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만주국의 건국과 멸망(개관)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관동군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이에 "국제연맹"(국제연합의 전신)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관동군은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장춘(만주국 당시는 신경으로 개칭),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집정"으로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를 옹립했다(1934년 푸이는 정식으로, 만주국 황제에 등극한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푸이가 만주국의 황제위에 오르면서, 제정이 수립되고, 연호역시 기존의 대동에서 강덕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만주국의 실세이며 통치자는 실제로는 관동군 사령관이었고,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도 독자적인 군대가 있었지만,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대패 당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까지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만주 전략공세작전)함으로써, 1945년 8월 18일 멸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2. 만주국이 건국하게된 배경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국가 안전보장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00년 러시아는 "의화단의 난"과 "요시카즈단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에서의 권익을 독점했다. 이것에 대항하여 일본은 영국/미국 등과 함께 만주를 각국에 개방할 것을 주장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영일 동맹). 마침내 일본은 1904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싸워 승리하였고(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요동 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의 조차권을 확보했다. 그 후 일본은 종래의 반러입장에서 선회하여,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으로 만주지배에 나서면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반발을 불렀다. 그러나 러시아가 혁명이 일어나면서, 만주에 대해 일본은 우위권을 차지했고, 특히 만주를 장악했던 장작림을 열차테러로 폭사시키고, 후계자인 장쉐량 마저 축출하면서, 만주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 되었다. 특히 1920년대 말, 세계경제위기가 미국에서 닥치면서, 이 경제난을 타계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만주개발이 요구되었고, 이로인해 일본의 관동군은 ,러일전쟁 때 20만이 죽은 이 땅을 자신들의 영토화 하려 했으나,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에다, 일본과 중국까지 가입한 9개국 조약(Nine-Power Pact)이 중국의 주권·독립·영토보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동군은 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만주와 몽골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중국의 행정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만주사변 발발 나흘 뒤인 1931년 9월 22일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좌,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만몽문제 해결책안(解決策案)"을 만들었다. 동북4성(길림·흑룡강·요녕·열하) 및 몽고를 영유해서 선통제(부의)를 우두머리로 삼는 신정권(新政權)을 수립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3. 만주국의 국가 체제 1)만주국의 초대 내각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의 민족융합 정책(이른바 샐러드 보울)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에는 오족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피해 온 백계 러시아인 등도 거주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일본의 계획적 지원 아래 극히 단기간에 발전했다. 내전이 계속되는 중국으로부터 중국인의 이동과, 한반도의 기근과 가난에서 새로운 환경을 찾는 조선인의 이주, 그리고 일본정부의 정책에 따라, 만주국의 준비된 농지로 이주하는 일본 국내인의 이민이 많았다. 이러한 이주에 의해서 만주국의 인구도 급격한 기세로 증가했다. 이민 정책의 성공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만주국이 일본에 있어서, 1930년대 일본의 경제위기를 타계할 세로운 개척지였음을 보여준다. 2) 만주국의 국가기관 a)만주국 국무원 만주국 정부는 국가원수로서 집정(執政, 후에 황제),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参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国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관동군이 관리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b)만주국의 국가원수(수반) 만주국의 국가원수(집정, 후에 황제)로 푸이가 취임했고 1937년(강덕 4년) 3월 1일 제위계승법 제정 이후에는 푸이의 남계 자손이 제위를 계승해야할 것로 여겨졌다. 또한 제위계승법이 상정한 상황 외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주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청조복벽파의 책모를 억제하고 관동군에게 황제 지명권을 확보시키기 위해서 남계 자손이 없을 때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서 제위 계승자를 정하는 칙지를 황제의 선언으로 하는 등을 내용으로 한 각서에 서명하였다. c) 역대 집정 및 황제 황제: 푸이 (임기: 1932년 ~ 1945년) d) 총리 목록 1대: 정샤오쉬 (임기: 1932년 ~ 1935년), 2대: 장징휘 (임기: 1935년 ~ 1945년) 3)만주국의 행정 1932년(대동 원년)의 건국 시에는 수상(집정제하에서는 국무원 총리, 제정 이행 후는 국무총리대신)으로 정샤오쉬가 취임했고, 1935년(강덕 2년)에는 "만주의 독립선언"을 발표한 "둥베이행정위원회 위원장 장징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제 정치 및 통치 "만주 제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 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원수는 수상과 각료를 비롯해 관리를 임명하여 관제를 정하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관동군이 실질적으로 만주국 고급 관리, 특히 일본인이 주로 취임하는 총무청장이나 각부 차장(차관) 등의 고급 관리의 임명이나 파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실제는 일본의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할 수 없었다. 또한 공무원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인을 만주국 정부의 각 행정관청의 장·차장으로 임명시켜 실권을 잡게 했다. 이것을 소위 내면 지도라고 불렀다(2키 3스케, 일본어: 二キ三スケ). 즉 만주국은 정치, 경제적으로도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껍데기뿐인 일본의 괴뢰 국가였다. 4)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자 인 2키 3스케 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는 당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5명의 일본인 실력자들에 대한 별명이다. 각자의 이름이 “키”또는 “스케”로 끝나는 것에 유래하고 있다. 그 중에도 도조 히데키는 나중에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기시 노부스케도 일본 패전 후 총리에 올랐다.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닛산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을 만들었다.
5) 만주국의 선거와 정당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에 따르면 만주국은 일원제(단원제) 의회인 입법원의 설치를 규정했지만, 선거는 단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정치 결사의 조직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협화회라고 하는 관민 일치의 유일한 정치 단체만이 존재하였고, 이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만주국 인민에게 알리거나, 국정을 지도하는 일만 수행 하는 수준이었다. 6) 만주국의 사법 제도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이나 인권보호법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법을 모방하여 법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의 일본 법과 다른 점은, 인권보호법에서 법 아래 평등을 규정한 점이다. 그리고 조직법에서는 각 각료나 합의체로서의 내각이 아니고, 수상 개인이 황제의 스텝기관(제국이니 보필이라 해야 하나)으로 여겨진 것이고, 형법의 구성 요건은 일본과 거의 같았지만, 법정형이 일본 형법보다 약간 무겁게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검찰 기구가 법원으로 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만주국 형법은 한국 전쟁 직후에 제정(1953년 9월 18일)된, 대한민국 형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7) 만주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은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일본의 무력에 의해 형성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미/일관계의 악화)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의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독립국으로 승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비시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태국(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8) 만주국의 군대 만주국에는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주둔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국의 "만주군"을 시작으로 군대가 창설되어, 황제 호위부대인 금위대과 해군,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만주국의 성격상 군대 역시 관동군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여, 관동군 지원 부대로서의 성격이 컸다. 9) 국적법의 부존재 만주국은 패망까지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의미로 "만주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은 배경으로는,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상, 만주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일본계 만주인"이 되어, 일본 국적을 포기해야 되았으므로, 만주로 유입되는 일본인의 이주민을 감소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던, 조선인 국적정책과의 일관성 문제 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0) 만주국의 스포츠 등 문화 1932년 만주국 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국기는 축구였으며, 만주국 축구협회와 만주 축구대표팀도 결성되었다. 야구에 있어서는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한 팀이 있었고, 일본 프로 야구 첫 해외 공식전으로서 1940년 만주 리그 전도 하였다. 또한 만주국은 건국 당초, 올림픽의 참가도 계획하여 1932년 5월 21일 만주국 체육협회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년 7월 개최)에 선수 파견을 정식으로 신청하였지만 참가는 할 수 없었다.(만주국은 1명의 육상 선수를 파견시키려 하였으나, 그 육상 선수는 만주국 선수로 참가를 거부하고 대신 첫 중화민국 선수로 출전하게 된다.) 참고로 만주국의 국화는 난(蘭)이었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만주국 탄생과 유산 2.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3, 김명호씨의 중국관련 기사 (중앙일보 연재) 4. 나무위키 만주국 항목 5. 이덕일 박사의 기고문(생각이 달라서 일부부분만 참고) 6. 네이버 블로그 "산풍수월" 님 엘리스님! 죄송해요, 중간에 단추를 잘못눌러 글을 날렸다가, 다시 살렸어요 ` 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onho1202&logNo=221437946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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