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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興南撤收
6·25전쟁 당시 국군과 국제연합(UN)군 주력부대가 흥남항을 통해 수행한 대규모 해상철수.
1950년 11월말 중국군의 전면공세로 포위된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수도사단이 흥남에 집결해 미 제10군단의 지휘 아래 철수를 진행했다. 세계전쟁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이 해상철수는 12월 15일 미해병 제1사단,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제7사단, 24일 미 제3사단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국군과 UN군 10만 5,000명의 병력과 1만 7,000대의 차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 그리고 9만 1,000여 명의 북한 피난민이 철수했다.→ 1·4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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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興南 통일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던 1950년 10월이 지나가고 서리가 내리자 전선의 상황은 뭔가 이상해지고 있었습니다. 한만국경 일대의 산속 깊숙한 곳에서 강력히 저항하는 적들이 지금까지 상대한 북괴군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 지금까지의 전쟁은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12월이 되어 속절없이 아군 부대들은 지금까지의 진격로를 뒤로 돌아 북한 땅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버려 통일의 꿈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동해의 전략거점이자 함경도의 초입인 원산이 12월 7일 중공군에게 점령되자 한반도 동북부 방향으로 진격하여 싸우고 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은 순식간 배후가 절단되면서 적진 한가운데 고립될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제해권, 제공권을 가지고 있던 UN군은 강력한 화력을 발판삼아 한반도 동북부의 요충지인 흥남일대로 집결하여 교두보를 설치한 후, 바다로 철수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 탈출구로 결정된 1950년 12월의 흥남부두 ]
항구도시 흥남에는 병력 10만 5천명에 각종 군수물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이동시키기 위하여 총 125척의 각종 선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군이 배를 타기위해 흥남항을 향하여 속속 집결하는 것과 발맞추어 군인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들이 부두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고자 했던 북한주민들이고 흥남에 모여든 피난민의 수가 어느덧 20여만 가까이 되었었습니다.
[ 부두에 모여든 군인과 피난민들 ]
하지만 탈출시켜 주겠다고 이들에게 약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철수작전을 총 지휘한 미 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는 커다란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또한 한국전쟁에 발을 들여 놓고 난 후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엄청난 학살현장을 익히 보아왔고 흥남항에 모여든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러한 공포가 무서워 피난하고자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사람을 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흥남 철수를 총 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 ]
하지만 북풍한설에도 밤을 새며 부두에 몰려든 수십만 피난민의 애끓는 눈초리를 그 누구도 외면하기 힘들었습니다. 국군 1군단장이었던 김백일(金白一) 장군이 이들의 동반 탈출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이자 통역이었던 현봉학(玄鳳學) 박사도 알몬드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의 빈곳이라면 어디건 상관없이 침몰하지 않을 수준까지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하라는 긴박한 명령이 하달되면서 장엄한 인도주의 작전이 12월 12일 시작된 것입니다.
[ 차례대로 철수선에 승선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
영하 20도를 밑도는 맹추위와 더불어 눈보라가 흩날리는 흥남부두는 군인들과 각종 물자를 비롯하여 남녀노소구분 없는 피난민들이 함께 승선을 하였고 그들은 차례차례 자유를 향한 탈출에 올랐습니다. 비록 모든 피난민을 다 구할 수는 없었지만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불타는 흥남항을 떠나면서 군사적 철수를 완료함과 동시에 총 9만8천명의 피난민들이 함께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마지막 철수선이 출항하며 폭파당하는 흥남부두 ]
그중 기적의 절정은 12월 23일 흥남항을 탈출한 7,600톤 규모의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에서 벌어졌습니다. 최대 1천명을 예상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무려 1만4천명의 엄청난 피난민들이 타는 장관이 연출되었고, 자유를 찾아 항해한 3일간 단 한명의 피난민들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고 오히려 장승포에 도착하였을 때 5명의 신생아가 배위에서 태어나 출발당시보다 인원이 늘어났을 정도였습니다.
[ 자유를 찾아 힘차게 항해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극적인 모습 ]
이러한 흥남 철수작전은 이후 한민족 역사상 최단 시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긴 문화인류학적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1950년 눈보라 속의 크리스마스가 빛났던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가 벌여온 수많은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찾기 힘든 인도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는 점은 사치겠지만 1950년 흥남에서 벌어진 기적은 결국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증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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