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練の涙-扇ひろ子 作詞 関沢新一 作曲 古賀政男
一 たった一度の お別れなのに 涙 流した 筈なのに この指この肩 こころの奥に しみてかわかぬ 未練の涙・・・
二 今宵さく紅 なぜこう薄い うすい縁の 謎かしら 忘れますわと 笑った頬に 嘘はおよしと 未練の涙・・・
三 遠いけれども こころに残る そんな人です あの人は これて良いのと 隠れで流す 女こころの 未練の涙・・・
變節과 阿附의 鬼才 李完用 乙巳五賊하면 첫째 朴齊純을 爲始해 다은 5명을 擧論합니다. 朴齊純(1858∼1916)은 '乙巳條約' 締結에 圖章을 찍은 外交責任者였으며 1894年 甲午農民戰爭 當時 忠淸監司로 農民軍을 鎭壓한 功勞로 1905年 外部大臣이 되어 '乙巳條約'을 締結. 하였으며 1910年 '韓日合倂' 後 子爵(五等爵의 넷째 爵位: 伯爵의 다음), 中樞院 顧問, 經學院 大提學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은 權重顯(1854∼1934)으로 親日에 한 平生 걸어온 大勢 迎合論者로 1904年 陸軍副將으로 러日戰爭中인 日本軍 慰問 功勞로 日本의 勳1等 八卦章 授與 받았으며 1905年 農商工部 大臣을 거쳐 1910年 子爵, 中樞院 顧問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李址鎔(1870∼1928)은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賭博에 미친 伯爵으로 1904年 外部大臣 署理로서 '韓日議定書' 協定•調印하였고 1905年 內部大臣으로 '乙巳條約' 締結하였습니다 그 功勞로 1907年 中樞院 顧問을 1910年에는 伯爵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李根澤(1865∼1919)으로 근황주의자에서 親日賣國奴로의 變身하여 1905年 軍部大臣으로 '乙巳條約' 調印하였으면 1910年 韓日'合邦' 功勞로 勳1等 子爵과 1910년 朝鮮總督府 中樞院 拷問까지 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韓日合邦'의 主役이었던 賣國奴의 代名詞인 李完用(1858∼1926)입니다.
무릇 天道에 春夏秋冬이 있으니 이를 變易이라 합니다. 人事에 東西南北이 있으니 이것 역시 變易이라 합니다. 天道•人事가 때에 따라 變易 하지 않으면 實利를 잃고 끝내 成就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一堂記事'•조카이자 秘書였던 金明秀가 펴낸 李完用 傳記)
1909年 歲暮에 國內외 新聞을 뜨겁게 달군 것은 總理大臣 李完用 被襲事件입니다. 賣國 親日派의 代表的 人物인 李完用은 '變身의 鬼才'였습니다. 그는 1858年 京畿道 廣州 胎生이며 號는 一堂입니다. 어린 時節부터 神童 소리를 들었으며 判中樞府事 李鎬俊에게 入養되어 學問이 日就月將합니다. 25歲에 文科에 及第하고 奎章閣 侍敎로 있으면서 最初의 官立學校인 育英公院의 學生으로 選拔되어 헐버트 等 美國人 招聘敎師로부터 西洋式 敎育을 받습니다.
그는 "强大國으로 浮上한 美國을 意識하여 育英公院에 進學했다"고 回顧합니다. 이를 契機로 李完用은 親美的 官僚로서 駐美公社團의 參贊官, 臨時代理公使를 거칩니다.
하지만 明成皇后 弑害 事件 後에는 俄館播遷을 周旋하여 親日派를 몰아내고 親러內閣에서 要職을 맡습니다. 한때 獨立協會 創立멤버로서 獨立門 建立에 앞장서지만, 歐美 列强에 많은 利權을 讓與한 理由로 獨立協會에서 除名되고 內閣에서도 밀려나 地方으로 左遷되기도 했습니다.
1901年 宮內府 特進官에서 隱退했다가 4年 後 復歸한 李完用은 親日派로 變身합니다. 1905年 學部大臣이 되자 乙巳條約 締結을 積極 擁護하였고, 1907年 6月 伊藤博文의 推薦으로 內閣 總理大臣 兼 宮內府大臣이 된 뒤에는 宋秉畯等과 함께 高宗에게 讓位를 强要하고 軍隊를 解散해 버립니다.
마침내 大韓帝國의 總理大臣으로 合邦條約 締結을 主導하여 그 功勞로 日本에서 伯爵 爵位를 받았으며, 合邦 後 總督府 中樞院 副議長이 되어 '日鮮融和'를 主張하고 3•1運動 鎭壓에 寄與한 功勞로 侯爵 爵位를 받습니다.
이런 變身에 對해 李完用은 "때를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른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고 辨明하였답니다. 그러나 獨立協會 時節 同志였던 尹致昊는 "그의 特權意識, 野卑한 狡猾性과 陰凶함, 그와 같거나 劣等한 사람들에 對해서는 固執스럽고, 權勢 있는 사람들에게는 屈辱的일 만큼 服從하는 態度,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偏見을 갖게 하였다. 李完用은 徹底한 機會主義者요 變節主義者 阿附主義者였다고 할 수 있다"(尹致昊 日記)고 批判하고 있습니다.
李完用의 合邦論理는 '自然의 運命과 世界的 大勢에 順應하여 東洋平和를 確保하는 것이 朝鮮民族의 唯一한 活路'이며 '그래야 東洋이 西洋에 맞설 수 있다'는 東洋平和論입니다.
伊藤博文의 極東平和論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東洋平和論은 日本의 朝鮮合邦과 大陸膨脹을 合理化하였습니다. 그러나 日本의 勢力 擴張은 결코 東洋 平和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權力과 金錢을 向한 李完用의 貪慾과 變身은 結局 1700萬 同抱를 亡國의 큰 슬픔에 빠뜨렸으며. 그의 後孫들에게도 무거운 罪意識을 남기고 말았습니다.한 世代의 處身이 後代에 미치는 影響에 對해 警鍾이 되네요.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