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史.軍歌(日)

[러일전쟁(露日戰爭)]

bsk5865 2019. 4. 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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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露日戰爭)]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이 1896~1898년 사이에 맺은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협정 및 로젠-니시(Rosen-西)협정 등이 바로 이것들이다.


그러나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란(義和團亂)이 만주로 파급되자(1900),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영일동맹론과 러일협상론으로 대응 방안이 갈렸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는 러불동맹의 적용 범위를 아시아로 확대시키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 해 4월 러청철병협정(露淸撤兵協定)을 맺어 스스로의 약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제1차철병까지만 이행했을 뿐, 2차철병 약속을 위배, 도리어 봉천성(奉天省) 남부와 길림성(吉林省)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가 동아시아정책을 밀고나간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은 베조브라조프(Bezobrazov, A.M.)를 비롯한 강경파가 실권을 장악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이처럼 만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압록강 유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압록강삼림채벌권 실행을 명목으로 용암포(龍巖浦)를 군사기지화함으로써 한국에 대해서까지 야욕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어 8월 위테(Witte, S.Y.)가 해임되고 여순에 극동총독부가 신설되는 등 이른바 신노선(New Course)에 의한 대일적극정책이 전개되었다. 베조브라조프 일파의 이와 같은 모험주의노선이 전쟁을 촉발시켰다는 견해는 일본의 북진정책,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견해와 함께 러일전쟁의 원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의 하나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아시아로 돌리려는 독일외교를 비롯한 국제 역학 관계와, 혁명이 우려되던 국내 위기를 밖의 문제로 희석시키려 했던 차르(tzar)의 계략이 전쟁의 원인으로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1903년 8월부터 개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여러 차례 만주와 한국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인 교섭을 가졌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한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독점권과 아울러 중립지대(한국의 39° 이북) 설정 및 한국령의 전략적 사용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일본의 8월 제1차 협상안은 청·한 양국의 독립 보전과 상업상의 기회 균등, 한·만에 있어서의 러·일의 상호 이익보장 등을 골자로 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10월에 만주를 일본의 세력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군사활동 제한 및 39° 이북의 중립지대 설정을 주장하였다. 고무라(小村壽太郞) 외상은 10월 1차 수정안에서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더욱 분명히 하여, 일본의 대한파병권(對韓派兵權)은 물론 한·만국경에 중립지대 설치를 요구하였다.


12월 중순에야 제시된 러시아의 반대 제안은 청나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한국 북부의 중립지대 설정 및 한국 영토의 전략적 사용 불가 등 한국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12월 하순 일본의 2차 수정안과 1904년 1월 초 러시아의 회답도 다 같이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양자의 타협 여지는 거의 없었다. 1904년 1월 일본의 어전회의에서는 개전론이 유력하였고, 최후 제안에 대한 러시아의 회답이 알려지기도 전인 2월 임시각의를 통해 개전이 결정되었다.


전쟁은 2월 8일 밤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병력이 15개 사단에 이른 일본군은 9월에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 지휘하의 제3부대는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이어 3월의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양측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전시 약 120만 명의 일본군은 3개 보병단과 13개 예비여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사상자는 68만 9000명(전사자 13만 5000명)이었다. 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 11척을 보유하였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함정이 여순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으로 이루어졌다.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의 배치 상황은 정규군 9만 8000명과 총 148정, 기관총 8대였다. 철도수비대 2만 4000명은 동청철도 연변의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전쟁 초기 시베리아 철도의 군 수송률은 하루 6량에 불과하였다. 만주로 이동한 120만의 병력은 대부분 1905년에 이동한 것으로, 총 4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역시 지탱할 여력이 없어졌다. 일본은 재정면에서 1년간의 전비를 4억 5000만 원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 동안 19억 원을 지출하였다. 또, 전선의 확대로 보급로가 길어져 전술상의 취약점이 노출됨으로써 러시아의 주력부대가 하얼빈에 집결, 반격할 기회를 노리는 형세였다.


봉천전투 이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전력을 상실, 종전을 서둘러야만 할 입장이었다. 1905년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이제 강화가 불가피한 형편이 되었다. 이에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勝機)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전투가 바로 리바우(Libau)항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진 발틱함대와의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이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45분,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사령관은 24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격파,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Z.P.) 제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고, 보급도 비교적 원활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츠머스강화회의에서 러시아측 대표 위테가 패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점에서 구 소련학자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영국과 미국의 전쟁을 일본이 대리로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1904년 4월과 1905년 5월 사이에 영·미가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 제공한 총 4억 1000만 달러의 차관 중 약 40%가 일본의 전비로 충당되었다. 특히, 영국은 동맹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러일교섭시 제3국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일본의 요청을 받은 영국은 프랑스외상 델카세(Delcass, T.)와 러시아외상 람스도르프(Lamsdorff, V.)의 개입 요청을 모두 거절하였다.

영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대한 제3국의 석탄공급 및 원조제공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언했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스벨트(Roosevelt, T.)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삼국간섭 당시처럼 일본에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또한 당사국인 러·일에 대해서는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말며, 북중국을 포함한 전중국의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을 부정하였다.


아울러 그가 한반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사실은 주미러시아대사 카시니(Cassini)의 항의처럼,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으려 하면서,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개전과 동시에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창생인 가네코(金子堅太郞)를 미국특사로 파견, 미국의 친일여론을 주도하게 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한편,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한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프랑스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고 4월 8일 영·불협약(Entente Cordiale)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발틱함대에 대한 석탄공급 등 동맹국으로서의 편의제공은 불가피하였다.


이에 반해,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아시아로 돌리고자 노력했던 독일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공격받을 경우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1903년 7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게 암시하였다.


그러면서도 1904년 1월 일본 쪽에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실제로 개전과 더불어 중립을 표방하였다. 독일의 이러한 태도가 러일전쟁을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더욱이, 발틱함대에 대한 연료보급이라든가, 도거 뱅크(Dogger Bank)사건 때 보인 독일의 노골적인 대러시아 지지 등은 열강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결국, 러일전쟁은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을 맺게 하여 대독포위망(對獨包圍網)을 구축, 마침내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는 과도적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 셈이었다.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고, 국제정세도 전쟁을 끝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항을 위해 러시아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강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을 위험시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열강은 제각기 종전 이전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해 두려고 하였는데, 뵈르케(Bjorke)밀약, 영일동맹 개정, 그리고 태프트-가쓰라(Taft-桂)밀약 등이 모두 그러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들이다.


러·일 양국은 6월 8일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평화제의를 수락했고, 미국은 12일자로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회담장소 선정과 전권대표 선임에 양측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상륙을 결행, 러시아를 강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을 대표한 고무라·다카히라(高平)와 러시아를 대표한 위테·로젠 사이에 약 4주간(8.9.∼9.5.)에 걸쳐 진행된 강화교섭은 일본이 러시아에 제한 12개 강화안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양측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가장 우월한(paramount) 이익 보유, 요동반도 조차권, 장춘(長春)~여순(旅順) 간의 동청철도 및 그 지선의 양도 문제 등은 쉽게 합의하였다. 그러나 ① 사할린 문제, ② 전비배상 문제, ③ 중립국에 억류된 러시아 군함의 인도 문제, ④ 극동 해군의 제한 문제 등에서는 쉽게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특히 1·2항을 합쳐 50° 이북의 북부 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 주는 대가로 12억 원을 일본에 지불하라는 새로운 요구안을 내놓았다.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 놓이자, 일본군은 군비지출 문제는 철회하고 사할린 남부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양국 사이에 4주 만에 성립된 것이 9월 5일의 포츠머스강화조약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한 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얻지 못한 것을 청나라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였다.


고무라·우치다(內田康哉)와 경친왕(慶親王)·위안스카이(袁世凱) 사이에 12월 12일 체결된 만주에 관한 청일조약은 길림(吉林)~장춘(長春) 및 신민둔(新民屯)~봉천(奉天) 철도에 관한 비밀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1930년까지 비밀에 붙여졌으나, 일본은 그들이 주장해 온 문호개방, 기회균등 원칙을 스스로 파기함으로써 열강 모두를 적으로 돌렸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양국의 상호견제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이 선택한 배타적인 만주 진출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의 직접 교섭의 길을 택하였는데, 그것이 1907년에 체결된 러일협상이다. 패전으로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저지된 러시아는 그 진출 방향을 중앙아시아와 발칸 지역으로 전환하였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1907년 영국과의 협상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열강의 이해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로의 팽창은 분쟁의 소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정세를 크게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시킨 셈이었다. - 최문형


『참고문헌』


露日戰 爭前後日本의 韓國侵略(歷史學會, 一潮閣, 1986), 日露戰爭史の 硏究(信夫淸三郞·中山治一, 河出書房新社, 1972), 日本外交史硏究-日 淸·日露戰爭-(日本國際政治學會, 1962), Roosevelt and the Russo-Japanese War(T. Dennette, New York : Doubleday, Page & Co., 1925), The Diplomacy of the Russo-Japanese War(J. A. Whit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4), The Origins of the Russo-Japanese War(I. H. Nish, New York : Longman Group, 1985), Korea, Focus of Russo-Japanese Diplomacy, 1898~1903(I.H. Nish, Asian Studies, Vol. IV, No. 1, Apr., 1966).

 

출처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4년 2월 8일, 한국(Korea)의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던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 바략 호와 코리츠 호가 일본 함대의 총공격을 받았다. 양국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러 시간의 피나는 전투―특히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가 끝난 후, 러시아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배를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러일전쟁의 포연은 한국 땅을 비켜갈 리 없었다.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한 일본은 같은 날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 역시 기습작전이었다.“


위 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문 ‘이그재미너(Examiner)’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크게 활약했던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의 종군기 첫머리다.


당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황야의 부름’이나 ‘강철 군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러일전쟁 첫날의 모습을 그렇게 그렸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여순·대련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제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두려워했던 일본은 군함을 인천항으로 향했다. 일본 육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육로로 북진했다.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 밖에서 러시아 군함 바략호와 코리츠호가 침몰하고 있다.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뺨에 붉은 점을 친 자들은 선두의 선발부대를 따라랏!”

“너처럼 보라색 점은 공병대 소속이다! 혼동하지 마랏!”


일본군은 군수품의 소속을 쉽게 식별하려고 짐을 진 한국인들의 뺨에 부대별로 다른 색깔의 점을 칠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길 연변의 마을들은 매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산속으로 피란을 떠났다. 마을이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정부와 우왕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


집을 몽땅 비우고 멀리 피란하는 것 외엔 대응책이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의 무력한 모습을 잭 런던은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구경하려고 마을로 내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기에 약간의 위험만 느끼면 서둘러 도망친다.  …한국의 북쪽 지방은 일본군이 통과할 때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고 파종하지도 않았기에 들에는 녹색 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은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대사건이었다. 저 먼 동쪽 끝, 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제국이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인가.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언제나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던 러시아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또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성장을 어디까지 지켜보고 지원할 것인가. 러일전쟁에 대해 유럽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언론들이 한국과 청에 보낸 종군 기자들의 활약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진 전송이 불가능하던 당시, 숱한 언론들이 생생한 현장 묘사도(일러스트레이션)로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포츠머스 조약과 6자회담]

 

시원한 여름 바람이 너른 바다 위에 불어대던 1905년 8월 8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협상 대표단이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해군 기지인 포츠머스에 도착했다.

1년 넘게 끈 러일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회담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적극 중재에 나섰다.


“저 사내가 ‘냉소적이고 오만한 천재’로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무대신이었다고 일컬어진다는 세르게이 비테구먼.”


“저쪽 키 작은 일본인이 ‘체구는 작아도 심장이 큰 사람’으로 불린다는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야.”


취재를 위해 몰려든 각국의 신문기자들이 떠들썩했다. 포츠머스에 전권대신(專權大臣)으로 파견된 대표들은 양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라고 꼽힌 사람들이었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사 로만 로젠과 일본 공사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도 협상 대표단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국내 혁명의 발발로, 일본은 국력의 소진으로 피차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열린 회담이었다.

 


▲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 참석한 러시아 전권대표(비테 전 재무대신)과 일본 전권대표(고무라 외무대신)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러시아군 사상자 27만명 중 사망자 5만명 이상, 일본군 사상자 27만명 중 사망자 8만6000명이라는 참혹한 통계 수치로 남은 전쟁의 마무리 작업이었던 포츠머스 강화회담은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었다. 러·일 양국 대표들은 자국의 명예와 국익은 물론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까지 걸고 전력으로 싸웠고, 회담장에는 날카로운 언쟁과 신랄한 풍자가 난무했다. 9일 시작된 회담은 두 나라의 국운을 건 싸움 끝에 29일 완전히 타결되었고 9월 5일에 조인되었다.


포츠머스 회담의 핵심은 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조약은 제2조에서 명시적으로 “일본은 한국에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제1조는 ‘러·일 양국의 통치자와 국민들 사이에 앞으로 평화와 우애가 있을 것’을 선언한 단순한 외교적 조항이기에, 제2조가 조약의 실질적인 첫머리였다.


이 조약으로 또 여순·대련의 조차권과 장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을 일본이 가져갔다.


동해와 오호츠크해·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 어업권도 가져갔다.


대륙으로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드디어 확고하게 실현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된 것이다.

 


▲ 포츠머스 조약 문서. 러시아는 조선과 남만주에 대한 권한을 일본에 대폭 양도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조인으로 세계 열강은 “이로써 전쟁이 끝나고 세계 평화가 이룩되었다”며 온통 환호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회담을 주선하고 중재하여 세계 평화를 이루었다고 1906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포츠머스 조약은 세계 여러 나라에는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지만, 대한제국에는 험난한 운명의 시작을 의미했다.


포츠머스 조약은 국제조약으로는 사상 처음 ‘한국은 일본에 종속된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한국 편을 들어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과 10년 전 청일전쟁 강화조약 당시 강대국 세 나라가 나서서 일본이 중국의 여순반도를 소유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일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10년 전의 ‘삼국간섭’을 치욕으로 여기고 동맹외교와 국력신장에 치중했던 일본은 드디어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힘을 얻었다.


포츠머스 조약에 앞서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통해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대한제국은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처지로서, 그토록 치명적인 치욕과 피해를 입으면서도 주변국의 도움은커녕 국제적인 경멸의 대상에 불과한 처참한 상태였다.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왜 그토록 고립되었고, 왜 그처럼 참혹한 대우를 받았던가.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의 국제사회가 “한국 국민은 나약하고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기보다 전쟁 마당에 나와 있는 커다란 전리품으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이처럼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정착된 왜곡된 한국민의 이미지는 대한제국 멸망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우리 민족의 운명에 가혹한 족쇄로 작용했다.


1910년의 한일병합, 1943년의 포츠담 선언, 거기서 비롯된 분단과 신탁통치 시비가 모두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에 비극적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지구상 유일한 분단 국가로서 고통을 겪고 있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많은 논자들이 당시 국제사회의 한국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일본의 모략과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살벌하던 국제경쟁의 전투 현장에서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지도층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안이함과 무능함이, 그런 모략과 모함이 통용될 소지를 제공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이 필사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긴박하던 1903년,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들은 탕진된 국고를 모두 쏟아서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고종은 외국의 축하사절들이 오면 항구에서 예포를 쏘며 맞는 예전 행사에 쓰려고 양무호라는 노후한 군함을 일본에서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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