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送한 辛苦의 歲月 10年
사람 한平生이 어찌 順坦하랴만 내가 겪은 百謀百敗 百事不成의 人生暗黑期로 長長 十年歲月을 虛送했다. 그것도 人生의 黃金期인 40중반 부터 50초반 까지 하는 일 마다 失敗, 失望, 背信, 羞侮,,,,,왼갖 서럽고 외로움의 連續이었다.
두번째 職場에서 減員이 있어 그 對象이 내가 아닌데 어굴하게 내가 잘렸다. 職場을 잃었으니 먹고 살기 爲해 勸誘도 있고 해서 뛰어든곳이 炭鑛用坑木生産業界! 1次 石油波動으로 國內 石炭增産을 爲해 坑木의 需要가 늘었고 그 需給을 爲해 關係機關에 非常이 걸렸었다. 이 業界에서 잔뼈가 굵은 親知가 있어 同行해 보기로 했다. 집에서는 말렸지만 친구 따라 거름지고 장에 가는 心情으로 이 일에 물 들기 시작했다.
우선 立木을 確保하기 爲해 私債를 動員하여 資金을 만들었는데 當時 利子는 月3부. 지금 생각하면 年36%의 높은 利子이며 그 利子와 엄청난 費用을 감당하고 나면 빚의 累積만 더해가는 것을 利潤을 얻어보겠다고 나선것 부터 잘못이었다. 더구나 아무 것도 모르는 풋내기가,,,,,立木을 사기위해 紹介人을 通해 山主를 만나고 맞으면 契約을 한다.立木을 보고 生産量을 짐작하는 것은 전문가도 正確하지 않다. 代金도 여러 條件에 따라 定하지만 나야 선배들이 시키는데로 따랐다.
이어 許可申請을 하고 許可가 나면 每木調査를 받는다. 對象伐木과 山境界를 표시해 주며 指示한대로 伐採作業이 끝나면 生産坑木과 伐木그루터기 까지 檢印을 받는다. 이것이 끝나면 搬出證을 發給받아 驛頭까지 運搬하고 通運에서 받아 積載해준다.
이렇게 複雜한 節次와 그 節次를 거칠때마다 費用이 隨伴하고 車길이 아니면 엄청난 借地料를 줘야 하고 나무 실은 車는 檢問도 많이 받는다. 그 世界는 良心도 없는것 같고 業者를 골려먹는 人夫들의 手法도 고약했다. 가장 惡辣한 手法은 모든 計算은 材積이 基準이고 材積은 末口의 直徑을 測定하여 算出한다. 이를 위해 積載할때 末口를 前面으로 쌓아가는데 간간이 伐口를 前面에 쌓고 몽치미 같은 짧은 토막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다.
이렇게 속임수를 써 算出된 材積대로 勞賃은 받아가고 後에 輸送할 때 坑木더미를 헤쳐보면 이런 것이 發見되어 믿었던 人夫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作業途中 술, 고기 사서 現場으로 가 같이 먹으며 부탁도 했었는데,,,,,
내가 겪은 同業者끼리의 관계도 信賴할 것이 못됐다. 自己의 過誤를 덮기 위해 남을 모함하고 密告도 했다. 人夫를 사주하여 犯法을 유도해 놓고 그 人夫로 하여금 脅迫하는등 별별일을 다 겪었다. 이렇게 苦生해서 驛頭까지 나온 坑木은 大槪 中間商人에게 팔게되고 그 때 檢尺해 보면 生産地에서의 材積과 差異가 많이 나 또 損害를 봤다.
生産과 納品까지 하는 巨商이면 몰라도 零細生産者는 損害보도록 그 길이 짜여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困境에 處한 뒤의 일이다. 그래도 未練이 남아 그 길을 淸算하지 못하고 점점 그 수렁에서 沈沒直前까지 갔으니 어찌 寒心하지 않겠나? 안 될때는 귀도 얇아져 별별 사기꾼의 농간에도 잘 말려들었다. 큰兄님이 安東큰조카집에 다녀오시는 길에 어려움에 보태라고 조카가 준 돈을 양말목을 풀어서 전해 주었다.그 때 두째兄 친구라고 하는 金某氏가 古木느티나무를 契約하자고 찾아와 있었다.성화에 못이겨 그 돈을 주었더니 그 후에 消息杜絶,,,,큰조카에게 말도 못했지만 값지게 쓰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이제라도 말 하고 싶다. 사기당한 일들은 뒤에서 繼續하겠다.
厄運은 겹쳐서 온다고 했다. 財貨가 나갈때는 苦生도 至毒하게 따른다. 心身이 지쳐 있을때 엣 同療였던 c氏의 함정에 내가 또 빠졌으니 기구한 팔자라고 한탄도 많이 했으나 結局 時間이 解決해 주었다.
石炭公社 所有立木의 伐採立札에 落札한 c氏가 石公과 契約段階에서 信用上 문제로 안되기에 내 名儀로 하도록 도와달란다. 周圍의 勸告도 있고 해서 소요서류와 도장을 주었다.어리석게도 名儀만 빌려 주는데 별일이야 없겠다고 믿었으니 世上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法的責任이 내게 있음을 깨달았을때는 너무 늦었다. 발을 빼지 못해 同行하게 되었는데 실제社長 따로 있고 名儀者 따로 있는 꼴이 됐다. 또 寒心한 것은 이 契約을 擔保로 여러 곳에서 돈을 빌러썼으니 그 債權者도 現場에 와서 간섭하고 旣成高가 생겨 現金이 支給되면 먼저 가져가니 勞賃때문에 人夫들과의 충돌도 많이 생겼다.
이럴때 마다 名儀者가 이를 감당해야하고 人夫들이 노동청에 고소했기에 호출받아 심문조서도 여러번 받았다. 그뿐이 아니고 이 c氏는 ㅇㅇ금고에서 돈을 빌렀는데 그 돈을 받기 위해 금고에서 現金支給못하도록 差押해 놓았다. 이걸 풀기 위해 고생했고 , 作業進度가 늦어 石公에서 督促, 債權者들, 人夫들, 물건값, 밥값등등 四面楚歌로 눈 뜨면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나? 하는 걱정과 한숨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이런 닐이 이어지다보니 心身은 疲勞하고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아이들하고 苦生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스러웠고 아이들도 가엾게만 보여 눈물을 보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돌아 보면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층의 친구가 생겼다.모두 손 벌릴까봐 먼저 몸조심하는 것이 世上人心이기에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義理를 지키는 친구가 있었다. 平素에 도와준 情을 잊지않고 그 때 政府米(보리 혼합)1포대를 들고 왔으니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大邱로 移鄕해서 들으니 世上떠났다는 消息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안으로의 친구는 어려울때 아이들 公納金도 간간히 도와주고 慰勞를 받아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生地獄같던 石公문제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自抛自棄했더니 마음은 편해졌고 싸우던 人夫들도 내 사정을 알아 주었고 대포도 같이 마시는 사이로 변했다. 돈 찾을때 쓰는 내 도장도 債權者들이 가져갔고 나는 그 일로 부터 차츰 멀어졌다. 名儀者이기에 運輸業者, 現場監督의 勞賃등으로 노동청에 또 고소당했으나 뒤에 그들 스스로 취하 해 주었다. 그러나 現場 運輸業者가 내 三從弟에게 내 이름을 팔고 쌀을 가져간 것이 있는데 三從弟는 내 形便을 알기에 말도 없었고 大邱로 온 뒤에 그 代金條로 送金하고 지난 일의 사과와 고마움을 전했다.,,,,,,,,
해를 몇번 넘기면서 歲月이 가니 石公의 結末은 어떻게 났는지 모르게 끝은 났다. 石公문제로 苦生하고 있을때 同僚였던 c氏는 現場문제는 손을 끊고 서울에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 잔돈푼을 얻어 쓰면서 이여관 저여관 轉轉하면서 지내고 있었다.그래도 그 큰 소리는 여전했다. 그 때 流行했던 "해뜰 날"의 한구절,,,쨍하고 해뜰 날 찾아 온다고,,,나도 그 큰소리에 넘어갔지만,,,,,정말 해뜰날을 맞아 還故鄕하길 바랬다.
그 後에도 움직일때마다 成事되는 일 없이 詐欺나 當하는 不運이 繼續되었다. 石公일이 이럭 저럭 마무리 되고 부터 雜木의 時勢가 좋아 이를 求하기 위해 江原道 石項, 예미, 정선등지를 자주 간일이 있어 그 때 알게된 L氏 H氏와 現地에서 같이 다니고 심부름도 시키고 했다.
어느날 L氏에게 現金을 주고 일을 시켰더니 일은 안하고 行方을 감추어 H氏와 같이 찾아다니곤 했으며 H氏는 L氏를 비난했다.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지만 돈 잃고 背信을 미워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을 때 그 H氏가 찾아 왔다. 하는 말은 사과장사를 권하면서 現地사과 상자와 炭鑛地사과상자의 단위가 다르니 재포장해서 사과상자를 늘리고 값도 差가 많으니 장사가 된다는것.
귀가 솔깃하여 浮石과수원에 같이가 사과 사고 박스 얻어 재포장하여 실어 보내고 約束한 날 石項을 찾아가니 이것도 사과 한車 팔아먹고 行方을 감추었다.世上믿을 놈 없다더니 그 때 背信에 대한 분노는 참기 어려웠다.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강원도이고 있어 봐야 비용만 나기에 諦念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더는 안 속는다고 다짐을 했지만 어느날 잘 알고 지내던 K氏가 江原道에 좋은 林地가 있어 우선 샀다가 轉賣해도 相當한 利得이 있다고 하는 꼬임에 또 귀가 얇아 이번에야 꼭 만회해 보자는 기대로 現地에 같이 가보았다. 立木도 고루 서고 林地는 나무랄데가 없어서 K氏를 믿고 契約金을 주었다. 1차 殘金을 주어야할 期日이 되자 K氏가 電話로 잘못 샀단다.
문제가 있어 伐採할 수 없는 林野이고 그 當事者는 行方을 모른다고!,,,K氏의 人品을 믿었는데 故意든 아니든 背信의 쓴맛을 또 보았다. 1차 殘金까지 받아 먹고 가지 않는것만 多幸으로 알고 또 諦念했다. 賭博에 빠진 사람의 心情이 이런 것이리라...설마 이번엔 이번엔 하다가,,,,,,,,,,,,,,,
이렇게 속고만 살고 百事不成의 歲月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오니 周圍사람 보기 부끄럽고 蔑視하는듯 해서 괴로왔다. 故鄕에 가보면 그래도 兄들이 따뜻하게 감싸주는 품이 고마왔고 서러운 눈물도 흘렀지만 마음은 편했고 家族은 永遠히 내 便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큰딸이 結婚을 했는데 當日 기념품만 주고 말자고 하니 두째兄이 그럴 수 없다고 손수 쌀을 가지고 오셔서 点心은 비빔밥으로 집에서 했다. 婚需費用은 큰딸이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푼푼이 모은돈으로 치루었고 한 푼 보태주지 못한 나의 洋服까지 해 주어 염치없었고 지금도 미안한 생각 감출 수 없다.
큰 딸 보내고 榮州로 잠시 옮겨 전문학생을 상대로 下宿을 하다가 그만 두고 안사람은 막내딸 대리고 아들의 학교근처인 大邱로 떠났고 나도 집 팔고 빚 잔치를 했는데 혈육의 債務는 後順位로 미루어 해결했고, 元金,利子악착같이 받아간 사람, 元金만 받는 사람, 元金도 抛棄하는 사람,,,人心도 가지가지였다. 職場따라 와서 28年을 살았던 百事不成의 恨많은 奉化를 떠나 大邱로 왔다.
10年의 暗黑같던 辛苦의 歲月도 끝이 난 줄 알았는데 우연히 꿀벌을 치는 친구를 만났는데 놀고 있지 말고 꿀벌을 해보라고 하기에 또 마음이 변하여 꿀벌 7통을 사서 같이 하게 됐다. 꽃철에 텐트 치고 녹음속에 지내는 浪漫같은 것만 생각했지 꿀벌도 生物인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몰랐다.
榮州에서 기르고 있었기에 寄宿은 큰질녀가 맡아 주었고 질서인 禹서방이 배푸는 따뜻한 人情에 편히 지냈으며,지금도 먼저 저 世上에 간 禹서방이 그립고 아쉽다. 사과꽃꿀과 아카시아꿀 까지 採取해 봤고 꿀은 작은 질녀 李실이 팔아 주었다. 여름 가을은 벌에 양식을 넣어 주어야하고 또 말벌의 奇襲도 받아 現場에 늘 있어야 옳은데 大邱서 來往하다보니 그 管理가 疎忽했다. 권유하던 친구의 짐을 언제까지나 지울 수 없어 벌통을 杜洞 작은 생질집에 맡기고 손을 털었다.
집사람 보기 정말 面目이 없어 大邱에서 일감을 찾아 나선것이 道廳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構內프린트사 筆耕士로 몇달 있다가 同鄕 親知의 周旋으로 나간 새職場에서 魔鬼에 홀린듯 했던 暗黑의 긴 歲月을 反趨하면서 13年을 열심히 勤務하고 물러 났다.
그 13年은 無에서 有를 創造한 生涯에 가장 값진 歲月이었고 또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決心과 사랑으로 뭉친 家族의 힘이 있었기에 可能했다. 아내의 勇斷으로 大邱에 온 것은 人生末年에 큰 幸運을 잡은 것이라고 恒常 感謝했다. 그리고 客地에서 人生길의 轉換을 열어 준 同鄕 親知의 고마움은 生을 다할때 까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됨이 사람의 道理다
긴 歲月동안 自己良心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一時的 작은 利得을 챙긴 그 사람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것도 아니다. 不幸한 人生末路에서 彷徨하다가 먼저 世上을 떠났음이 大部分이다.
明心寶鑒에 나쁜 마음이 가득하면 하늘이 반드시 벌한다 (惡罐 若滿 天必誅之)고 했다,
2008, 6, 8 (端午節에) 들길 벗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八旬을 맞는 날에....... (0) | 2009.03.29 |
---|---|
우리 집 世系要約....屛風用 (0) | 2008.07.13 |
乘用車를 없애던 날에 (0) | 2008.05.21 |
18世諱 師德 墓碑文 (0) | 2008.05.14 |
17世諱 訥 墓碑文 (0) | 2008.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