リンゴの唄-並木路子 作詞 サトウハチロー 作曲 万城目正
一 赤いリンゴに唇よせて だまってみている青い空 リンゴはなんにもいわないけれど リンゴの気持はよくわかる リンゴ可愛や 可愛やリンゴ
二 あの娘(こ)よい子だ 気立てのよい娘 リンゴに良く似た可愛い娘 どなたがいったか うれしいうわさ かるいクシャミもとんで出る リンゴ可愛や 可愛やリンゴ
三 朝のあいさつ 夕べの別れ いとしいリンゴにささやけば 言葉は出さずに小くびをまげて あすも又ねと夢見顔 リンゴ可愛や 可愛やリンゴ
四 歌いましょうか リンゴの歌を 二人で歌えばなおたのし みんなで歌えばなおなおうれし リンゴの気持を伝えよか リンゴ可愛や 可愛やリンゴ
歌の背景 1945年10月末 頃부터 하나의 노래가 爆擊 맞은 자리에서 흐르기 始作했습니다. 그것은 戦争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親했던 사람들을 잃고 生活에 貧困마저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조용히 들어와 그 傷處를 어루만져 준 것이 이 “リンゴの唄”입니다.
이 노래는 敗戦 後 最初로 制作된 日本映画“そよかぜ(松竹作品)”의 主題歌이기도 합니다. “そよかぜ”는 GHO(連合国軍総司令部)의 検閲에도 通過된 第1号의 映画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内容은 レビュー(revue)劇場의 照明 擔當인 少女가 楽団員들의 도움으로 歌手가 되어 一躍 스타가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主演에는 23歳의 松竹少女歌劇団員인 並木路子(本名 小林庸子)가 抜擢되었습니다 그女가 選定된 經緯는 잘 아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노래를 잘 불렀다는 選定된 理由가 아닐는지 요
이 映画에 對하여 佐々木康 監督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別名은 <とおかかんせい=열흘 한정>이여 10日 內 完成과 灯火管制를 비꼬고 있어요 저 映畵는 어떤 映畵라도 괜찮으니까 10月 初旬에 臨時 변통이라도 해서 만들어라 라고 하여 부랴부랴 만들었습니다.
主題歌는 歌詞를 サトウハチロー에게 作曲은 万城目正에 依頼하고 主演인 並木路子가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빠른 撮影으로 알려진 佐々木 監督답게 映画 制作에 스피트가 지나치게 빨라 노래 쪽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撮影 時에 並木는 戦前의 히트曲“丘を越えて”(島田芳文作詞 古賀政男作曲 藤山一郎 歌)를 불러 에프터 레코딩(after recording)하여“リンゴの唄”에 넣는 技法을 使用했습니다.
主題歌의 쪽은 前例 없이 크게 히트하였습니다만 映画는 그의 빠른 撮影 技法에 그다지 좋은 評判을 주지 않았습니다 空襲警報를 듣기 爲해 必需品이었던 라디오 電波를 타고 全国 坊坊曲曲으로 흘러가 家庭에서나 爆擊 맞은 자리의 闇 市場에서나 그리고 引揚船 안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같은 時期에 始作된 NHK의 のど自慢素人音楽会에서도 이 노래가 크게 大 氾濫하였습니다.
싱글盤은 다음 해 1946年1月 日本컬럼비아에서 発売하었습니다 蓄音機도 많지 않았던 그 時代에 発売 3個月 만에 7万 枚가 팔렸습니다. 17円50銭의 레코드가 闇市場에서는 100円의 값으로 팔렸다고 하는데 에프터 레코딩에 立会했던 스탭은 모두 並木路子의 밝은 歌声에 感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女는 最初부터 이 노래의 이미지대로 밝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原因은 그女에게 밀려드는 悽慘한 過去였습니다.
1945年3月9日 Mariana 基地에서 날아 온 美軍 機가 10日 深夜에 東京을 空襲하였습니다 大型長距離爆撃B29의 編隊는 모두1783톤의 焼夷弾을 豪雨와 같이 변두리를 强打했습니다 第1彈 被彈으로부터 20分 程度 지금의 江東區에서 中央區를 中心으로 하는 一帶에 사나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 불꽃의 바다를 路子와 母親은 많은 사람들 틈에 섞혀 右往 左往 했습니다. 路子는 出征 中인 둘째 오빠의 所重한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어머니는 보따리를 등에 없고 있었습니다. 불꽃을 避해 달아난 곳이 隅田川의 近處였습니다.
“私が深さを測ります”라고 하며 路子는 조금 식 江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뒤에서 물소리를 내며 어머니가 뛰어 들었는데 路子의 옷소매를 움켜 쥔 체 두 사람은 反応 없이 흘려 내려가는 동안 路子는 精神을 잃었습니다. 뒤에 알려진 일입니다만 그 女를 救해준 사람은 除隊하여 朝鮮에서 막 돌아온 会社員 土佐弥一郎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떠내려가는 路子를 문어진 建物의 鉄筋으로 “これにつかまれ”라고 외치는데 路子는 그것을 無意識으로 매달려 끌어 올려진 것입니다 人工呼吸을 받고 意識을 되 찾은 路子는 “カメラは?”라고 어울리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부터 路子는 어머니를 찾아 江邊을 彷徨했습니다 그런데 到處에 검게 탄 死体가 늘비했습니다 3日 後에 警察에서의 連絡으로 어머니의 遺体가 芝増上寺에 安置되어 있는 것은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江으로 뛰어드는 瞬間 心臓麻痺를 일으켰는데 허리띠 사이에 있는路子의 月給 封套로 알게 되었답니다. 그때에 死亡者는 約10万 通常爆弾에 依한 空襲으로서는 史上最大의 被害였습니다.
路子는 어머니를 埋葬하고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軍의 命令으로 慰問団에 끼어 大陸으로 가게 되었는데 終戦 直前 蘇連軍侵攻의 所聞이 퍼지는 가운데 간신히 帰国한 路子를 기다리고 있었던 消息은 아버지와 둘째 兄의 주검의 悲報였습니다 南洋諸島 팔라우에서 製糖 工場의 工場長으로 아버지는 空襲으로 돌아가시고, 둘째 오빠는 쿠릴 열도에서 戰死하였습니다.
그로부터 数個月 後 밝고 즐겁게 부르던 노래도 슬픔이 찬 목소리로 變하였습니다 歌唱指導를 하던 万城目正은 몇 번이고 고쳐보려고 합니다만 좀처럼 슬픔은 살아지지 않아 그는 리허설을 中止하고 上野의 山 附近을 한 바뀌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気分을 바꿔 보려는 意圖였지요
當時 上野에는 아주 큰 闇市場이 있었는데 駅 付近에는 구두 닦기 들이 가게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없는 少年 구두닦이 들은 구두닦이 통을 매고 손님을 찾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少年 구두닦이 中에 学齢 前이 아닐까 하는 어린 少年이 있었는데 路子가 나이를 묻자 少年은 수즙어 하며 “お母さんが空襲で死んじゃったので、いくつかわからない”라고 對答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路子는 戦争에서 兄弟를 잃은 것이 나만의 일이 아니다 이런 어린 孤児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나는 무엇이냐 나도 앞을 向해 열심히 살아가자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에 돌아와 마이크를 잡은 路子의 목소리는 一変하였습니다. 戦争으로 心身에 傷處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베푼 名曲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습니다.
並木路子는 後에 東京 渋谷에서 피아노 퍼브(pub)를 열었습니다. 때때로 가게에 와서 피아노를 向해“リンゴの唄”를 불렀는데 나이 많은 손님 中에는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는 아르바이트(part-time job)의 女学生은 그런 밝고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울게 되는 理由가 理解되지 않아요 라고 路子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並木路子는 2001年4月7日 저 世上으로 갔습니다(享年79歳)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