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海帰りのリル-美空ひばり 作詞 東条寿三郎 作曲 渡久地政信
一. 船を見つめていた ハマのキャバレ-にいた 風のうわさはリル 上海帰りのリル リル あまい切ない 思い出だけを 胸にたぐって 探して步く リル リル どこにいるのかリル だれかリルを 知らないか
二. 黑いドレスをみた 泣いていたのを見た 戾れこの手にリル 上海帰りのリル リル 夢の四馬路の 霧降る中で なにもいわずに 別れたひとみ リル リル 一人さまようリル だれかリルを 知らないか
三. 海を渡ってきた ひとりぼっちできた のぞみすてるなリル 上海帰りのリル リル くらい運命は 二人で分けて 共に暮らそう 昔のままで リル リル 今日も逢えないリル だれかリルを 知らないか
世界文化遺産 6,天龍寺 天龍寺(てんりゅうじ)는 京都市 右京区 嵯峨天龍寺 芒ノ馬場町(すすきのばばちょう)에 있는 臨済宗 天龍寺派 大本山의 寺院이며 山이름은 霊亀山(れいぎざん) 절 이름은 天龍資聖禅寺(てんりゅうしせいぜんじ)라고 합니다. 本尊은 釈迦如来 開基(創立者)는 足利尊氏(あしかが たかうじ) 開山(初代住持)는 夢窓疎石(むそう そせき)입니다. 足利 将軍家와 後醍醐天皇과의 緣故가 있는 禅寺로서 壮大한 規模와 높은 格式을 자랑하고 京都五山의 첫 제로 여겨져 왔습니다. “古都京都の文化財” 一部로서 世界文化遺産에 登録되어 있습니다.
天龍寺의 땅에는 平安時代 初期 嵯峨天皇의 皇后 橘嘉智子(たちばなのかちこ 786-850)가 연 檀林寺가 있었습니다. 그 後 約4世紀가 지나 荒廃해진 檀林寺의 땅에 後嵯峨天皇(在位1242-1246)과 그의 王子인 亀山天皇(在位1259-1274)이 離宮을 지어 “亀山殿”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亀山”는 天龍寺의 西쪽에 있는 紅葉(단풍)의 名所로서 알려져 있는 小倉山로、山의 모습이 거북(亀)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天龍寺의 산 이름 “霊亀山”도 이에 緣由된다고 합니다.
足利尊氏가 後醍醐天皇의 冥福을 빌기 爲해 大覚寺統(だいかくじとう=後醍醐天皇の系統)의 離宮이었던 亀山殿을 절(寺)로 고친 것이 天龍寺입니다.尊氏는 西紀1338年 征夷大将軍이 되었습니다.
後醍醐天皇이 吉野에서 他界한 것이,그 다음해 西紀1339年입니다. 足利尊氏는 後醍醐天皇이 始作한 建武の新政에 反発하여 天皇에 反旗를 든 人物로서 이에 対해 天皇은 尊氏 討伐를 命令합니다. 말 하자면 怨讐인 後醍醐天皇의 死去에 즈음하여 그 冥福을 비는 寺院을 建立을 尊氏에게 權限을 주워진 것은 当時 武家에서도 尊敬을 받고 있는 禅僧・夢窓疎石(むそう そせきで)었습니다. 절의 이름은 当初에는 年号를 따라 “暦応資聖禅寺”로 할 予定이 였으나 尊氏의 弟・足利直義가 절의 南쪽인 大堰川(保津川)에 金龍이 춤을 추는 꿈을 꾸웠다고 하여 “天龍資聖禅寺”로 變更하였고 합니다. 절의 建設資金調達을 爲해 天龍寺船라고 하는 이름의 貿易船을 만든 것은 너무나 著名한 일입니다. 落慶供養은 後醍醐天皇의 七回忌인 西紀1345年에 行하여 젔습니다.
天龍寺는 京都五山의 第一로서 繁盛해 절의 領域은 約33万平方m 現在의 京福電鉄帷子ノ辻(たびらのつじ)駅 周邊까지 미치는 廣大한 것으로 本寺 境內에 있는 작은 절 만도 150個의 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後에 자진 火災로 創建当時의 建物은 모두를 燒失되고 中世에는 西紀1358年 西紀1367年 西紀1373年 西紀1380年 西紀1447年 西紀1467年에도 6回나 火災을 當했습니다. 応仁の乱에 依한 焼失・再建 後 當分間은 平安하였으나 江戸時代의 西紀1815年에도 焼失 거기에 幕末의 元治元年 西紀1864年 蛤御門の変(はまぐりごもんのへん=禁門の変)에서 大打撃을 받고 現存의 伽藍의 大部分은 明治時代 後半以後의 것입니다. 한便 方丈(住持의 居所)의 西側에 있는 夢窓疎石(むそう そせき)作의 庭園(特別名勝・史跡)에 조금은 当初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方丈의 北側에는 宮内庁 管理의 亀山天皇陵과 後嵯峨天皇陵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