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汽車の女-多岐川舞子 作詞 たかたかし 作曲 徳久広司
一 逢えば心が 迷うだけ 別れは手紙で つたえます 走る夜汽車は 海沿いの町 窓に漁り火 揺れて眼を濡らす もうあなたの胸には もどれないから 北へ北へ北へひとり 帰ります
二 いくらやさしく されたって あなたを待ってる ひとがいる 求めきれない 女の夢に 焦れてあなたを 深く傷つけた もうあなたの胸には もどれないから 北の北の北の町へ 帰ります
三 これでいいのと つぶやいて 心の傷みに たえてます 今の幸福 大事にしてね 自分ばかりを どうぞせめないで もうあなたの胸には もどれないから 北へ北へ北へひとり 帰ります
吏曹銓郞 ‘임꺽정 (林巨正 또는 林巨叱正)’을 썼던 碧初 洪命憙. 忠淸道 槐山의 老論 名門家 出身이었던 碧初는 黨爭의 根本 原因을 벼슬자리 不足으로 보았습니다. ‘兩班 숫자는 漸漸 많아졌는데 거기에 比例하여 官職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發生한 다툼이 바로 黨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벼슬을 내는, 卽 人士를 推薦하는 자리인 ‘銓郞’을 어떤 쪽에서 맡을 것인가를 두고 競合이 熾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朝鮮時代의 黨爭史를 比較的 公評한 視角에서 敍述했다고 評價 받는 李建昌의 ‘黨議通略’에서도 銓郞 자리를 둘러싼 다툼을 第一 첫 章부터 割愛하고 있습니다. 吏曹銓郞 자리는 높은 品階는 아니었지만, 벼슬을 推薦하는 자리였던 만큼 누가 銓郞에 앉느냐에 따라 權力의 人脈 地圖가 바뀔 수 있었습니다.
1572年 新進사림들로부터 좋은 評判을 받았던 金孝元이 銓郞에 推薦되었습니다. 하지만 金孝元이 젊었을 때 尹元衡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理由로 沈義謙이 反對하여 霧散되었지만, 2年 뒤에는 結局 銓郞이 되었습니다. 1575年 沈義謙의 同生 忠謙이 銓郞으로 推薦되자 이번에는 金孝元이 反對하였습니다. 王室의 外戚이 맡아서는 안 될 자리라는 理由에서였습니다.
以後부터 金孝元을 支持하던 金宇顒,•柳成龍•許曄•李山海•李潑•鄭惟吉• 鄭芝衍 等은 東人이 되었습니다. 金孝元이 서울의 東쪽인 乾川洞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沈義謙을 支持하던 朴淳•金繼輝•鄭澈•尹斗壽•具思孟• 洪聖民•辛應時 等은 西人이 되었습니다. 沈義謙이 서울의 西쪽인 貞陵坊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朝鮮 黨爭史의 序幕을 裝飾하는 ‘東西分黨’의 契機는 銓郞 자리에 對한 競爭에서 始作된 것입니다. 經濟權이 아니라 人事權을 누가 갖느냐에 對한 爭鬪였습니다. 그만큼 人事權을 누가 갖느냐 하는 問題는 東西와 古今을 莫論하고 많은 사람들의 耳目을 集中시키는 問題입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