大統領 (2)
(12) 뒤뜰에 있는 우물
朴正熙 大統領께서 사용하시던 우물펌프이다.
(13) 朴正熙 大統領께서 심은 감나무
이 감나무(고동시)는 朴正熙 大統領께서 1929년쯤 봄에 어머니와 같이
심었으며, 큰 나무로 자라 감이 많아 열렸으나 6∙25戰禍로 나무 일부가
불에 타 현재 모습으로 변하였다.
朴 大統領께서 生家에 오시면 生家管理人에게 이 감나무가 잘 자라도록
관리해달라는 말씀하셨다고 한다.
(14) 追慕館
(15) 朴正熙 大統領 – 陸英修 女史 사진
(16) 追慕館 왼쪽 벽
朴 大統領 家系圖, 略歷, 陸英修 女史 逝去 後 靑瓦臺에서 靈柩車를 보내면서… 등
사진을 걸었다.
(17) 追慕館 오른쪽 벽
朴正熙 大統領 父女, 敬老堂을 방문하여 음식을 제공하는 陸英修 女史 사진 등을 걸었다.
(18) 民族中興館
전시실은 대통령의 향기실, 대통령의 발자취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었으며 2013년에
開館하였다.
대통령의 향기 室
(19) 朴正熙 大統領 夫婦 모습
(20) 金烏山의 精氣 – 朴正熙 大統領의 出生
=金烏山의 精氣
朴 大統領이 태어난 上毛洞은 서북쪽에 金烏山을 등지고, 동쪽으로 洛東江을 바라보고
있는 地勢로 옛부터 背山臨水라고 하며 吉地로 여겼다.
嶺南士林學派의 씨를 뿌린 冶隱 吉再가 태어났으며 新羅佛敎의 聖地 太祖山 桃李寺도
이곳에 있다. 善山은 冶隱 이외에도 丹溪 河緯地, 新堂 鄭鵬(조선 前期의 文臣)을 배출한
곳이며, 太祖 王建이 甄萱을 무찌르고 後三國을 통일하는 決戰場이었다. (*冶: 풀무 야
*隱: 숨을 은 *桃: 복숭아 도 *緯: 씨 위 *鵬: 붕새 붕 *甄: 질그릇 견 *萱: 원추리 훤)
=朴正熙 大統領의 出生
朴正熙 大統領은 1917.11.14 경북 善山郡 龜尾面 上毛里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朴成彬은 高靈 朴氏로 中興始祖 直講公의 15代孫이며, 모친 白南儀 여사는
水原 白氏로 고향은 善山郡 龜尾面이다.
朴 大統領이 태어날 당시 上毛里는 당시의 농촌을 상징하는 가난한 마을이었으며,
朴 大統領 집안도 역시 貧農家로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의 苦痛은 훗날 經濟大統領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彬: 빛날 빈)
(21) ‘대추방망이’ 少年
朴正熙 大統領은 어렸을 때부터 작지만 야무진 성격을 지니고 있어 별명이 ‘대추방망이’였다.
-李洛善 備忘錄
成績은 전 과목이 우수하고 暗記力이 좋아 算數, 歷史, 地理 등은 늘 滿點이었고 思考力이
예민하였다. 級長으로서 統率力이 탁월하여 자습시간에는 學友들을 지도하고 學級運營도
잘 하였다.
-作故한 동기생 장월상의 증언
朴正熙는 어릴 때 몸집은 비록 작았으나 야무져 별명이 ‘대추방망이’였다. 體軀에 비해
膽力이 세고 머리가 비상하고 暗記力이 뛰어났다. 3학년 때 학예발표회 연극에서는
老人役을 맡아 학부형과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軀: 몸 구)
(22) 熱情으로 가득 찬 20세의 젊은 敎師
大邱師範學校 입학과 생활 – 聞慶普通(初等)學校 敎師生活
(23) 朴正熙 大統領 遺品
(24) 淸廉한 軍人 (*廉: 청렴할 렴)
1950년대 軍의 不淨腐敗가 심해 軍需物資가 釜山國際市場으로 流出되고, 厚生事業이 자
행되었다. 將軍의 月給이 쌀 한 가마니 수준으로 生計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였으나
軍人 朴正熙는 의연하게 지냈다.
將軍이 되어서도 淸貧하여 남의 집 셋방살이를 轉轉하고 때로는 糧食이 떨어져
陸英修 女史가 몰래 쌀을 꾸러 다니기도 했다. 제5사단장 在職 때 서울에 있는 이삿짐을
실어 나른 運轉技士 이타관은 그때를 이렇게 懷古했다.
“서울에 와보니 鷺梁津驛 앞의 셋방은 아직 비어 있지 않았다. 돈에 맞추어 집을 얻다 보니
부엌도 없고 아궁이가 마루밑에 있어 솥을 걸 곳이 없었다. 군인들이 비옷으로 쓰던
고무장옷을 방바닥에 깔아놓고 漏氣가 차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그런 房이었다. 내가
‘장군님도 너무 하시네요’라고 하자 사모님은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잖아요’하며
오히려 나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漏: 샐 누)
(25) 激動의 時期를 헤치며
混亂의 시대와 5∙16革命 – 朴正熙 大統領이 1961년 5∙16혁명을
앞두고 龜尾 金烏山 上空을 지나며 남긴 말 (*48번 사진 참조)
(26) 大統領 執務室 展示 遺品
(27) <有備無患> 親筆 揮毫 -대통령기록관 所藏 (*毫: 터럭 호)
(28) 1960년대 - 1970년대
1960년대; 祖國 近代化의 힘찬 발걸음 - 1970년대; 繁榮의 來日을 향하여
(29)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韓國社會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04.22 旱害對策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地方長官會議에서 대통령 朴正熙는
水災民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農村再建運動에 착수하기 위하여
勤勉∙自助∙自立精神을 바탕으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提唱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새마을운동 초기에는 단순한
農家의 所得倍加運動이었으나 많은 成果를 거두면서 都市∙職場∙工場에까지 확산되어
勤勉∙自助∙協同을 生活化하는 意識改革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先進國隊列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意志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政府主導의 국민적 近代化運動이었다.
새마을운동은 朴正熙 大統領의 철저한 祖國近代化 정신의 所産으로 1970년대의
驚異的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0) 勳章∙褒章 (*褒: 기릴 포)
(31) 소파와 벽에 걸린 사진
(32) 自主國防 – 治山綠化와 自然保護運動
=自主國防
-1964.07 베트남戰 同議案 可決 -1966.06 韓國軍 裝備現代化 計劃 발표
-1968.04 鄕土豫備軍 창설 -1970.08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1971.11 重火器 국내생산계획 발표 -1971.11 民防空訓練 실시
-1975.11 艦對艦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1978.09 國産 長距離誘導彈, 多連裝로켓 시험발사 성공
-1978.11 韓美聯合司令部 발족
=治山綠化와 自然保護運動
-1961.12 山林法 제정 -1963.02 國土綠化促進에 관한 臨時措置法 公布
-1965.04 治山綠化7個年計劃 成案 -1971.07 서울지역에 그린벨트 最初 指定
-1973.03 제1차 治山綠化 10개년계획 발표 -1877.10.07 肉林의 날 선포
-1978.10 自然保護憲章 선포 -1979 제2차 治山綠化 10개년계획 발표
(33) 가슴으로 보듬은 國民을 향한 사랑
=국민을 위해 흘린 따뜻한 눈물
1964년 12월 借款導入을 위해 西獨을 방문한 朴正熙 대통령이
首都 본(Bonn)에서 주요일정을 마치고 루르(Ruhr) 지방에 가서
韓國 鑛夫와 看護員들을 위로하고 연설하는 중에 눈물을 흘려 瞬息間에
講堂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慈愛로운 令夫人 陸英修
1960~70년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 이는 陸英修 女史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힘든 노동을 견뎌가며 일하던 이들과 社會의 그늘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陸 女史는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34) 웃음 가득 찬 朴正熙 大統領 – 陸英修 女史
大統領의 발자취 室
(35) 胸像홀로그램, 國民敎育憲章
(36) 아시아 龍에서 地球村 經濟 리더로
=輸出 入國과 重化學工業 育成
1960年代初까지만 해도 韓國은 우간다, 수단, 튀니지, 카메룬 등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수출규모가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朴正熙 대통령 政府主導의 강력한 産業競爭力
강화정책이 추진되고, 韓國民의 勤勉함과 敎育熱, 손재주 등이 더해져 수출규모가 크게
성장하였다. 1964년 수출이 1억$였으나 1977년 100억$, 2011년에는 5,000억$를
돌파하였다. 1963년 103$에 불과했던 1인당 國民總所得(GNI)은 1977년 1천$,
2000년 초반 2만$로 늘어났다.
=科學技術 發展
朴正熙 大統領은 經濟開發에 科學技術의 중요성을 認識하고 1966년
韓國科學技術硏究所(KIST)를 설립하였으며, 1967년 科學技術振興法를 制定,
科學技術處를 設立하고 과학기술발전의 기초를 구축하여 科學技術發展에 一大
轉換點을 만들었다.
(37) 未來戰略家, 朴正熙 大統領
未來學者 허만 칸과의 만남
朴正熙 大統領은 未來學이 막 胎動하기 시작한 1960년대 초에 當代 최고의 戰略理論家이며
未來學者 Herman Khan(1922~1983) 허드슨 硏究所長과 交友하면서 우리나라의 새로운
未來를 열기 위한 끊임없는 挑戰을 試圖하였다.
(38) 朴正熙 大統領, 독일 뤼프케 대통령, 독일 파견 看護師와 鑛夫
(39) 보릿고개 체험장에서
(40) 朴正熙 大統領 銅像으로 가는 길 옆에 탐스럽게 열린 감
(41) 朴正熙 大統領 銅像으로 가는 길
(42) 朴正熙 大統領 歷史資料館 建立工事
-공사기간; 2017.12~2019.05 -發注處: 龜尾市廳 -垈地면적; 77,021㎡
-건축면적; 1,736㎡/延面積; 4,358㎡ -主用途; 문화 및 집회시설(전시장∙1종박물관)
(43) 朴正熙 大統領 銅像
박 대통령의 94회 誕辰祭와 함께 2011.11.14 除幕되었다.
2009년 4월에 구성된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3만여명의
募金으로 동상을 건립했으며, 김원영 弘益大 미술대학 교수가 설계하였다.
(44) 朴正熙 大統領 銅像을 향하여 默念
(45) 朴正熙 大統領 銅像 앞에서 기념촬영
(46) 님이 고이 잠든 곳에 ―1975.08.14 - 詩 朴正熙 -
님이 고이 잠든 곳에 / 방초만 우거졌네 / 백일홍이 빵긋 웃고
매미소리 우지진데 / 그대는 내가 온 줄 아는지 모르는지
- 중략 -
해와 달이 뜨고 지니 / 세월은 흘러 가고
강물이 흘러 가니 / 인생도 오고 가네
모든 것이 다 가는데 / 사랑만은 두고 가네.
(47) 中興亭
(48) 國民에게, 鄕土 선배에게
1961년 5월 朴正熙 대통령께서 第2軍 副司令官으로 在職中 軍事革命을 하기 위하여
비행기 편으로 上京 도중에 龜尾 金烏山 上空을 지나면서 쓴 글이다.
= 國民에게
荒波에 시달리는 三千萬 우리 同胞
언제나 구름 개이고 太陽이 빛나리
千秋에 恨이 되는 祖國 秩序 못 잡으면
내 民族 앞에 鮮血 바쳐 充血寃魂 되겠노라. (*寃ㅣ 원통할 원)
= 鄕土 先輩에게
嶺南에 솟은 靈峰 金烏山아 잘 있거라.
삼차 걸쳐 成功 못한 興國一念 朴正熙는
一片丹心 굳은 決意 所願 成就 못하오면
快刀割腹 맹세하고 一擧歸鄕 못하리라.
歸京하는 길에
(49 차창 밖으로 보이는 龜尾 金烏山
*金烏山(해발 977m)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大本山이었으나 中國 五岳 가운데 하나인 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南崇山이라고도 했다. 金烏山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金烏山이라 이름 짓고, 太陽의 精氣를 받은 名山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奇巖怪石이 어우러져 壯觀을 이루고 있으며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頂上部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있는 고려시대의 金烏山城(경북기념물 67호)은
壬辰倭亂 때 倭敵을 방어하는 要塞로 이용되었다.
(50) 歸京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본 저녁노을
- 끝 -
'三四共和函'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정희대통령의 통역관 백영훈의 간증 (0) | 2018.11.10 |
---|---|
박정희를 아시나요? 8,3조치 私債凍結 (0) | 2018.10.11 |
평화를 위해선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에서) (0) | 2018.06.24 |
45年뒤를 내다본 朴正熙 大統領의 對國民 談話文 (0) | 2018.06.08 |
5,16 군사혁명 57주기 (0) | 2018.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