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夜行列車-春日八郎///위로 올라간 사람들 Meteora 修道院

bsk5865 2013. 1. 24. 09:45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1.24 06:06

 

夜行列車-春日八郎///위로 올라간 사람들 Meteora 修道院(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2623 




夜行列車-春日八郎

作詞 荒木とよひさ 作曲 浜圭介 編曲 川村栄二


夜行列車よ
俺を乗せた青い夜汽車よ
今故郷を過ぎて行く
あそこだよ あの山のふもとだよ
おふくろが妹が住んでいる
夜行列車よ 汽笛鳴らせよ
揺れて 揺れて 揺れて走れよ


夜行列車よ
俺を乗せた青い夜汽車よ
線路のきしみ懐かしく
灯りだよ 二つ三つ 五つ六つ
見つめればあふれくるこの涙
夜行列車よ汽笛鳴らせよ
鳴いて 鳴いて 鳴いて走れよ


夜行列車よ
俺を乗せた青い夜汽車よ
もう故郷は闇の中
もう一度はじめからやり直す
待ってなよおふくろよその日まで
夜行列車よ汽笛鳴らせよ
揺れて 揺れて 揺れて走れよ


위로 올라간 사람들 Meteora 修道院

神에게 餘生을 依託하고 宗敎에 歸依한 中世의 修道者들은 徹底히 隔離된 삶을 꿈꾸었습니다. 絶對者에게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爲해 榮辱과 煩惱를 깨끗이 솎아내고자 했던 그들은 어떠한 사람도 감히 오를 수 없는 絶壁을 聖地로 選擇했습니다. 神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建設할 수 없었을 것 같은 孤立無援의 修道院 안에서 修道者들은 ‘人間’ 의 길을 抛棄하고 살아갔습니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크고,가장 외딴 곳에 있는 메테오른 修道院으로 가려면 한참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程度로 좁은 洞窟을 通過하고 階段을 오르는 일을 몇 차례나 反覆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는 首都인 아테네를 벗어나면 이내 알 수 있듯이 國土는 山이 많아 農事지을 땅이 不足하고 韓半島보다 더 瘠薄한 땅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大部分이 山岳地帶인데다 降水量도 많지 않아 씨앗을 뿌려도 滿足할 만큼의 收穫物을 거둘 수 있는 땅은 全 國土의 10% 內外에 不過합니다. 게다가 山이 屛風처럼 海岸을 둘러막고 있어서 內陸으로 가려면 險峻한 고갯길을 넘거나 迂回해야 합니다. 그래서 地圖에는 가까운 곳도 그 곳을 가려면 時間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田園 風景은 無意識的으로 草綠色을 聯想됩니다만. 그리스에서는 都市에서 멀어져도 黃色의 景觀을 보게 됩니다. 드문드문 낮은 灌木이 눈에 띄긴 하지만 아름드리 나무나 밭은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땅은 荒蕪地 같고, 山은 大槪 민둥산이어서 荒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보자면 西北쪽에 있습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높은 山脈이 始作되는 地点입니다. 그리스의 山들은 다윗 앞에 우뚝 선 골리앗처럼 불쑥불쑥 솟아 있습니다. 마치 平地에 巨大한 바위 덩어리를 통째로 심어놓은 듯했습니다. 마치 嚴하고 무뚝뚝한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메테오라에 단지 바위山만 있었다면 世間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雄壯하고 威壓的인 山은 그리스에 散在해 있기 때문입니다. 地名인 메테오라가 ‘空中에 떠 있는’ 이란 意味를 갖고 있듯이 이곳의 修道院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걸쳐져 있습니다. 메테오라 아래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칼람바카(Kalambaka)에서 보려면 고개를 完全히 젖혀야 할 만큼 높다란 곳에 修道士들이 起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全盛期에는 24個에 이르렀던 메테오라의 修道院은 現在 6個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들 외딴 곳에 있어 徒步로는 旅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修女院인 스테파노스 修女院(Monastery of Saint Stephen)을 訪問했습니다. 그리스 國旗와 노란色 비잔틴 帝國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戰爭을 通해 1830年 獨立을 爭取한 現代 國家 그리스보다 작은 修道院이 훨씬 긴 歷史를 지니고 있음을 暗示하는 듯했습니다.

入口에는 ‘聖스러운 空間이므로 敬畏하는 마음을 가져달라’ 는 注文이 내걸려 있었습니다. 女性들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어야 入場이 許容됐습니다. 가톨릭처럼 검은 옷을 입은 修女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庭園을 지나 本堂으로 向했는데. 內部에는 바닥을 除外한 모든 面이 비잔틴 聖畵로 裝飾돼 있었고, 예수를 비롯한 聖人들의 얼굴은 黃金빛 圓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양초에 불을 붙여 祈願을 비는 사람들은 敎會로 들어와 聖號를 3번 그은 뒤 額子 形態의 聖畵에 입을 맞춥니다. 이 모든 過程이 嚴肅하게 進行되었습니다.

스테파노스 修女院의 뒤로 가면 칼람바카 市內가 한눈에 펼쳐지는 場所가 있습니다. 過去 이곳에 居住했던 修道士들은 마을을 바라보며 어떤 想念에 빠졌을지 궁금했었습니다. 高地에 있다는 優越感도 느꼈을 테고, 가끔은 稀微한 불빛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을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觀光客들이 몰려와 寫眞 찍고 떠나기 바쁜 展望臺에 不過해젔습니다.

修道院에는 傳統 服裝,손으로 記錄한 聖經,연기를 通해 信徒에게 恩寵을 내리는 香爐 같은 것들이 展示된 博物館과 簡單한 記念品을 販賣하는 가게도 있는데. 計算臺에서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修女를 보면서 그들이 果然 金錢에서 自由로울 수 있을지 疑問이 들었습니다. 神이 내린 試驗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修行할 時間에 一般人들을 相對해야 하니 옛날만큼 純粹할 수는 없을듯했습니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크고, 人間 世上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는 에 닿으려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程度로 좁은 洞窟을 通過하고 階段을 오르는 일을 몇 차례 反復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特異한 것은 해골과 뼈를 보관하고 있는 房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겁나는 物件들은 흐린 날씨 속에서 陰沈한 雰圍氣를 자아내데요. 食堂을 改造한 畵廊에는 修道僧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그림과 食器들이 陳列되 있었고,스테파노스 修道院처럼 작은 商店이 있었습니다. 다만 수염과 머리를 기른 男子修道士들이 자리를 代身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大 메테오른 修道院과 가까운 곳에는 발람 修道院(Monastery of Varlaam),그림 葉書에 단골로 실리는 루사노 修道院(Monastery of Rousanou)과 니콜라스 修道院(Monastery of St. Nicholas),映畵 ‘007 유어 아이즈 온리’의 마지막 場面을 撮影했던 聖 트리니티 修道院(MonastelY of Holy Tlinity)은 메테오라에 나머지 修道院이 있다던데 旅行 코스에 없어 外觀만 眺望하고 떠나야 했지만,時間이 주어진다면 돌아보고 싶은 곳들이었습니다. 메테오라의 모든 修道院은 獨也靑靑하듯 山꼭대기에 홀로 자리해 있었습니다. 權力者가 群衆을 내려다볼 수 있는 壇上에서 演說하는 것처럼, 어디에서나 耳目을 끌 수 있는 山頂에서 自身의 存在를 誇示하고 있었습니다. 佛敎의 寺刹은 山 속에 있기는 하나, 自然에 파묻혀 있어도 드러나는 법은 없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修道院의 位置가 聖職者의 必須德目인 謙遜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습니다.

꾸불 꾸불거리는 길을 따라 修道院으로 올라가다 보면 놀라움보다 好奇心이 먼저 생깁니다. 어떤 理由때문에 저 높은 곳에 修道院을 지었는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小說家 공지영 씨는 ‘修道院 紀行’에서 西 유럽의 修道院을 돌아본 뒤 ‘物質의 極侈’’文明의 極侈’를 몇 百 年 동안 누린 이 유럽 땅에서 스스로 창살 안으로 들어가 가난을 自招하는 저이들은 단지 世上이 싫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覺悟하고 스스로 갇힌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메테오라에 本格的으로 修道院이 建立됐을 當時인 15世紀는 그리스 歷史에서는 暗黑期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新大陸 開拓을 爲해 온 神經을 쏟고 있을 때 그리스는 오스만 帝國의 한 領土에 不過했을 따름입니다. 비잔틴帝國의 滅亡 以後 物質과 文明은 사라지고 生活은 疲弊해졌습니다. 터키 海賊의 侵入을 避해 安全한 곳에서 隱遁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修道者들은 苦肉之策으로 메테오라의 奇妙한 봉우리 위에 建物을 세웠습니다.‘스스로’ 決定했지만 願해서 갇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터키인들이 犯接할 수 없는 곳에 修道院을 지은 德分에 그리스 正敎會의 文化는 保存될 수 있었습니다.

修道院에 居住했던 僧侶들은 오로지 밧 줄에만 依支해 물자를 供給받았으며. 일하고 祈禱하고 공부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새벽 3時 30分에 日課를 始作하며 ‘潔白,淸貧,順從’ 의 세가지 規則을 嚴格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의 많은 젊은이들은 宗敎에 一生을 걸기 爲해 이곳을 찾아옵니다. 世界史에 華櫚하게 登場했지만 古代 時期 以後 舞臺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리스인들에게는 宗敎는 生의 依支를 지탱해주는 重要한 要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修道院에 入門하려면 3年의 試驗期間을 거친 後에 修道院長의 承認을 받아야 할 만큼 아직도 좁습니다.

正敎會 聖堂의 內部는 華麗한 色彩의 그림으로 빈틈이 없습니다. 謹嚴한 表情의 예수를 筆頭로 그의 弟子와 聖人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으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마음이 敬虔해집니다. 이처럼 그리스 正敎에 繪畵가 發達한 것은 歷史的으로 性相崇拜를 禁止했던 것과 關係가 있습니다. 11世紀 비잔틴帝國의 皇帝는 西로마敎會의 敎皇에게 ‘偶像을 섬기지 말라는 十誡命에 根據해 性相崇拜를 斷絶할 것을 要請하지만, 敎皇은 이를 默殺합니다. 以後 그리스正敎는 가톨릭과 完全히 分離되고, 敎理上 彫刻 藝術을 抛棄하고 彩色畵에 邁進하게 됩니다.

메테오라의 비잔틴 聖畵가 有名한 理由는 周邊에 修道院이 많기 때문입니다. 聖職者들의 일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聖畵 그리기일 程度로, 聖畵는 重要한 意味를 갖습니다. 信仰心이 篤實한 그리스사람들은 聖畵를 購入해 집 안에 걸어놓습니다. 그림의 素材는 聖經이며 새로운 디자인을 開發하지 않고 以前의 것을 反復하기만 합니다. 가장 人氣 있는 製品은 聖母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입니다.

聖畵를 製作할 때는 먼저 스케치를 하고 색칠할 곳을 除外한 部分을 金箔으로 덮습니다. 그리고 鑛物質, 계란 노른자, 식초 물 等을 利用해 만든 물감으로 어두운 色부터 칠해 나갑니다. 테두리에 金箔을 다시 입히고 난 後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爲해 褐色線을 가늘게 그려 넣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