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규태 조회 156 추천 0 2019.03.14. 08:54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전 교통부장관’정도로 기억하는 집단적 치매로부터 빨리 깨어나지 못하면, 선진일류사회는 고사하고,
▶ 날로 부상하는 중국, 일본 사이에서 우리 후손들이 과연 21세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 본문 중에서> ▶ 글 : 김국헌(金國憲)육군 소장
● ‘백선엽' 교통부장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원로회의에서 세종시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자문을 구하는 자리를 보도하는 동아일보 기사에 백선엽 장군을 ‘전 교통부장관’ 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았다. 한국군 최초의 육군대장으로서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예편 후에는 주불대사 등을 지내다가, 박정희 정부에서는 교통부장관도 지냈으니 그 소개가 틀린 것도 아니다.
미군들과 협조하며, 간혹 팽팽한 협상을 하다보면 외교관이나 비즈니스 맨들과는 달리, 군인들끼리는 역시 서로 통하는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이 점이 대화와 소통에 도움이 되던 것을 기억한다. 그 중에 한 예화다.
‘요새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역사를 잘 모른다. 미국에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들은 맥아더가 2차대전의 영웅이고 퍼싱은 1차 대전에서 미군을 이끈 ‘general of the armies' 이며, 셔먼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끈 장군이라는 것을 구분할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더니, 카운터 파트인 Dunn 장군은 파안대소하면서, ’요새 미국 사람들은 그들이 어느 때 장군들인가를 구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 별로 없을 것이다‘고 하여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미군들에게도 General Baik 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서 '살아 있는 전설‘ (living legend) 이다. 맥아더, 릿지웨이와 같은 장군들이 이미 오래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지금, 미군들이 백선엽 장군에게서 ’살아 있는 영웅‘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세대의 차이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6.25를 살아온 세대에게는 백선엽 대장은 이승만 대통령만큼이나 익숙한 분이다 그를 ‘전 교통부장관’ 정도로 알고 있는 젊은이들을 탓하고 슬퍼할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과 사회교육에 문제점이 없느냐를 되돌아보고, 어른들이 분발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왜 독도를 저렇게 계속 들고 나오고, 위안부와 징용에 끌려간 분들에게 저들이 말하는 ‘보통국가’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뒤처리를 하고 있느냐를 유심히 보면서, 일본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성실하나, 전체적으로는 아직 덜 깨이고, 역사교육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는 한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민의 의식 가운데 남아 있고, 현재의 사고와 판단의 기준이 되며, 미래의 꿈과 비전의 나침반이 될 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 ‘전 교통부장관 ’정도로 기억하는 집단적 치매로부터 빨리 깨어나지 못하면, 선진일류사회는 고사하고, 날로 부상하는 중국, 일본 사이에서 우리 후손들이 과연 21세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다부동의 3백-백선엽 장군
스파르타의 3백 용사가 테르모필레의 협곡에서 페르샤의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역사는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다. 1950년 북괴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의 테르모필레였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8월 15일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30세의 청년장군이었던 사단장 백선엽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쏴라”는 비장의 투혼으로 사단의 선두에 섰다.
8월 16일 왜관 북서쪽 낙동 강변에 B-29 99대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다부동 전투는 8월 30일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백선엽은 북괴군 8월 공세의 예봉을 꺾었다. 이로써 백선엽의 1사단은 김종오의 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북진에서는 평양 입성의 선두에 서게 된다. 평양의 지리에 익숙한 백선엽은 1950년 10월 대동강을 선두로 도하하여 평양에 입성한다.
1920년생 백선엽은 평양사범 출신이었다. 백선엽은 이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간다. 정일권은 4기, 백선엽은 9기였다. 박정희는 봉천군관학교의 후신인 신경군관학교 2기였다. 이들은 모두 각기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이를 빌미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준식 등은 백선엽 등을 친일군인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他山之石으로 삼을 일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었던 만넬하임은 그런 군사경력을 활용하여 러시아에서 핀란드가 독립하는 전쟁을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만넬하임은 1939년 스탈린이 침공해오자 지형과 스키를 이용한 절묘한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驅逐한다. 스탈린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히틀러가 소련군을 얕보고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만넬하임은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우리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사경력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맞는가?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장은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세 분 뿐이었다. 그중에서 전공은 백선엽이 으뜸이었다. 릿 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군장성도 백선엽을 가장 신임하였다. 이들 2차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에게 백선엽은 아들 같았으나, 백선엽은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잘 받아들이고 성과를 거두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데는 이승만의 공이 절대적이지만, 미 군부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미 군부에 처음 이 구상을 제기한 것은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이종찬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된 이래 정일권과 번갈아가며 참모총장과 1군사령관을 역임, 대장을 7년 반이나 달았다. 그만큼 백선엽은 군인으로서 전공도 대단하였지만 영예도 누렸다.
그중에서 백선엽이 숙군과정에서 절체절명의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움을 준 일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이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숙정시 백선엽은 정보국장으로서 실무 책임자였다.
특무대도 당시에는 백선엽의 휘하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군 후배 백선엽에 구명을 탄원하였고, 백선엽은 박정희의 선처를 상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백선엽은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게 하였는데, 625가 발발하자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
백선엽은 지금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자유로 구사하여 미국의 참모대학에서, 일본의 방위대학교에서 강의한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부임하자말자 백선엽 장군을 찾아뵙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다.
그들이 傳說처럼 받드는 맥아더, 릿지웨이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백선엽은 그들에게는 神話다. 이제 백선엽 장군을 명예 원수로 獻揚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국군 장병들에게 지시한 그 유명한 명령!
“만일 내가 다부동 전투에서 물러선다면 여러분은 나를 쏴라!”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 게재된 웹툰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거창 학살사건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만을 점유하고 1895년부터 1945년까지 통치했다. 1947년 2월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과 본성인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정성공의 대만 정복 이후 건너온 本省人은 90%였는데, 국민당의 통치는 일제 식민통치보다도 가혹했다.
2.28사건도 제주 4.3사건과 같이 사소한 충돌로 시작됐지만 곧 큰 충돌로 번져나갔다. 장개석은 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했다. 2.28사건의 피해자는 3만으로 추산되어, 4.3 사건보다 많지만 사건의 배경과 결말에 있어 여러모로 흡사한 비극이다.
오늘날 세인은 1951년 3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투입된 11사단(최홍희) 9연대(오익경) 3대대(한동석)에서 군경, 공무원 가족을 제외하고 양민 500여명을 통비분자로 사살하고, 대대장은 통비분자 187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국회에서 조사단을 보냈는데 계엄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1개 소대로 조사단을 습격하는 맹랑한 짓을 저질렀다. 공비가 준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거창 사건은 새로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이기붕이 수습했다. 사단장 최홍희는 중국군 출신으로 정전회담대표로도 활약했는데 나중에 북으로 넘어가 문익환과 함께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
광복군 출신으로 조선경비대 초대 사령관을 지낸 송호성도 한강교 폭파 후 납북되어 북한 정권에 복무하다가 1959년 사망하였는데 김일성은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주도록 했다.
제주도의 무장반란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이루어졌다. 정부는 반란군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주민을 해안으로 소개시켰다. 유격대에 대한 토벌은 1949년 5월에 종결되었는데 완전한 소탕은 1954년까지 끌었다.
백선엽은 지리산 공비 토벌에도 주축이 되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百尺竿頭의 조국을 구하고 평양에 선두로 입성한 백선엽은 滿軍에서의 경험으로 공비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이준식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 군인으로 규정,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유다.
지리산에 은거한 빨치산은 이태의 『남부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잘 그려져 있다. 토벌대에 쫒기는 유격대는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전교조 선생들은 학생들을 데려가 유격대의 투쟁을 미화시켰다.
그 시기 사상투쟁의 비극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은 ‘불쌍하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이렇게 길러진 兒孩들이 지금 사회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한국전쟁 1950:전쟁과 평화』라는 책을 쓴 박명림이 4.3사건에 대한 시비를 넘어 미래의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박명림의 책은 커밍스를 넘어선 역작으로 평가되지만, 1945년 9월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분단을 지시했다는 결정적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화해와 통일,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인간적이어야 한다.’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시비는 분명히 가린 위에서다. 始終과 結末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 낙동강 다부 동전투에서 북한군 전투장면
▶ 사진은 B29 폭격기가 낙동강 인민군 진지에 융단폭격 사진
▶ 낙동강 까지 밀고 내려온 북괴군
● 빨갱이
빨갱이 어원이 친일잔재라는 문재인 말은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1930년대부터 체제를 위협하는 공산당을 일본인들이 赤(아카)라고 불렀다. 일본이 급히 항복한 것은 원자폭탄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미만한 좌익의 위험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온 육사 11기생 한분은 1950년대 북한에서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하여 안기부에 촉탁으로 있으면서 이정식을 비롯하여 해방 전후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김남식이 이상하다는 문제제기에 ‘걔는 아카야’라는 한마디로 규정해버렸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스스로를 ‘붉은 군대’로 지칭했는데 러시아 혁명 이래 赤軍이라 불러온 것을 풀어 쓴 것이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을 일반적으로 reds라고 불렀다. 이를 그린 영화 「REDS」가 나왔을 정도다.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자본주의의 본산 미국에서도 1930년대 공산당이 번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이때를 그린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이래 서구 좌경 지식인이 소련을 동경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상당수 미국과 영국의 지성인들이 정부 내에도 들어가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 정부가 소련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영제국을 경영했던 처칠 수상은 막 세계제국으로 떠오른 루즈벨트 대통령에 이점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1950년 2월 맥카시 상원의원이 소련 간첩이 정부에 진을 치고 원자탄 등 최고급 정보를 소련에제공했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러한 첨단 기술 절취에 힘입어 1949년 9월 소련은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르게 원자폭탄을 갖게 된다. 미국의 원자탄 독점이 깨어지자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트루만 대통령이 즉각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천행이었다.
우리 국민에 공산주의자의 실체를 똑똑히 알려준 것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었다. 몸서리쳐지는 캄보디아의 killing field가 이때 이미 저질러졌다. 공산당의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된 국민들은 일제하 ‘아카’를 떠올려 이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대중 시절에 와서 여순 반란사건이 반란 주체와 경위를 알 수 없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바뀌어졌다.
여순 반란사건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하게 된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숨어있던 좌익이 시작한 반란이지만,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숨어있던 좌익이 가담하여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은 당시 토벌을 지휘했던 백선엽 장군이다.
여순사건으로 군내의 빨갱이가 발각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대적 숙군이 진행되었다. 숙군은 백선엽 정보국장이 주도했다. 종북 주사파가 유난히 ‘친일군인’ 백선엽 장군을 노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1949년 5월 군내에 숨어 있던 좌익 강태무 표무원이 위험을 느껴 각각 대대를 이끌고 월북했다. 이 상태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면 국군은 싸우기도 전에 붕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이다. 좌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리로 문화를 통해 역사를 왜곡한다. 특히 영화는 젊은이에 강력한 인상을 준다. 애국세력은 이에 대한 대책을 우선 강구해야 한다.
● 장관의 操身
20기보사가 홍천으로 옮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었는데 20사단이 광주사태 진압작전에 참여한 데에 대해 청와대가 시비를 걸자 문제가 터진 것 같다.
정경두 장관은 20기보사를 홍천의 11기보사로 통폐합하고 20사단을 해체하는 결정을 한 모양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장관은 이런 문제에 간여해서는 안 되며 군사문제는 합참의장과 육군 참모총장에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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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정경두 장관은 공군참모총장에서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장관에 발탁된 인물이다. 군출신 장관은 출신군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이 타군에 함부로 간여해서는 안 된다. 역대 국방장관은 육군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해·공군에 시시콜콜 간여하지 않았다. 공군 출신의 이양호 장관이나 해군 출신의 윤광웅 장관도 자제할 줄 알았다.
명저 『군인과 국가』에서 문민통제의 교리를 정립한 헌팅턴이 규정하였던 장관의 요건―군의 대변자(Military Spokesman), 기업 경영자적 역할(Business Manager), 정책 전략가(PolicyStrategist)을 국방장관은 언제고 깊이 생각해야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도량, 지혜, 통찰력, 그리고 판단력이며, 특히 주의할 것은 사령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현직의 합참의장과 참모총장에 맡겨야 한다. 앞으로 민간인이 장관으로 온다고 하면 이런 일은 장관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군 출신 장관은 그가 익숙한 군사문제에 간여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818 구도에 따르면 군령은 합참이 담당하나, 부대배치는 군정사항도 포함하기 때문에 육군본부도 관여해야 한다.
선배 장군들도 이런 일에 함부로 간여해서는 안 된다. 하려면 20사단장,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거친 이종구 장군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 연구자로서 관련사실을 소개한다. 11사단은 6.25 전쟁에서 1사단의 다부동 전투, 6사단의 용문산 전투,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았는데, 전쟁 말기 육군을 20개 사단으로 확장할 때 생긴 부대이기 때문다. 11사단은 오히려 거창 학살사건의 오명을 썼던 부대다. 물론 당시 관계자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고 현재 11사단 장병이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단장 최덕신은 정전회담 수석대표를 거쳐 군단장까지 승진하고 516 후 외무장관도 지냈다. 그 후 주 서독 대사가 되었다가 동백림 사건 처리로 정부에서 내쳐진 최덕신은 친북노선으로 기울어져 1970년대에는 북침설을 제기하다가 1986년 북한에 망명 했다. 부친 최동오가 설립한 화성의숙에 김일성(당시:김성주)이 다닌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사단은 수기사에 이어 기계화부대의 대표적 부대다. 신형 탱크가 먼저 배치되고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한다. 서울 인근에 있어 충정부대로 분류되어 사단장도 박준병, 이종구, 민병돈 등 유력한 장군들이 맡아 왔으며, 광주사태 진압에도 참가하였다.
양평 주민들은 20사단이 나가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데, 오히려 이들 부대들이 나가면 수도권의 좋은 택지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과 순서에 따라서, 그리고 관련사항을 포괄적으로 참조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미소가 머무는 시공: http://cafe.daum.net/rjfekd◆ http://cafe.daum.net/rjfekd/mmpY/12?q=625%20%EC%A0%84%EC%9F%81%EC%98%81%EC%9B%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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