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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 적진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때 함흥-원산해안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흥남항에 집결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5,000여명, 차량이 1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여톤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하여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영웅적인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철수도 병행되었습니다.
교두보 밖에 중공군이 몰려들기는 하였지만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호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력 대부분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허물어져 내렸고 남은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중공격으로 만들어진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흥남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습니다. 아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방책이 사실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평양철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남북 간의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여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던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합니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해상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알몬드는 최초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으나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부두지역으로 쇄도하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선편이 닿는 데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극적인 조치로 98,000여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철수작전이었습니다. 때문에 흥남철수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구출되지 못하고 흥남 일대에 남아있는 피난민도 이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당시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래가 없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폭격 덕분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시 보다도 70퍼센트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나면서 파괴되는 흥남항]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려간 아군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남으로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북진은 불과 25일만 달콤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은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로 전쟁의 종결을 희망한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http://koreanwar60.tistory.com 국방부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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