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三百六十五夜-美空ひばり///世界文化遺産 5 平等院

bsk5865 2013. 4. 29. 09:0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4.29 07:03

 

三百六十五夜-美空ひばり///世界文化遺産 5 平等院(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292 




三百六十五夜-美空ひばり

作詞 西条八十 作曲 古賀政男


みどりの 風に おくれ毛が
やさしくゆれた 恋の夜
初めて逢うた あの夜の君が
今は 生命を 賭ける君


たそがれ窓に 浮ぶのは
いとしき人の 旅すがた
我ゆえ步む 道頓堀の 水の
夕陽が 悲しかろ


鈐蘭匂う 春の夜
燈うるむ 秋の夜
泣いた 三百六十五夜の
愛の二人に 朝が來る


世界文化遺産 5,平等院

平等院(びょうどういん)은 京都府 宇治市에 있는 藤原氏와 因緣이 깊은 寺院입니다. 平安時代 後期 11世紀의 建築、仏像、絵画、庭園 等이 오늘에 伝해저、“古都京都の文化財”의 一部로서 世界文化遺産에 登録되어 있습니다.

山 이름은 朝日山라고 하며 宗派는 17世紀 以来 浄土宗과 天台宗을 兼해 現在는 特定의 宗派에 属하지 않는 仏教寺院으로 되어 있습니다。本尊은 阿弥陀如来、開基(創立者)는 藤原頼通(ふじわら のよりみち) 開山(初代住持)는藤原頼通(ふじわらのよりみち)입니다.

平等院の創建
京都 南郊의 宇治의 땅은 ”源氏物語”의 “宇治十帖”의 舞台이며 平安時代 初期에서 貴族의 別荘으로 運營되어 왔었습니다.現在의 平等院의 땅은 9世紀 末頃 光源氏(ひかるげんじ“源氏物語”의 主人公)의 モデル 라고도 일컬어지는 左大臣(さだいじん) 인 嵯峨源氏(さがげんじ 第52代 嵯峨天皇의 子孫) 인 源融(みなもとのとおる)가 運営한 別荘을 宇多天皇(うだてんのう) 에게 讓渡되고 天皇의 孫子인 源重信을 거쳐 西紀998年 関白 藤原道長 (ふじわら の みちなが) 의 別荘 ”宇治殿”이 되었습니다.

道長는 西紀1027年 죽고 그의 子인 関白 藤原頼通(ふじわら の よりみち)에 依해 西紀1052年 宇治殿을 절(寺)로 變更하였습니다.이것이 平等院의 始作입니다。創建當時의 本堂은 鳳凰堂의 北方 宇治川의 江邊 가까이에 大日如来를 本尊으로 하였으나 西紀1053年에는 西方極楽浄土를 이 世上에 出現 한 것 같은 阿弥陀堂(現・鳳凰堂)이 建立하였습니다.

平安時代 後期에 日本에서는‘末世思想’을 넓게 퍼져 있었는데 釈尊의 入滅(死去) 에서 2,000年 以降에는 仏法이 衰退해、天災人災가 繼續되고 世上이 어지러워진다고 하는 思想입니다. 平等院이 創建된 西紀1052年에는 当時의 思想에서는 末世의 元年에 該当되는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飛鳥・奈良・平安前期에 퍼져있던 仏教는 現世의 幸福을 비는 タイプ였습니다만 平等院이 創建될 쯤에는 念仏을 비는 것으로 어지러운 世波에서 달아나 来世에서의 幸福을 비는 タイプ(浄土教)가 流行했으며 阿弥陀如来는 極楽浄土를 象徴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平等院의 庭園과 建物은 極楽浄土를 나타내고 있어 “浄土庭園” 이라고도 합니다.,

平安時代 後期의 京都에서는 平等院 以外에도 皇族・貴族에 依한 大規模 寺院의 建設이 있다르고 있었습니다.藤原道長는 西紀1020年、無量寿院(のちの法成寺)를 建立 또 11世紀 後半에서 12世紀에 걸쳐 白河天皇(しらかわ てんのう) 勅願(ちょくがん=임금이 神佛에게 비는 祈願)의 法勝寺(ほっしょうじ)을 筆頭로 尊勝寺 最勝寺 円勝寺 成勝寺 延勝寺로 이어지는 “六勝寺(ろくしょうじ)가 지금의 京都 岡崎 近方에 잇따라 建立되었습니다.

그러니、歴史書에 이름이 남아있는 大伽藍도 자금은 痕跡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平安時代의 貴族이 建立한 寺院인 建物 仏像 壁画 庭園까지 包含시켜 残存한다는 点에서 平等院은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