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八旬을 맞는 날에.......

bsk5865 2009. 3. 29. 22:11

八旬을 맞는 날에.......(옛일을 그리며)

 

변해가는 세정에 따라 살다보니 1년에 4번 (설, 추석 ,내외생일) 가족이 모이는 날이지만 아들 내외가 집안일 때문에 못 오고 대구에 있는 두 딸 식구만 이 날을 위해 같이 모이게 됐다.

 

생일은 늘 직장 때문에 일요일로 미루어 지냈지만 올해는 일요일이 생일날이기에 미루는 일 없이 드물게 제 날에 팔순을 맞게 되었다. 이런 것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몇해전만 해도 결혼 50주년을 기해 대소가 식구들의 모임을 계획하다가 그만 둔 일도 있고 해서 팔순에는 꼭 생애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을 나누고 팔남매가 자란 우리 집의 우의를 다지는 좋은 계기를 만들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아홉수 (79살)인 작년에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과 같은 뼈마디 까지 아픈 깊은 상처를 입은 일로 하여금 이렇게 먹었던 마음을 모두 지워 버렸다.  온 가족이 기쁘고 좋은 날을 맞아 함께 모여본다는 것은 내 생애엔 없을것 같다.  지난날 남이 우러러 불러주던  "장곡어른 집"....그 후광도 이젠 퇴색의 안개로 가려져 가는 것일까........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내 생일이 어머니 생신과 같은 날이기에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고 보고 싶은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인지상정인듯 하다. 네째 아들인 내가 팔순이면  어머니는 121살에 든다. 40대에 나를 낳으셨고 4년뒤에 내 동생이 태어났다. 농촌의 그 험하고 힘드는 일을 하시면서 8남매를 키우셨다. 지금을 사는 세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촌인 "부랭이"에 부모형제들이 구존했을때의 이날 아침은 통상 온 식구가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했다. 그 많은 식구가 모였으니 가이 잔치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의 생활은 천수답이 대부분인 농사에만 의존했고,  그 외의 수입이란 고작 장작(땔감)을 만들어  봉화까지 지고 가서 파는 일이었다. 장날엔 지게에 땔감을 보기좋게 다듬어 지고 온 나무꾼들이 도로변에 즐비했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큰 고역인가?  더구나 아직 겨울인데...장작 한짐 지고 20리길...사그막골 가파른 고개를 너머야한다. 그래도 며칠전 부터 그 먼길을 내왕하시면서 위로 형들이 여러 날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 생신상을 차렸고 나는 그 덕으로 생일날을 남부럽지 않게 지냈다. 여러 날 고생한 형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들 처지인데도....이것도 타고 난 운일까?

그 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고기 반찬은 "말뚝 상어"였기에 생신상에는 그 반찬을 거르지 않았다. 위로 3형제가 분가했을 때는 점심, 저녁을 이집 저집 다니면서 차린 생신상을 받곤했다.

그 고향엔 지금도 아침에 동내어른들을 초청해서 생신상을 같이 받도록 해 드리거나 따로 불러서 차린음식을 나누는 아름다운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바뀌어 그런 풍경은 볼 수 없는 세상으로 바뀌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해 정월이 어머니 환갑이었는데 환갑잔치를 못하도록 그렇게도 극구 만류하시더니 그 해 섣달 열하룻날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마도 집안의 큰 부담이 될일이 곧 생길것임을 예감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날은 술 한독과 준비된 술안주가 있어 동내분들을 모시고 같이 이날을 보냈다.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 있는것은 봉성 李憲宰아저씨 (이정상 선친)가 오셔서 아버지와 사랑방에서 환담을 나누시면서 破顔大笑(파안대소)하시던 모습이다. 그 아저씨와는 의형제로 지내셨고 우리 아랫 대에서도 그 세의를 이어받아  이 정상형제와는 지금도 呼兄呼弟(호형호제)하고 지낸다.

 

아버지는 회갑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회갑잔치도 옳게 못했으니 우린 한많은 불효자식인가 보다. 8남매를 키우셨는데.........

 

 내가 취직하고 봉화에 나가 살게 되었을 때는 해마다는 아니었지만  생신상을 자주 차려 드렸다. 늘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봉화에 나와 있는 내 현실이  별로 여유가 없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였다.

 

모두 전날에 오셔서 하룻밤 같이 지내고 온 가족과 생신상을 같이 받아 화기애애 환담 나누시며 드시던 그 때가 행복했다. 지금 생각하니 받는 기쁨보다 드리는 기쁨이 더 크게 느껴지고 그렇기에 베풀고 산다는 것이 인간이 지닐 가장 큰 소중한 보람이요, 행복인것 같다.

 

 그 시절 봉화에서는 보기 드문 양옥형의 집을 면소골에 장만했다.

그 때 면소골 고택을 관리하던 친구가 떠나게 돼 그 집을 양도 받았고 수리해서 이사할 참이었는데 양옥형의 집을 지은 분이 면소골 고택과 교환하자고 간청하기에 교환해 준것이다.  

새 집에 이사하고 입택을 겸해서 차렸던 생신날에는 두동누님들, 생질녀들도 같이 모였다. 생신날 아침 어머니의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잊혀지지 않아 특히 오늘은 왠일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젠 별수없이 나도 늙었나보다.....어머니 가신지 30년! 이 30년은 나 홀로 새일상을 받은 셈이다.

 

그 땐 아직 연탄을 쓰던 때였다.  새집이기에 건조하면서 빈틈이 생겨서인지 생질녀들이 자던 방에 연탄까스 가 새어 나와  가벼운 중독현상이 일어나 혼이 났다. ....

 

일찍 알고 공기소통하고 약 먹고해서 가볍게 끝이나 정말 불행중 다행이었으며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다.

 

 지금도 젊었을때 28년을 살았던 봉화가 그립고 그 때 겪었던 일들을 주위가 생소하고 고적한 대구살이 2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그리워한다. 넉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껏 기를 펴고 살았을 때였으니까.....

 

 내 가족의 큰 기둥 같이 든든한 맏사위 손서방 내외가 우리를 태워가려고 왔다. 가는 차안에서 서울로 갖 출가한 외손녀의  팔순축하전화를 받았다. 기특했다. 어릴 때 같이한 추억도 많고 우리를 기쁘게 해준 보물이었지....일 때문에 오늘 불참한 아들 내외도 전화로 인사를 받았다.

예약한 경산에 있는 '부천성' 중국음식점에 막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신혼의 티를 겨우 벗어난듯 한데 어느새  4인가족이 됐다.  지금은 부모의 주변을 살펴 걱정해 주는 자식으로서의  김서방 내외가 고맙고  대견하다.  우리 인생의 끝맺임도 잘한 셈이다.

 딸 자매의 식구와 같이 격식을 갖춘 중국식 점심접대와 축하선물로 준비한듯한 금품을 받았다.

 

이 금품의 소비방도는 생각중이나 아직 마음에 내키는 것은 없으며 팔순행사는 이렇게 끝나고 각기 생활로 돌아갔다.

 

 80세를 내딛는 이날 겨울가뭄끝에 비가 내렸다. 가물다가 오는 단비인지 황혼인생의 덧 없음을 알려주는 궂은비인지 모르겠다.  왜 그런지 처량하게도 느껴졌다. 10년후면 9순인데 거기까지 생각해 본다면 과욕이겠지. 인생이란 알수 없는 것이지만 건강에 자신이 없다. 선천적으로 약골로 태어났으니까.....

 

나이 80에 들었다고 세상이야 달라질게 하나도 없지만 어디 마음 한구석엔 나날이 가까히 닦아오는 세상 하직할 날에 대한 허무한 생각들을 떨칠  수 가 없었다. 이젠 모든것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를 즐기며 곱게 살아가야겠다.

 90고령의 어느 스님의 글이 오늘 내 심정을 말해 주는듯 하다.

 

毁吾吾何損.....나를 헐뜯는다고 무슨 손해를 보며

 譽吾吾何益.....나를 칭찬한다고 무슨 이익이 되나

 歸臥東山下.....돌아와 뒷동산 아래 누워 보니

 明月滿空庭.....밝은 달빛만 빈뜰에 가득하네.

              ...2009,2,22,(음1,28,)...八旬날에.  (들길 벗)

 

 

                                                

           

 

'回顧輯草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긋난 人生길  (0) 2009.10.02
동구노인대학에 복학하고  (0) 2009.10.02
우리 집 世系要約....屛風用  (0) 2008.07.13
虛送한 辛苦의 歲月 10年  (0) 2008.06.07
乘用車를 없애던 날에  (0) 200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