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浜辺の歌-三原 剛///歌の背景

bsk5865 2013. 4. 30. 19:2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4.30 13:39 주소추가  수신차단

 

 浜辺の歌-三原 剛///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299 

MP3 ダウンロード


浜辺の歌-三原 剛

作詞 林古渓 作曲 成田為三 編曲 南 安雄


あした浜辺を さまよえば
昔のことぞ しのばるる
風の音よ 雲のさまよ
寄する波も 貝の色も


ゆうべ浜辺を もとおれば
昔の人ぞ しのばるる
寄する波よ 返す波よ
月の色も 星のかげも


疾風(はやち)たちまち 波を吹き
赤裳(あかも)のすそぞ ぬれひじし
病みし我は すでにいえて
浜辺の真砂(まさご) まなごいまは


歌の背景

이 노래는 1938年에 만들어졌습니다. 最初에는 歌詞가 三番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作詞者인 林古渓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부르지 않아 1947年 “中等音楽에서부터 現在의 二番까지만 戦後의 中学校 教材로서 採用되어 널리 퍼져갔습니다.

“浜辺の歌”는 唱歌라고 하기보다는 歌曲으로 어울리어 芸術性이 더 높이 評価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作曲者 成田為三가 山田耕筰에게서 師事 받은 影響이 틀림이 없습니다.

歌詞에 對하여는 古語를 巧妙하게 引用한 文語調를 特徴으로 이른 아침 風景을 노래한 一番의 歌詞“あした”는 來日의 意味가 아니고 当然 早朝를 가리킨다는 意味이지요 “さまよえば”는 或時 散策하면 이 아니고 散策한바 의 意味입니다. “風の音よ”는 原來는“風よ音よ”었습니다. 二番는 夕景의 風景을 노래한 것으로 “ゆうべ”도 어젯밤이 아니고 黃昏으로“もとおれば”는 어슬렁어슬렁 헤매면…의 意味이며 “星のかげ”는 별빛“忍ばるる”의 “るる”는 自発的인 用法으로 国文 漢文学者인 作詞者 林古渓의 才能이 如實히 発揮되어 있는 作品입니다.

成田為三는 作曲家를 目標로 하고 있었습니다만 両親의 反対에 부딪쳐 不得이 教師의 길을 걷게 됩니다. 풋내기 教師時代가 지나고 東京音楽学校의 学生이 된 뒤 教師時代에 마음을 준 赴任 處의 大里健治의 앞으로 “浜辺の歌”의 첫 번째 原稿가 보내진 것입니다. 몇 年인가의 뒤 大里健治가 東京의 業者에게 成田為三이 치기 爲한 피아노 (当時、800円이라고 하면 집 2,3채 값)을 注文하여 演奏会를 開催하였는데 邑民 모두가 滿酔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의 피아노는 지금 十和田湖南의 작은 마을 鹿角市 毛馬内町에 있는 大里健治의 自宅을 改装한 油谷旅館의 応接室에 “浜辺の歌のピアノ”로 놓여있어 사람들을 상냥하게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陽地公園의 해 저문 길목 고요한 밤중에 홀로 “童謡”를 흥얼대며 거릴 때 어린 時節이 鮮明하게 되 살아납니다 라는…… 프로에서는 여러분 그리운 童謡의 歌碑를 둘러싸고 맴돕시다. 이번에는 “浜辺の歌”입니다.

今年은 暴炎으로 어느 海水浴場에 가도 混雑합니다만 해질 무렵이면 정말로 사람의 모습도 閑散해지고 波濤 치는 바다에 들어서면 隱密한 気分이 납니다 그런 때에 언덜결에 나오는 것이 이 “浜辺の歌”입니다.

林古渓의 本名을 林竹次郎이고 1875年에 東京神田에서 태어났습니다. 10才에 아버지를 여위고 東京의 池上本門寺에 들러가 修行합니다만 後에 절을 나와 井上円了가 校長인 哲学館(後에 東洋大学)에 入学하여 1899年에 卒業하면서 同校付属의 京北中学校에서 国漢文科 敎師가 됩니다.“古渓”란 号는 幼少時代를 보낸 神奈川県 愛甲郡古沢村(現、厚木市)에 緣由되어 붙인 것으로 中学校에서 學生들에게 “達磨さん”이라고 불려지며 尊敬을 받았습니다. 1928年에 松山高等学校 講師가 됩니다만 그사이 東京音楽学校 分教場이나 第一外国語学校에서 이탈리아語도 배웠습니다.

古渓는 1907年頃 東京音楽学校의 老生徒時代에 牛山充과 만납니다만 後에 牛山이 雑誌“音楽”의 編集을 맡으면서 毎月 作曲用 詩歌를 寄稿합니다. “浜辺の歌”는“音楽”4巻8号에 掲載된 이것에 成田為三가 曲을 붙였으며 노래의 歌碑는 古渓가 教鞭을 잡았던 京北中学校의 한편인 京北学園式壇에 있습니다 1958年애 古渓의 弟子들이 스승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가 將來에도 繼續 불려지기를 願하면서 이 碑를 세웠답니다.

実은 発表当時 이 노래에는 3番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前後와는 脈絡이 없는 歌詞 이어 古渓自身은 3番이 불려 지는 것을 싫어해 하고 있었답니다.

研究者 사이에서는 前半部는 原作3番의 前半 後半部는 原作4番의 後半에서 編集途中에 事故가 있었다는 말이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古渓가 訂正을 하지 않은 것은 原來의 原稿가 눈앞에서 빨리 살아진 内容이 떠 오르지 않았기 대문이 라는 것입니다.

古渓는 그 後 1936年에 立正大学 教授가 되어 1944 退職합니다. 그리고는 1947年2月20日에 避難處인 埼玉県 浦和市(現、さいたま市)에서 死亡합니다. 墓는 어렸을 때 절에서 修行한 스님이 住持로 있었던 池上의 永寿院에 있습니다.

牛山充(うしやまみつる) 音楽舞踊評論家는 1878年 長野県 諏訪市에서 태어나 1913年 東京音楽学校 甲種師範科를 卒業하고 同校講師 日本大学芸術科 講師를 거쳐 東京声専 講師 그리고 1925年~1934年까지 “東京朝日新聞”嘱託으로 音楽 발레批評을 執筆하고 매스콤을 舞台로 한 評論活動의 파이오니아 로 戦前 戦後를 通해 音楽評論家로서 重視되어 오다가 1963年에 死亡합니다 (享年79歲).

作成者 黃圭源
소담 엔카
http://cafe.daum.net/enkam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