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07일 일요일, 오전 08시 00분 01초 +0900 |
♣ 대관령 이야기 ♣재미가있어 보내드림니다......
이는 이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를 두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밤나무 꽃
6월은 녹음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밤꽃의 계절입니다.
도시를 벗어나 교외로 조금만 나가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배를 주렸던 지도자가 유실수를 독려하는 정책 때문에
우리나라 산야에는 유난히 밤나무가 많습니다.
6월 초부터 피는 밤꽃 향기는 특이한 냄새를 풍겨 구설수에 종종 오르곤하는데,
옛날에는 남자들의 정액 냄새와 비슷한 이 냄새를 '양향(陽香)'이라 하여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였습니다.
서양에서도 밤꽃 향기는 남자의 향기에 비유되었습니다.
평소 새침하던 여인도 밤나무 숲을 함께 산책하면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남성적인
밤꽃 향기에 취해서 그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섹슈얼리티를 간직하고 있는 밤꽃 향기와 함께
밤나무에 얽힌 옛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과 함께 들어가 봅시다.
▲ 대관령 표지석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지금으로부터 380년 전. '혼인으로 부부의연을 맺었지만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큰 인물이 될 때까지 부부관계를 잠시 접고
나는 친정에 가서 그림 공부나 하며 서방님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기다릴 테니
서방님은 한양에 올라가서 공부나 하시도록 하세요'라는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공부하러간 이공(李公)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아내와 떨어져 공부에 전념하던 선비는
꽃같이 예쁜 아내가 보고 싶어 아내와의 10년 약속을 어기고 처가 집을찾아가는 길.
강원도 대화(평창)의 한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 서울에서 한나절도 못되는 두어시간 거리이지만
그때 그 시절 강릉을 오가는 선비들은 대화나 진부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흔 아홉 구비 대관령을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매달고
걸어서 넘어야 했다.
한양에서부터 몇날 며칠을 걸어 양주땅 두물머리, 양평, 횡성을 거쳐
대화까지 왔으니 노독이 쌓여 곤한 잠에 떨어진 밤.
주막집 울타리에 심어져 있는 댓잎이 스산한 가을바람에 사각거리고
짝 잃은 귀뚜라미 애달프게 울어 에는 밤.
교교한 달빛이 스며드는 야심한 밤에 주안상을 받쳐들고
댓돌위에 신발 벗는 소리와 함께 장지문을 여는 여인이 있었다.
▲ 대관령 옛길 표지석 |
"게 누구냐?"
"주막집 아낙이옵니다."
달빛에 비치는 여인을 바라보니 틀림없는 주막집 여인이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 주막을 찾아들었을 때
수려한 인물에 여염집 여인 같은 단아한 자태가 이런 시골구석 주막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구나 하고 눈여겨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인고?"
"선비님의 인품이 하도 고고하여 약주 한 잔 올리려고 하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는 자세가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여인의 자태에서 양반집 규수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오른쪽으로 여민 말기의 품새로 보아 처녀는 아닌 듯 싶고
비록 치마로 하체를 감쌌지만 들이쉰 숨을 아래로 내려
음기(陰氣)를 아래로 모은 뒤 깊이 빨아들이는 마음으로
더 깊은 아래로 흘려 내리는 훈련을 한 걸음걸이로 보아
여염집 아낙은 아닌 듯싶기도 하다.
"허허허, 네 뜻이 그러하다면 술을 따르거라."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지만
선비의 얼굴은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되고 있었다.
다소곳이 절을 올린 아낙이 살포시 일어나 교방 탁자 넘어
구석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문고를 안아 가져온다.
그 옆에 걸려 있던 선비의 의관(衣冠)이 백색 도포에 남색 띠인 것으로 보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청색 도포에 자색(紫色) 띠를 추구하는
선비임을 알 수 있었다.
▲ 대관령 옛 주막터 자리에 그려져 있는 주막 그림 |
섬섬옥수(纖纖玉手) 여인의 오른손이 술대를 쥐고 허공을 가르더니만
거문고가 팅~ 통~ 탱~ 울어댄다.
고치에서 비단을 뽑아내듯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향(音響)이 가야금이라면
밤나무로 뒷받침대를 하고 오동나무로 울림통을 한 거문고는
음양(陰陽)이 교합할 때 들려오는 교성(嬌聲)처럼 잦아들다
솟구쳐 오르고 솟구치다 잦아드는 음색(音色)이 황홀하고 열락(悅樂)적이다.
"받으시오 / 받으시오 / 이 술 한 잔 받으시오 /
공자님을 어제 뵌 듯 / 맹자님을 오늘 뵌 듯 /
고금이치 통달하신 / 도학군자 선비님께 /
정을 담아 바치오니 / 잡으시오 / 잡으시오 / 이 술 한 잔 잡으시오."
붉은 입술에 흰 이와 윤기 흐르는 귀밑머리에 복숭아 빛 얼굴.
이러한 여인을 단순호치(丹脣皓齒)와 녹빈홍안(綠嬪紅顔)의 미인이라 했던가.
이러한 미인이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권주가와 함께 잔을 채운다.
부드러운 여인의 손에 들려 있던 호리병에서 흘러나온 송화주가
선비의 입을 통하여 몸 속에 흐르자 짜르르~ 술기운이 전해져 ?
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닌 '??두깨'라고 이게 무슨 횡잰가?
야심한 밤에 술과 여자라. 회가 동하지만 신분이 뚜렷하지 않은 여인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거늘 경계할 수밖에.
▲ 대관령에 있는 주막터 표지 |
"그래, 무슨 사연이라도 있느냐?
"선비님과 하룻밤 가연 맺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가연(佳緣). 요샛말로 표현하면 같이 자자는 것이고
더 노골적으로 '까발겨서' 해석하면 섹스를 하자는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섹스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 시절 아녀자가 그것도 야심한 밤에 남정네의 방에 들어와 그러한 말을 하니
듣는 사람, 선비가 놀라 자빠질 일이었으나
촉촉이 젖은 그 여인의 검은 눈망울은 그 무엇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달빛은 교교한 이 야심한 밤에
여인이 스스로 찾아들어와 겨드랑이가 깊이 파인
도련의 연분홍 항라 저고리를 벗으며
모란 무늬가 은은한 갑사 치마끈을 풀며 품속으로 파고들어오니
아무리 선비의 체통이 군자의 뜻을 좇는다 해도 갈등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지게문 사이로 새 들어오는 달빛에 여인의 우유빛 속살이 눈부시다.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어깨선이 상아를 깎아 내린 듯 유난히 아름답다.
아직은 다 벗어 내리지 않았지만 치마의
말기 속에 반쯤 드러난 젖무덤이 터질 듯이 솟아 있다.
호리병을 두 손에 받쳐들고 술을 따를 때에는
봉긋한 젖무덤이 선비의 팔 굽을 스친다.
바람이 분다.
향탁에선 연향(戀香)이 타오르고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지촉등불이 살랑거린다.
흔들리는 불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불그스레 물들어 있고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온다.
촉촉이 젖어 있는 여인의 두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만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분꽃씨 같은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떠있는 한 조각 편주(片舟)처럼
흰자위에 두둥실 떠 있다.
▲ 물방앗간 |
멍! 멍! 멍!
구름에 달 가듯이 달에 구름 가듯이 밤하늘에 흐르는 달그림자를 보고
놀랐는가?
동구 밖 물방앗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랫마을 돌쇠와
작년에 서방을 여읜 과부댁을 보고 컹컹대는가?
이때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온다.
아궁이에 군불 지피다 남은 솔가지가 타닥거린다.
여인이 나비 등잔불을 끈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또 다시 적막이 흐른다.
여자를 품에 안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7년 전 한양으로 공부하러 떠나올 때 어른들과 아랫것들 시선 때문에
문 밖까지 배웅도 못하고 사랑채 문간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던 아내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아서라, 선비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선비님 너무 하시옵니다.
흑~흑~흑~."
봉긋한 젖망울까지 풀어헤쳤던 여인이 저고리 옷고름을 여미며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지게문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이 여인의 어깨 위에 푸르게 부서지며흘러내린다.
댓잎 스치던 밤바람이 일렁이며 툭 하고 밤송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건만
어깨 위에 일렁이던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도 난감할 수밖에….
"주안상을 물리고 지필묵을 들여라."
다 마시지 못한 주안상을 치우고 붓과 벼루와
청자빛이 영롱한 연적을 받쳐들고 들어온 여인은 화선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의아한 눈길로 선비가 바라보자 갑사 치마끈을 풀어 선비 앞에 펼쳐놓는다.
벼루에 먹을 갈던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만 벼루에 떨어진다.
흐느낌을 감추려는 듯 여인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선비가 붓을 들어 먹물을 찍자 속곳차림에
선비의 방을 나서는 여인의 뒷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鏡花水月 거울에 비친 꽃이요 수면위에 떠있는 달이로다
▲ 그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배롱나무. 강릉에 있습니다. |
이튿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휘호를 치마에 남겨두고
동창이 밝을 무렵 주막집을 나선 선비는 장평, 진부를 지나
아흔 아홉 구비 대관령을 넘어 해질 무렵에 처갓집에 도착하였다.
얼마만에 찾은 처갓집인가?
7년 전 떠나올 때 마당에 심은 배롱나무가 몰라보게 자랐지만
아내의 모습은 새색시 그대로 고운 모습이었다.
1삭(한달)을 처갓집에 머무르며 쌓였던 회포도 풀고
아내와의 운우(雲雨)의 정을 푼 선비는 과거시험 때문에 다시 처갓집을 떠나
한양 길을 나섰다. 대관령 굽이굽이 휘돌아 고갯길을 터벅터벅 걸어내려오면서
주막집 그 여인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었다.
다른 주막에서 묵을 수도 있지만 대화 그 주막에서 다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 대관령 고갯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옛길. 대나무 숲길이 선비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이 길을 통해서 신사임당도 영마루를 넘었으며
율곡 이이(李耳)도 대관령을 넘었을 것이고
강릉에서 태어나 열네 살 고운 나이에 경기도 광주로 시집간 허난설헌도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며.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황진이도
인생의 허무를 느껴 관서팔경과 지달산(금강산)을 유람하고
관동팔경을 섭렵한 다음에 단양팔경을 구경하기 위하여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당돌하게도 그러한 청을 들인 게 무슨 연유이더냐?"
주안상을 마주 놓고 그 여인에게 선비가 물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어 주막을 열어 먹고사는 무지렁이이오나
사람을 많이 보아온 탓에 지나는 과객의 기색을 살필 줄 아옵니다."
"기색(氣色)이라…? 그래, 내 기색이 어떴드냐?"
"그날 선비님의 안색에 서기(瑞氣)가 서린 것을 보고
귀한 자식 하나 얻어 볼까 하는 마음에 아녀자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하였습니다."
"오호,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오늘밤에 이루지 못한 운우의 정을 풀어보자꾸나."
이래서 남자는 도둑놈이라 하는가? 늑대라 하는가?
처가 집에서 실컷 아내와 배꼽 맞추기를 하고 나선 사람이 줄 때는 안 먹고
이제 먹자하니 이런 고얀 일이 있는고.
"지금은 아니돼옵니다. 그때는 선비님의 안색에 그러한 서기가 넘쳐났으나
지금은 그 서기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오라
이미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미천한 계집이 몸만 더럽힐까 하옵니다."
여인의 말은 당차고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헤벌래 하고 기다리던 선비도 정신이 바짝 들며
싸하게 퍼지던 술기운도 싹 깨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사내아이로서 인시(寅時)에 태어날 것이며
일곱 살 되던 해에 호환(虎患)이 두렵사옵니다."
다소곳이 치마폭에 무릎을 접은 여인의 입에서 예사롭지 않은 말이튀어나온다.
이게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기(誣欺)인가?
하늘의 뜻을 전하는 천기누설(天氣漏泄)인가?
이제야 정신을 바짝 차린 선비는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호환(虎患)을 막을 방도를 물었다.
호환(虎患)이 무엇이더냐?
호랑이에 물려가는 것으로서 애, 어른을 막론하고 호환을 당하는 것은
공포감을 느끼는 무서운 일로서 선비 집안에서는 치욕으로 생각했다. .
조상 모시는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을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속설(俗說)이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호랭이 물어갈 놈'이라는 욕설이 있겠는가.
▲ 대관령 옛길 표지석 |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으면 그 화(禍)를 면할 것이외다.
또한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 낯모르는 스님이 찾아와
아이를 보자 하거든 절대 보여주지 말고 밤나무를 보여 주소서."
한양에 도착한 선비는 밤나무를 심으라는 그 여인의 말이 머리를 맴돌아
과거공부가 되지 않았다.
밤나무가 무엇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밤나무는 죽어서 신주(神主)가 되어
가문의 영광을 이끌어주며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신성(神聖)한 나무이기에 밤나무를 심는 것은
덕(德)을 쌓는 것이다.
과거 공부하던 선비는 고향 파주에 되돌아가 친정(강릉)에서
사내아이를 낳아 3살까지 기른 후 시댁에 와 있던 아내에게 전후 사정을
말하고 고향집에 천 그루의 밤나무를 정성들여 심었다.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
대화 주막집 여인의 말대로 어느 날 열반산(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노(老)스님이 갈포 장삼에 굴갓을 쓰고 찾아와
'이 고을에 나라의 재목이 될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노라'며
아이를 보자 하기에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며 호통치고
밤나무를 가리키니 밤나무 숫자를 세고 있지 않은가.
▲ 굴갓 |
하나, 둘, 셋. 이렇게 세어가던 밤나무 숫자가 999에서 멈췄다.
소를 매놨던 밤나무 한 그루가 그만 말라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명(天命)을 거역하려느냐?"
진노한 노스님이 하얗게 흘러내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통을 치자,
"나도 밤나무…."
소리치며 나서는 나무가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스님이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호환(虎患)을 면한 아이가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耳)이며
선비는 율곡의 아버지 감찰공 이원수(李元秀)이고 임신한 여인은
우리의 영원한 현모양처의 표상 신사임당(申師任堂)이시다.
율곡이 자란 파주에는 '나도 밤나무'가 있었다는데
율곡을 살려냈다 하여 활인수(活人樹)라 하고 .
그 나무가 있던 고개를 율목치(栗木峙) 또는 밤나무 재라 부르며
동네이름도 율목리(栗木里)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고 파주시청 문화관광과 문화재 담당관은 파평면
율곡리(栗谷里)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였다..
그냥 아름답게 윤색 된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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