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우리가 6.25전쟁에 대해 몰랐던 것들******

bsk5865 2012. 6. 25. 08:29

보낸사람 : 노을05 운영자 12.06.24 23:44

 

우리가 6.25전쟁에 대해 몰랐던 것들******

 

우리가 6.25전쟁에 대해 몰랐던 것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1950년 6.25전쟁 참전국이었던 영국은 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 1952년 3월까지 육해공군 참전 비용으로 약 2200만파운드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약 400억원을 투입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1953년

 7월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전비용은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참전국의

 참전비용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북한의 우방국이었던 몽골은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에 살아있는 말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1차 7000필, 2차 378필 등 총 7378필 규모다. 몽골 정부는 북한에 훈련된

 군마를 제공하면서 검역 이후 전염병이 없다는 진단서를 첨부했다.

 

더 놀라운 것은

 1951년 3월15일 군마인도인수증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대표단 단장으로

  서명한 사람이 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라는 사실이다. 홍명희는 1948년 월북해

  북한 내각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국가기록원은 6.25 전쟁 62주년을 맞아 UN과 영국·몽골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수집한

 6.25 전쟁 관련 희귀 기록물을 24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기록물은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6.25전쟁 참전국의 국가별, 부대별 활동상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비롯해 영국군의 참전비용 관련 문서, 전시구호품과 전쟁의 일상을 살펴 볼 수 있는

  희귀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영국, 몽골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수집한 기록물은 영국군의 전쟁 참전비용과 몽골이

  북한에 지원한 전시지원 물품 기록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참전비용이 연구되거나 공개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 영국 참전비용 자료는 매우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몽골은 7000마리가 넘는 말을 북한에

 제공했는데, 이는 거의 사단 병력에 가까운 규모다"라며 "전쟁에서 도로 및 병참기지 폭격이

  계속되면서 말이 중요 운송수단으로도 사용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6.25 전쟁 당시 미국·영국을 비롯한 16개 참전국과 인도·노르웨이 등 의료지원국

 

 개별부대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과 영상 기록물도 공개됐다. 그리스군 병사들이

 야전 침상에서 가족에게 받은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 프랑스군이 와인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

호주군이 야영에서 머리를 깎는 모습, 네덜란드 군인들이

  한복을 입은 한국인과 찍은 사진, 인도 병사가 시골 노인에게 담배를 권하는

 모습 등을 통해 연합군 병사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UN 연합군의 전시구호 활동에 대한 희귀 기록물도 눈에 띈다. 특히 돼지,

 병아리, 통조림, 의류, 야외용 칠판 등 다양한 전시구호품이 사진과 영상으로

  소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연합군이 해외 양계기술자와 함께 유정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모습과 살아 있는 돼지를 직접 구호품으로 제공하는

 사진도 눈에 띈다.

이밖에 한강철교가 끊기자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의 행렬과 피난

 

  도중 길가에서 밥을 짓는 모습, 임시시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하는 모습 등에서

  전쟁 속에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제주도에 마련된 시설에서 생활하는 모습과 거리의 아이들이

  방황하거나 구두를 닦는 모습에서는 전쟁의 참상도 읽을 수 있다.

 

송귀근 국가기록원장은 "6.25전쟁 62주년을 맞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이 번 기록물 공개를 통해 국민들과 함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바일]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만나는 실시간 모바일 뉴스
[루머 & 진실] 증권시장에서 떠도는 루머를 파헤쳐드립니다
조민서 기자 summer@
<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

 

         6.25 특집 - 비목

 
6.25 새벽의 무초의 증언

6.25가 터졌을 때 주한미국 대사는 존 J 무초였다. 1950년 6월25일 새벽 8시 그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났다. 副대사인 에베레트 프란시스 드럼라이트였다. “미 군사고문단이 새벽에 38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대사를 깨우지 않은 것은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한 뒤에 보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무초는 걸어서 5분 거리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은 반도호텔에 있었다. 도중에 UPI의 빌 제임스 기자를 만났다.

“대사님 아침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38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데 챙겨보시오”

제임스 기자는 이 말을 듣고 제1報를 날렸다.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무초 대사는 오전 9시에 “북한군의 全面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워싱턴의 국무부로 보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도 전달하도록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에 주재하는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도 戰況을 알려주었다. 이날 무초 대사는 경무대로 자주 들어가 李承晩 대통령에게 최신정보들을 알려주었다. 李 대통령도 여러 통로로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무초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그때 미군은 약500명의 군사고문단을 한국군의 여러 부대에 파견해놓고 있었다.
오후에 경무대로 들어가니 李承晩 대통령 옆에 申性模 국방장관이 있었다. 李 대통령이 “방금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말했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무초 대사는 말렸다.
“한국군은 劣勢(열세)에서도 지금 잘 싸우고 있습니다. 밀리고 있으나 부대 단위로 항복한 곳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각하께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戰線의 부대가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내가 잡혀선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 시간쯤 설득하다가 지친 무초 대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고 한다.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6월26일 오후 경무대에 올라간 무초 대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위해 두 대의 기동차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李 대통령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내려갔다. 무초 대사에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초는 대단히 화가 났고 李 대통령은 미안해 했다. 무초 대사는 李 대통령의 오스트리아人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李 대통령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들르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무초 대사가 李 대통령을 찾아가 한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이 대통령은 생각하고 있던 話頭(화두)를 꺼냈다. 무초는 자연스럽게 對話에 참여하여 조언할 수 있었다.

1971년 1월과 2월에 은퇴중이던 무초 대사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肉聲증언’에 응하여 위의 秘話를 소개했던 것이다. 무초 대사는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李承晩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국과 유엔의 개입근거를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초 대사는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戰線의 暴雨(폭우)가 한국을 구했다”고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 등 미군측의 회고에는 한국군의 무능과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무초는 동정적이다. 단기간에 건설된 한국군은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대주지 않았는 데도 잘 싸웠고, 이것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도 재미 있다.
'李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高次元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 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類의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國軍이 기습을 받고 死鬪하던 그날로부터 62년이 지난 날이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干城(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國軍은 앞으로 자유통일을 武力的으로 뒷받침해야 하고, 애국심과 절도가 있는 一流시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

국민皆兵制(개병제)에 따라 건강한 남성이면 모두가 군대에 들어가서 총을 잡고 2년 간 근무함으로써 애국심을 體得(체득)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축복이고 特權이다. 세계가 부러워 하는 제도이다. 이 국민皆兵制는 통일 후까지도 이어가야 한다. 국군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해야 할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