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vietvetpusan/13394230
전쟁에서 진격보다 어려운 것이 철수입니다. 적군의 공격에 가해지는 상황에서의 철수작전은 군대만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민간인까지 함께 철수한다면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중, 그 어려운 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바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방불케 한 흥남철수작전입니다.
장진호 전투 이후 북진은 불가능해지고,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상황에 놓입니다. 결국 유엔군 사령부는 함경도 일대의 국군과 유엔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리는데, 당시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육로는 끊겨서 흥남을 통해 해상철수를 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중공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과 제해권은 유엔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흥남 근해의 기뢰만 피하면 바다에서는 더 이상 적의 위협이 없었지만, 문제는 중공군에 포위된 가운데 무사히 흥남을 떠나는 것이었죠.
흥남에서 철수해야 하는 병력은 국군 1군단과 장진호에서 동장군 속 사투 끝에 생환한 미 해병 1사단을 포함한 미군 10군단의 병사 10만 명과 차량 17,000대로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였지만, 피난민들 역시 흥남으로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미군의 처음 계획은 군 병력만 철수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군 병력과 장비를 싣는 것만으로도 수송선은 여유가 별로 없는데다가 피난민까지 태우면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도 더 걸리고, 스파이가 섞여 들어와 파괴공작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흥남을 철수하는 피난민들>
그러나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미군 10군단 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재미의학자 현봉학 박사는 피난민도 데려갈 것을 요청하였고, 다른 국군 지휘관도 피난민을 버리고 갈 바엔 국군이 걸어서 철수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강력히 피난민도 함께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미 해병인 포니 대령도 동참하여 상관인 알몬드 장군을 설득합니다. 국군의 끈질긴 요청에 미군은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도 태운다."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과 피난민도 흥남철수에 동참하니, 그 숫자는 10만 명에 이릅니다.
<메레디스 빅토리의 피난민들>
이 때 피난민을 태운 배 중 유명한 것이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는 당시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수송선으로, 철수작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습니다. 본래 임무는 북진한 유엔군에게 항공유를 보급하러 온 것이었지만, 전세 변화로 흥남에 하역을 할 수 없어 부산에 짐을 내린 후, 긴급히 철수작전을 위해 흥남으로 돌아온 배였습니다.
미군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이란 조건을 걸었고, 메레디스 빅토리에는 아직 위험한 항공유가 300톤 가량 있었으므로 안전을 이유로 피난민의 승선을 거부하더라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레디스 빅토리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기꺼이 피난민의 승선을 허용하여 피난민들을 가능한 만큼 태웁니다.
그래서 메레디스 빅토리는 1만 4천 여명의 피난민과 경호를 위한 17명의 국군 헌병을 태우고 12월 23일 흥남을 출발, 24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나 부산항엔 이미 많은 피난민이 몰려와 여유가 없자 거제도로 목적지를 변경하여 26일에 피난민들을 섬에 내려줍니다. 이 3일 간의 항해 중 5명이 새 생명이 배 위에서 태어나는 작은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레디스 빅토리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ever by a single ship)"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습니다.
<철수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메리디스 빅토리를 포함하여 총 193척의 선박이 동원되어 국군과 미군,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무사히 흥남을 철수한 후, 배에 미처 싣지 못한 물자는 미군이 마지막 배가 흥남부두를 떠난 것과 동시에 항구 시설과 함께 폭파하였습니다. 이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이었고 바로 다음날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하였는데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해도 좋은 철수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는데요, 수많은 피난민들이 배에 타는 과정에서 완전한 통제와 승선인원 집계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보니 다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흥남 안의 피난민은 배에 탈 수 있었지만, 흥남 외곽의 피난민들은 흥남으로의 진입을 허용하다가는 철수 전까지 유지해야하는 군 방어선이 붕괴할 수도 있고, 피난민으로 위장한 스파이의 잠입도 우려되어 어쩔 수 없이 차단해야만 했습니다.
피난민의 동반 철수를 주장한 김백일 장군은 이듬해 3월 중공군에게 재반격 작전을 실행할 때도 선두를 지키며 군을 지휘하다가, 1951년 3월 28일 제8군 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군단본부로 복귀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탔다가 악천후 탑승 비행기가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에 충돌하면서 순국한 후 중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김백일 장군과 함께 피난민 철수를 주장한 현봉학 박사는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며 이후 안창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 기념 사업과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찾고 윤동주 문학상 제정에 관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임상병리학 연구로 199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인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하고, 2007년 11월 별세하였습니다. 피난민 동반 철수를 건의한 포니 대령은 휴전 이후에도 1957년부터 3년간 한국에서 해병대 수석 군사 고문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준장으로까지 진급하였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우리 문화사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트로트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바로 흥남철수 과정에서 헤어진 사람들의 아픔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소설가 김동리 선생도 <흥남철수>라는 소설로 이 사건 속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거제도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기념비도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흥남철수작전을 총지휘했던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하여 김백일 장군, 현봉학 박사, 박시창 대령, 알몬드 장군, 포니 준장, 흥남철수의 여섯 영웅의 사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군대만으로도 어려운 철수작전에 피난민까지 동참시켜 철수한 흥남철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6.25戰爭函' 카테고리의 다른 글
F-35 B기의 航母 離着 動映像 (0) | 2013.02.23 |
---|---|
흥남철수 [興南撤收 1950.12,12~24] (0) | 2013.02.23 |
우리 軍의 威力"이지스驅逐艦..브랙이글" (0) | 2013.02.21 |
[5.18光州] 내가 直接 戰車몰고 光州暴動 先頭에 (0) | 2013.02.21 |
北韓核 假想 시나리오 (0) | 201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