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 - 1부

bsk5865 2012. 6. 24. 08:49

시사기획[최·박의 시사토크 판]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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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박의 시사토크 '판'] 113회

18일 시사토크 판에서는 1987년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폭파한 김현희씨가 출연했다. 그동안 정부의 보호 아래 몇 차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지만, TV토크쇼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AL기 폭파 25주년을 맞아 유가족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밝힌 김현희씨는 자신이 북한 공작원으로 뽑혀 8년 동안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당시 상황과 교육 내용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이하 방송 인터뷰 내용)

Q. 얼마만의 TV 출연이십니까?
A. 결혼 후 처음이니까 15년 만에 국내방송에 처음 출연하게 됐습니다.

Q. 97년에 결혼하셨죠?
A. 네. 먼저 처음부터 국내방송에 출연하게 된 기회에 KAL기 폭파가 25주년이 됩니다. KAL기 폭파로 돌아가신 분과 유가족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 번 깊이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Q.97년 결혼, 그 이후 생활
97년에 결혼하고 사회, 정치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조용히 시골에서 참회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갑자기 좌파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그런 행상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지나갔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본격적으로 저를 두고 ‘가짜몰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늘 북한테러 때문에 경찰이 보호하고 있거든요. 보호하고 있고, 그게 가장 보안사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MBC가 습격해서 노출을 시켰습니다. 이어서, SBS도 오고 다 취재해서 방송 노출이 돼서 쫓겨났습니다. 한 밤 중에 아이들이 한 살, 세 살인데 젖 먹는 아이들을 업고 한밤중에 쫓겨났죠. 당장 갈 곳이 없으니 피난생활을 한 거죠.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서 피난생활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후에는 방송 되는 걸 보니 모든 걸 가짜로 몰고 방송3사가 편파방송을 합니다.

Q. 성장과정
A. 62년에 태어났고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은 쿠바에서 지냈습니다. 쿠바에서 4~5년 지내고 북한에 돌아와서 인민학교, 중학교 등 과정을 거쳤고 중상층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Q. 공작원 선발 경위
A. 평양외대 일본어과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외교관이셔서 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Q.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A.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 <딸의 심정>에 출연했습니다. 촬영소에서 와서 선발해서 아역배우로 했는데 그 후에도 다른 촬영을 하려는 섭외가 왔죠. 그런데 아버지가 그때만 해도 연예인을 싫어해서 반대하셔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쪽으로 갔죠.

Q. 공작원 선발 배경
A. 각 학급에 한명씩 학과실로 오래요. 면접을 봅니다. 인물심사죠. 여러 가지 물어보고 한창 유행하는 김정일에 대해서 덕성실기를 이야기해보라고 하고 면접을 봅니다. 뭔지 몰랐습니다. 당 조직에서 와서 심사를 한다는 것만 느꼈습니다. 그 후 80년 3월, 2학년에 갑자기 벤츠를 탄 중앙당  직원이 와서 사로청 조직에 적을 떼고 짐을 싸게 했고, 친구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선생님께만 인사하고 바로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딸을 잘 키워서 당에서 쓰게 됐다’고 ‘내일 아침에 올 테니 가족들과 인사를 하라’고 하고 떠나게 됐습니다.

Q. 공작원으로 선발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A. 저를 태우고 산 속 초대소에 가서 내렸습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구호판이 모두 대남사업과 관련된 교시였습니다.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사명을 다해야겠다’는 대남 관련 교시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대남공작에 왔구나’ 알게 됐습니다.

Q. 8년 동안의 공작원 교육 과정
A. 들어가면서 ‘김옥화’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서 바로 금성정치군사대학이라고 지금은 김정일군사정치대학인데 금성이 김일성을 칭하는 겁니다. 거기 입학을 해서 그 학교는 공작원 육성학교입니다. 간첩 교육기관이죠. 평양시 근교에 있는 넓은 산 속에 줄기줄기 연결된 곳에서 밀봉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두세 명씩 밀봉교육을 시키는데 강의실에 10명 정도가 들어가서 강의를 받을 때도 일체 얼굴, 음성 노출하면 안 되고 닭장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토론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노출 안 시키고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면 안 되고 서로에 대해 물으면 안 되는 게 생활 원칙이었습니다. 거기서 배운 건 첫째로, 사상적으로 대남 혁명, 남조선 혁명을 배웠고 남조선 혁명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사상 교육과 투철한 임무수행을 위한 자결정신을 배웠습니다. 임무수행을 하다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당 수령을 위해 가차 없이 자폭을 하는거죠. 수령님과 비밀을 지키기 위한 정신교육을 받았고, 육체적인 단련도 받았죠. 모래 배낭을 메고 산악 행군을 하고 격술, 수영 등을 배웠고 사격 연습...

Q. 납치된 일본인, 다쿠치 야에코(리은혜)
A. 그 훈련이 끝나고 바로 일본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에서 다쿠치 야에코를 만나서 2년 간 같이 생활하면서 저를 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입니다. 언어 뿐 아니라 일본의 풍습, 역사지리, 사회생활 모든 것을 습득해서 어떻게 하면 일본인으로 위장하는지 훈련을 받았습니다. 한국말 쓰지 않았고 모든 걸 일본어로 했습니다. 다쿠치가 평가하기에도 ‘일본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 같다’고 했습니다. 일본어를 배운 게 공작원으로 선발된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다쿠치 야에코에게 들은 납치 일본인 현황
A. 그 분야는 모든 게 비밀에 속해있습니다. 자기 것을 말하지 말며 남의 것 묻지도 말며 그게 비밀 원칙입니다. 다쿠치도 상당히 와서 몇 년 있고 한 교육을 받아서 서로가 말을 안했습니다. 저는 일체 말을 안했습니다. 다쿠치는 자본주의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이기 때문에 친 자매처럼 24시간 2년 내내 붙어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고 헤이해지면 자기 집안 이야기도 하고 아이가 보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Q. 공범 김승일과의 만남
A. 일본인화 교육 중국인화 교육을 시작됐습니다. 중국인화 교육을 일본에서 납치해 온 공영앵이라는 중국여자하고 만나서 중국인화 교육을 시작했는데, 84년에 임무가 생겼다고 김승일(폭파 공범)과 한 조가 되어서 다른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유럽을 가서 프랑스에서 김승일은 남한에 들어왔고, 같이 들어올가 했는데 처음이고 일본위조 여권이고 남한에 들어오는 걸 북한에서 가장 어렵게 생각하거든요. 해외 자본주의 실습하며 여기까지 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Q. KAL기 폭파 임무를 부여받은 시점은
마카오까지 가서 실습 끝내고 들어왔습니다. 당시 마카오에서 중국에서 넘어온 신분증 첩보가 있었습니다. 신분증 취득이 공작원에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매일 지하로 다닐 수 없잖아요. 신분증 획득 위해서 중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만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들어오니, 김승일과 배합했고 KAL기 폭파 임무를 받았습니다.

Q. 임무를 받았을 때 기분
A. 공작원은 남조선 혁명과 통일을 위해 7년 8개월을 훈련만 했습니다. 그래서 임무를 받을 대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와서 김승일과 함께 임무를 부여받을 때 부장이 직접 나와서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남조선에 타격을 주기 위해 비행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그전부터 많이 애를 썼죠. 결국 안되니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 같은데 그 임무를 받는 순간에는 첫 임무 치고 큰 임무여서 불안과 긴장이 됐고, 당에서 얼마나 저를 신임해서 큰 임무를 주는지 감격스럽기도 하고. 과연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김승일이라는 노련한 공작원이 있고, 거기에 저는 보조역이고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공작 임무가 나섰는데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일본인 위장 교육으로 준비 돼 있었고, 김승일도 일본 말을 잘 하니까. 김승일의 경우에는 그 전에도 남한에 들어오기 위해서 일본에 있는 실제인물 ‘하치야 신이치’ 여권을 그대로 도용했죠. 위장하기 좋고, 저도 준비돼있으니 우리를 같이 배합했고 부녀지간으로 북한이 임무를 주었죠.  

Q. ‘비행기를 재끼라’고 했을 때 기뻤나요?
A. 기쁘다기보다 내가 신임을 받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감정, 인간성이 마비된 상태인거죠. 북한 전체가 다 그렇지만 공작원은 더합니다. 오로지 인간폭탄이 되어 내 몸을 받쳐 수행해야하는 게 공작원입니다. 당을 절대적이고 신과 같기에 의심을 받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게 공작원입니다.

Q. 친필비준?
A. 제가 직접 받는 게 아니고, 북 상황은 대남공작은 김정일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이라는 사회는 원래 전체주의입니다. 김정일의 싸인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총 한 방 쏘고 해외를 나가도 개인이 함부로 못합니다. 대남공작 같은 큰일은 김정일 비준에 의해서 합니다. 비준은 싸인이고요. 최고승낙이라는 것이죠. 담당 과장 지도원들이 같이 앉아서 노선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연구하면서 김승일은 ‘노선이 불합리하다’고 했습니다. 비엔나에 가서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거쳐서 아부다비 거쳐서 남한에 오는 건데 아랍지역이 전쟁 국가여서 상황이 경비가 삼엄하다고 김승일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담당 과장이 ‘이미 친필 비준이 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고 불만이 있었지만 그대로 하게 된 겁니다. 친필비준이 없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Q. ‘친필 비준’을 받은 날짜
A. 87년 10월 정도. 87년 10월 7일에 임무를 받고 한 달 간 준비를 했습니다. 폭파 방법, 노선준비를 하고 11월 12에 평양 순환비행장을 출발했습니다. 유럽을 와서 헝가리에 와서 준비를 하고 외교관 공작부서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때 헝가리까지는 북한 여권을 사용했습니다. 헝가리에서 비엔나는 육로로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북한이 이용을 했습니다.

Q.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된 폭탄, 공항 검색대에서 적달
A. 라디오에 배터리가 들어가 있는데 특수조작 된 겁니다.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배터리와 반은 폭발물을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화학품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시한폭탄을 어느 시간을 밑에 것을 누르면 9시간 후오, 임의 시간 조정 훈련을 받고 술병은 액체폭약이었습니다. 그동안 유럽을 여행할 때도 무사통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술병 같습니다. 그게 액체 폭약이라 항상 같이 두어야 점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Q. 검색대에서 적발 당한 순간의 심정
A. 바그다드에서 검열이 심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배터리를 회수한 적이 있고요. 그런데, 그걸 돌려줘서 다행이었는데 바그다드 공항 검색대에서는 뽑아서 버리더라고요. 아찔했습니다. 작전 실패죠. 그래서 저도 마음이 급해서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다시 끼워서 김승일에게 주었더니 그가 항의했습니다. 라디오를 틀어 보이며 항의하자 통과시켜주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노인이 항의하니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KAL 858기를 폭파 대상으로 고른 이유
A. 제가 직접 한 게 아니고 저는 보조 역할로 따라갔고 김승일과 담당 조직원들이 결정 한 겁니다. 당시 그때 남조선 비행기에 외국인이 타지 않은 비행기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외국인이 탔으면 국제적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외국인이 타지 않은 비행기를 골랐고, 그 당시에 노선을 연구한 결과 그 노선이 가장 시기에 적합했습니다.

Q. 폭탄을 비행기에 두고 내렸을 때의 기분
A. KAL기에 남한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많이 떨렸죠. 긴장하고요. 강심제도 먹고 탔는데, 긴장을 했고 탄로 나서 쫓겨 가지 않을지 긴장했고. 폭탄을 선반 위에 놓고 계획된 대로 내리면서도 그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은 ‘이 사람들이 희생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워낙 혁명가 훈련을 받았고 남조선 혁명과 통일에 기여한다고 당에서 말하니까 나도 필요하면 죽어야 하고 이만한 희생은 감수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Q. 비행기 실종을 알게 된 시점
A. 전혀 예상 외로 바레인으로 가게 됐습니다. 원래는 내리면서 탈출하기로 한 비행기로 타서 로마로 멀리 도망갔다가 비엔나로 가기로 했는데 내리는 순간 공항 분위기가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직원이 타고 온 항공권을 회수하니까요. 아부다비 공항은 비자 여권을 안주고 통과여객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김승일이 내리면서 의심받을까봐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 바레인으로 가는 쪽으로 위장용으로 해 둔 바레인 표를 제시한 거죠. 수속을 하려는데 공항 직원이 수속을 대행해줬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달갑지 않았죠. 바레인으로 가게 됐거든요. 결정적 실수는, 북한 공작 부서가 이 공작을 하려면 사전 루트 연습을 해야 하는데 탁상 연구만 했고 아랍에 대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바레인에 도착해서 당황했고, 호텔도 겨우 찾아갔습니다. 아랍에서 일요일에 쉬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거든요. 공항 나와서 호텔에 갔고, 그날이 일요일이니 항공사를 다음 날 찾아가니 로마 가는 티켓이 없답니다. 다음날 아침 출발이 있다고 했는데, 사건이 나면 수사가 진행 될거고 추격 당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건 바레인 호텔에 묵고 있는데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영어 자막으로 KAL기 관련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바레인 주재 한국 대사관이 직원이 찾아와서 김승일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폭파 임무가 완수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Q. 대사관 직원이 찾아왔을 때의 느낌
A. 많이 긴장됐고, 의심 받고 추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루트가 삐끗해서 잘못 왔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대사관에서 찾아와서 떨렸고 모른 척 하고 저는 잠을 자는 척을 했습니다. 김승일이 대사관 직원과 필담을 하더군요. 영어와 한자로요.

Q. 체포 당시의 상황
A. 공항을 가서 여권 심사대를 지나는데 일본 대사관 직원이 저희 여권을 보더니 회수했습니다. 따로 불렀습니다. ‘마유미 여권이 위조 되어서 이 상태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겁니다. ‘일본 대사관에 가서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비행기 탑승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공작 실패를 깨달았습니다. 각자 분리되어서 몸수색을 당하고 묶여있게 됐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일본으로 보내져도 탄로 나는 거죠. 그때 김승일 할아버지는 ‘일본에 끌려가서 살아있어도 고통만 받다 죽게된다. 자결하는 게 맞다’ ‘앰플을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깨물자’고 제안했습니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김승일 할아버지 말이 ‘나는 살 만큼 살아서 괜찮은데 마유미한테는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앰플을 깨물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다니고, 혁명가지만 그 순간에는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아직 경험이 없어서 김승일에게 앰플을 깨물 때가 되면 신호를 보내라고 했고, 내가 먼저 깨물겠다고 했습니다. 바레인 경찰이 핸드백을 회수하고, 담배까지 빼앗았습니다. 담배에 앰플을 넣어두었거든요. 앰플을 빼앗기면 안되니까 빼앗기는 순간 앰플을 깨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앰플이 작은 유리에 액체가 깨지며 자연히 기체가 되어 즉사하게 되는데 더러 흡입이 되고 더러 흡입이 안되었나봅니다. 그 사이에 김승일은 조용히 앰플을 깨물어 사망한 뒤였습니다.


Q. ‘자살연기’
A. 좌파 정부 때 연출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앰플 깨무는 연기를 누가 합니까. 너무 심하지 않은가요.

Q> 자살에 성공했다면
A> 이 사건은 영원한 미궁에 남았습니다. 북한이 의도한대로.... 누가 했는지 모르고 저와 김승일이 누군지 모르니 일본과 남한의 갈등이 더 생겼을거라고 생각합니다.

Q. 김승일의 사망을 알았나
몰랐습니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경찰과 간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괴로웠습니다. 시신도 못봤습니다. 간호사들이 ‘남자는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왜 내가 살아있나...비밀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그 생각 뿐이었습니다. 

Q. 자백을 하게 된 계기
A. 바레인 경찰에서도 수사를 받았습니다. 중국인, 일본인으로 조사 받다가 한국의 외교력으로 앰플을 깨무는 방식은 북한 밖에 없다고 설득을 당했습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이 위조여권이라는 것도 밝혀내서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한국말이 들리고, 범 소굴처럼 무서운 곳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남산 지하 수사실에 수사를 받는데, 처음 8일 동안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를 했습니다. 잘 때 한국말이 튀어나올까봐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조사에서 자꾸 막혔습니다. 과학적 사실 앞에서 거짓말로 버틸 수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거 얘기를 하는 걸 듣는데 자유롭게 선거를 하고 후보가 여럿이고 한 집에서도 갈라져서 선거를 한다는 걸 들으면서 자유로움을 알게 됐습니다. 외출을 해서 명동을 돌아보게 된 날이 있는데, 북한에서 해외 실습을 해서 자본주의 실상을 알았지만 그때는 ‘다른 나라 이야기’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족이고 분단된 같은 조건인데 너무도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북한과 차이가 날까... 통일을 위해 했다고 자부했는데 통일에 기여되는 게 뭔가...’ 지도자가 잘못된 게 아닌지, KAL기 사건에 대해서도 통일을 위해 한 일이라고 자부했는데 이곳에 와서는 ‘동족 살상’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 유가족에게 진실을 알리고 죽으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Q. 심경의 변화
A. 8일 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와서 실상을 보면 가슴과 머리를 가진 사람이면 보는 순간 아니라는 걸 다 느낀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느꼈습니다. 저는 많이 걸린 경우라고 합니다. 

Q. 북에 남겨진 가족
A. 가족을 가장 걱정했는데 얼마 전, 탈북자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많이 고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5년 만에 가족 소식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Q. 어머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순간
A. 87년 4월 15일에 북한에 있을 때 KAL기 폭파 임무 받기 전에 명절이라고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도 해외에 나가계시다가 휴가를 받고 오셔서 가족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가졌습니다.

Q. ‘살고 싶다’는 생각
A.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앰플을 깨물 때도 오로지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와서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당연히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유가족과 직접 대면을 하니 그 심정이 이해되거든요. 개인하고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그들이 원한다면 빨리 죽여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어머니가 떠오르더군요. ‘어머니가 곱게 키워주셨는데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인간이니까 맥이 풀렸다고 할까요. 죽는 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인간이니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주저앉았다고 하더군요.

Q. 사면 후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
A. 대한민국이 저를 살려놓은 건 KAL기 사건에 대해 북한이 아직도 인정을 하지 않고 뒤집어씌우려고 하니까 이 진실을 증인으로서 증언하라고 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KAL기 사건의 진실을 지키는 게 제 사명입니다.

Q. 사면 받았을 때의 심경
A.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하나님께 감사했고, 보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최·박의 시사토크 판' 김현희 편은 내일 밤 2부에서 더 이어진다. 2부에서는  김현희를 꾸준히 인터뷰 해 온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함께 해 김현희 ‘가짜몰이’에 대한 진실을 상세히 털어놓는다. 전 정부에게 받았던 이민 압박, 경찰 협박, 방송 출연 강요 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했던 심경도 밝힌다.

-출연자 :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
-방송일시 : 2012년 6월 18일 (월) 밤 10시
-진행자 : 최희준 취재에디터,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