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赤城の子守唄-東海林太郎///歌の背景

bsk5865 2013. 3. 29. 15:38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3.29 06:51

 

赤城の子守唄-東海林太郎///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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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城の子守唄-東海林太郎

作詩 佐藤惣之助 作曲 竹岡信幸


泣くなよしよし ねんねしな
山の鴉が 啼いたとて
泣いちゃいけない ねんねしな
泣けば鴉が またさわぐ


坊や男児だ ねんねしな
親がないとて 泣くものか
お月さまさえ ただひとり
泣かずにいるから ねんねしな


にっこり笑って ねんねしな
山の土産に 何をやろ
どうせやくざな 犬張子
貰ってやるから ねんねしな


歌の背景

“狂恋女師匠”의 柳川真一(やながわしんいち)의 脚本에 依해 芦原正(あしはらたたし)가 監督하고 “朝雲暮雲より野武士と女”의 竹野治夫(たけのはるお)가 撮影한 股旅もの 主演은 “次郎長外伝”의 石松과 追分三五郎의 近衛十四郎(このえ じゅうしろう) “お富と切られ与三郎”의 名和宏(なわ ひろし)“伝七捕物帖 銀蛇呪文”의 福田公子(ふくだ きみこ) 伊吹友木子(いぶきゆきこ) 거기에 水原真知子(みずはらまちこ)北上弥太朗(きたかみやたろう) 등이 出演했습니다.

天保末期 兇作으로 허덕이는 農民의 窮乏을 차마 볼 수 없었던 上州国定村의 長岡忠治郎는 代官所(江戶時代에 幕府의 直轄地를 다스리던 地方官)를 襲擊하여 貯蔵米를 放出하여 스스로 公儀에 쫓겨 赤城의 山 깊숙이 틀어 박힙니다 이런 事態를 収拾하자고 浅太郎는 忠治와는……

1972年10月4日은 東海林太郎의 忌日입니다 .


東海林太郎(本名)는 戦前의 流行歌를 維持한 大歌手입니다 1898年12月11日 秋田市에서 태어나 音楽家를 꿈꾸며 그는 東京音楽学校(現 東京芸大)에 合格합니다 그러나 秋田県의 公務員에서 満鉄社員으로 転職한 아버지를 가진 東海林의 집안은 至極히 堅實한 家風이었던 같아 그의 音楽으로의 志向은 꺾기고 結局 早稲田大学商学部에 入学합니다 그리고 卒業 後 満鉄에 入社하고 8年間 在職하였습니다만 오페라歌手의 뜻을 품고 1930年에 退職하고 東京에서 下八川主祐에게 声楽을 배웁니다.

1933年 時事新報社(現 産経新聞) 主催의 音楽콩쿠르 声楽部門에 入賞하고 king record에 入社한 後 얼마 안되어 polydor로 移籍합니다 다음해인 1934年 2月 polydor에서 내보낸 “赤木の子守唄”가 爆発的으로 팔렸습니다

“赤城の子守唄”는 新国劇에 大成功을 잡고 “国定忠治(くにさだ ちゅうじ)”가 背景으로 있고 더욱 松竹에서 映画化한 “浅太郎赤城の唄”의 主題歌였습니다만 映画보다도 主題歌의 国民的 人気를 떨쳤습니다.

国定忠治의 部下 浅太郎가 단골 주문을 받으러 다니는 叔父를 자르고 그 子息 勘太郎를 업고 울며불며 赤城山로 돌아온다는 演藝野談으로 浪曲에 名聲이 높은 이야기를 歌謡化한 “股旅もの’의 決定版입니다 이 노래가 많이 팔린 것이 幸인지 不幸인지는 結果的으로 그가 살그머니 품고 있었던 오페라 歌手의 길을 버리고 流行歌手로의 길로 나가는 契機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国境の町””野崎小唄””むらさき小唄””麦と兵隊” 等이 이 따라 히트 되여 그를 어엿한 流行歌 歌手로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股旅物”와 “大陸歌謡”의 두個의 길에서 活躍했습니다 正統派 藤山一郎도 戦前의 歌謡界를 兩分한 人気歌手였지만 戦後에는 歌謡曲界도 크게 바뀌어 ドサ回り(劇團 周邊을 徘徊하는 不良輩)의 時代가 繼續됩니다.

그래도 黒燕尾服에 로이드眼鏡을 쓰고 直立不動 正統派의 発声으로 스테이지에 서는 모습은 오페라歌手로의 끝없는 꿈을 表現하는 것 같았습니다 戦後에는 歌手로서 不遇했던 그 위에 直腸 癌 3 期로 手術을 해야 하는 不運도 있었습니다

TV가 普及되기까지의 茶 집에서의 人気 있는 것은 래디오 였습니다만 레디오 放送에서 1951年 NHK를 記念해야 하는 프로가 생겨났습니다 紅白歌合戦인 第1回에서는 正月프로로서 正月3日 밤 8時부터 1時間 放送되었습니다 새로운 趣向의 노래 프로그램이 大成功한 것입니다 出演歌手는 女性軍과 男性軍 다해 8名 식 그 中에 東海林도 出演하였습니다.

부른 노래는 “赤城かりがね”였습니다 그러나 第2回 以後의 紅白歌合戦에는 東海林의 出演이 없었습니다 1970年 以後 TV에도 懐メロ歌手로서 出演합니다만 年輪을 더해가면서도 노래하는 모습과 그 美声은 変함이 없었습니다 果然 本格的인 発声法을 보여준 歌手였습니다

1972年10月4日 立川市의 매니저의 집에서 “ちょっと昼寝を” 라는 말을 남기고 옆으로 누운 체 그는 돌아오지 않는 黃泉의 길로 떠났습니다 死因은 心不全 73歳였습니다.

나는 1960年代 演歌를 처음 接하면서 줄 곳 아나로그 테이프로 東海林太郎의 노래를 즐겨 들었습니다 이제 歌謡界에서는 새로운 時代를 맞아 밝은 팝스調의 노래가 流行하고 그의 노래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으나 한잔하면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가 그의 直立不動의 姿勢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泣くなよしよし ねんねしな
山の鴉が 啼いたとて
泣いちゃいけない ねんねしな
泣けば鴉が またさわぐ…….


지금은 누구도 따라 부르지 않는 懐かしい名曲 “赤城の子守唄(作詞 佐藤惣之助 作曲 竹岡信幸) 같은 赤木山를 노래한 “名月赤城山(作詞 矢島寵児 作曲 菊池 博) 가 그리워지네요.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