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을 계속하는 일본 우익들이 내세우는 일본의 업적중의 하나가바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입니다. 남하를 시도하던 러시아의 세력을 물리침으로서일본이 대한제국을 삼키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라 할까..... 후소샤 교과서에도 일본의 이러한 시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한 황인종" 후소샤 교과서를 통해 이 전쟁을 살펴봅니다. 러일전쟁 기록화 (실제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아님)
일노전쟁(日露戰爭)
일본이 일노전쟁을 결단한 것은 왜일까요?
일노개전(日露開戰)과 전쟁의 향방
일본의 10배의 국가 예산과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
부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였다.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의
군사력이 일본이 겨룰 수 없을 만큼 증강될 것이 분명했다.정부는 시기를 놓칠 것을
걱정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다졌다.
1904(메이지 37)년 2월,일본은 러시아 군함에 공격을 가하여 일노전쟁을 개시했다.전
쟁터가 된 것은 조선과 만주였다.1905년,일본 육군은 고전 끝에 뤼순(旅順)을 점령했
고 펑텐회전(奉天會戰)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발트해로부터 발틱 함대를 파견했다.함대 중 38척이 아프리카의 남단을 우회,인도양을 횡단하여 약 7개월에 걸쳐 일본해에 도착했다.이를 맞아 싸운 일본의 연합 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사령장관의 지휘 아래 병사들의 높은 사기와 뛰어난 전술로 발틱 함대를 전멸시켜,세계의 해전사에 남을 경이로운 승리를 거두었다(일본해해전 [日本海海戰]).
지도:개전 전의 일노 양군의 전력 배치
그림:개전 전의 러시아의 극동 병력 러시아는 만주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고,시베리
아 철도를 이용해서 병력을 증강했다.
()안은 극동의 병력.단,해군의 표는 소형 함대를 제외한 함선 수.러시아의 상단
함선 수는 발틱 함대의
사진 :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실제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아님)
<일영동맹의 이점(고무라 의견서로부터)>
① 아시아에 있어서 영국의 목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현상 유지와 통상 이익이며,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야심을 제지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② 따라서 일영조약은 평화적,방위적인 것으로,국제 여론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③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청국은 더욱더 일본을 신뢰하게 되어,일본의 이익을 증진한다.④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강국과 동맹을 맺어,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뜻에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영국은 동맹을 맺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이다.⑤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일본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영국인은 동맹국의 공통 이익이라는 점에서 일본에 재정상,경제상의 편의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⑥ 일본의 입장에서 대영제국과 시베리아의 통상상의 가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⑦ 러시아 해군은 영국 해군보다 약해서 대항하기가 수월하다.
사진: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그림:일영동맹의 갱신을 기념하는 그림엽서
세계를 바꾼 일본의 승리
일본해해전에서 승리했을 때,일본은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빚과 국채로 꾸려 가던 국가
예산의 8년치에 해당하는 군사비를 다 써 버린 뒤였다.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의 국력
차이가 드러나,형세가 역전될 것이 명백했다.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
리한 시기를 골라 일노 간의 강화를 중개했다.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 결
과,1905(메이지 38)년 9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1897년,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하고,중국의 랴오둥 반도 남부(후에 일본은 관동
주 [關東州]라 부른다)의 조차권(租借權)을 취득하였으며,남만주에 러시아가 건설한 철
도의 권익을 양도받고,남가라후토(南樺太,역주:남부 사할린)영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배상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전쟁을 계속하고자 해도 국력이 한계에 달해 불
가능하다는 사정을 모르는 국민 일부는,이를 불만삼아 폭동을 일으켰다(히비야화공사
건 [日比谷火攻事件]).
일노전쟁은 일본의 생존을 건 전쟁이었다.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국의 안전
보장을 확립했다.근대 국가로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유색 인종의 국가인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백인 제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가 되어 있던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주 1).그러나 한편 황색 인종이 앞으로 백색 인종을ഊ9
위협할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주 2)이 구미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진:포츠머스강화회의 러시아 대표 비테(①),미국 대통령 루스벨트(②),일본 대표 고
무라 주타로(③)
그림:구미에서 본 일노전쟁 프랑스 신문의 만화 삽화(1904년).거인 러시아에 도전하는 일본인을 온 세계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당시에는 모두가 러시아의 승리를 믿
고 있었다.
주 1.유럽에서도 오랜 세월 러시아 제국에게 억압받고 있던 핀란드,폴란드,터키 사람
들은 일본의 승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주 2.일청전쟁 후 이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등이 주장한 바 있다.
지도:일노전쟁 후의 일본의 영토와 권익
사진:히비야화공사건
해 보자:일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원인을 정리해 보자.
<일노전쟁과 독립에 대한 자각>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결과,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큰 희망을 갖기에 이른 것입
니다.」(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 [孫文])
「만약 일본이 가장 강대한 유럽의 한 국가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면,왜 인도
도 같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후일의 수상 네
루)
「일본은 입헌제이기 때문에 위대해졌다.그 결과 그렇게도 강한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이란의 시인 시라즈이)
「일본인은 유럽인들에게 자기들의 분수를 알게 한 유일한 동양인이다.」(이집트의 민
족 운동 지도자 무스타파 카밀)
(역사의 명장면)일본해해전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
일본 국가의 새로운 과제
한국병합(韓國倂合)
일노전쟁 후,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해 갔다.구미 열강은 영국
의 인도,미국의 필리핀,러시아의 외몽고 등 자국의 식민지나 세력권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영향하에 두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국의 병합이 필요하다고 생
각했다.1910(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내의 반대를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한국병합).
사진 : 을사늑약시 무장하고 서울로 진입하고 있는 일본군
한국 국내에는 민족이 독립을 잃는 것에 대해 격심한 저항이 일어났고,그 후에도 독립
회복 운동이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국병합 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철도와 관개 시설을 정비하
는 등의 개발을 했고 토지 조사를 개시했다.그러나 이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그 때까
지의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으며,또한 일본어 교육 등 동화(同化)정책
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다.
사진:한국 옷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초대 한국통감
으로 부임했지만,1909년 하얼빈에서 암살되었다.
사진:조선총독부의 건물 조선총독부는 한국을 병합한 1910(메이지 43)년에 경성(현재
의 서울)에 설치되었으며,1945(쇼와 20)년까지 존속되었다.
해봅시다:일노전쟁 무렵,세계에는 ① 열강,②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한 나라,③ 식민
지라는 세 종류의 나라가 있었다.각각 그에 해당하는 나라를 되도록 많이 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