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野談函

토기 속에서 주운, 진솔선예백장동인

bsk5865 2013. 10. 17. 22:1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0.17 21:59

 

토기 속에서 주운, 진솔선예백장동인 |★....일반 게시판
황성욱 |  http://cafe.daum.net/enkamom/KWfw/13781 

 

진솔선예백장동인(晉率善濊佰長銅印, 보물 제560호)

이것은 청동으로 만든 도장으로 높이가 2.8센티미터에 길이 2.3센티미터로 꼭지는 웅크리고 앉은 짐승이 고개를 처든 채 앞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인면(印面) 주변이 깨진 점으로 보아 실제로 사용하던 관인(官印)으로 추정되며, 3세기경의 마한(馬漢)과 관계가 깊다. 이 동인은 당시의 국제 관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면에는 ’진솔선예백장(晉率善濊伯長)‘이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진대(晉代)의 예백장에게 준 관인(官印)으로 옥새(玉璽)인 셈이다. 이는 중국에서 한(漢)대 이후 사린제국(四隣諸國)의 장(長)에게 관인을 주던 풍습을 알려준다.


함흥차사

도장, 특히 옥새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태조 이성계는 아들 태종에게 옥새를 물려주지 않아 ’함흥차사(咸興差使)‘란 고사가 생겨났다. 도장을 찍는 다는 것은 ‘믿음의 표시‘로 어떤 정황을 기록한 문서를 확인하는 행위이고, 따라서 국가의 중요 문서에는 왕의 권위인 옥새가 찍혀야 효력이 발휘되었다. 왕위를 계승할 때도 옥새를 전달받아야 비로소 임금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이 여러 형제들을 죽인 뒤에 왕권까지 위협하자, 이성계는 왕위만 물려주고는 옥새를 가지고 멀리 함흥으로 가 살았다. 그러자 태종은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옥새를 가지고 궁궐로 되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 환궁을 거부한 이성계는 자기를 데리러 오는 사신마다 죽여 자식에 대한 미움을 앙갚음하였다. 그래서 ‘함흥간 사신은 소식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그 때 죽음을 각오한 남재(南在, 1351~1419)가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지혜가 많았던 그는 매 사냥꾼과 동행하며 함흥 근처에서 짐승 사냥을 하였다.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이성계를 사냥으로 꾀기 위한 술책이었다. 준비를 마친 남재는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암소를 타고 이성계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자 이성계는 곧 그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러자 남재가 급히 땅에 엎어지며 말했다.“벼슬에서 물러나 어떤 매 사냥꾼을 만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재가 사신인 신분을 속이고 매 사냥꾼을 자처하자, 이성계는 매 사냥이란 말에 귀가 솔깃하게 쏠렸다. 그 때 암소가 울었다. “말 못하는 짐승도 새끼가 그리워 우는데 어찌 사람의 인정이 그리도 박절하십니까.” 그는 이성계가 자식을 그리워하도록 부추겼다. 그러자 이성계는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매 사냥꾼이 꿩을 몇 마리 들고 들어와 사냥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천성적으로 사냥을 좋아한 이성계는 갑자기 몸이 근질거렸다. “나도 무료하니 꿩 사냥이나 해 볼까.” 이성계는 매가 꿩을 산채로 잡는 것을 지켜보면서 차츰 남쪽으로 내려 왔다. 사냥에 정신을 빼앗긴 그는 남재가 이끄는 대로 내려와 마침내 포천에 이르러서는 여덟 밤을 잤다. 그 때 이성계가 잠을 잔 곳을 훗날에 ’팔야리(八夜里)‘라 불렀고, 얼마 후 삼각산이 보이자 이성계는 속은 것을 알았으나 마음을 포기했다. 그 후 이성계는 태종에게 옥새를 넘겨주고는 자기도 궁궐을 짓고는 눌러 살았다. 그곳이 지금의 의정부이다.


엿장수가 가져 온 동인

1965년의 어느 날이다. 서울 을지로에 살았던 김동현의 집에 낯선 시골 사람이 대문을 서성거렸다. 그 때는 마침 김동현이 외출을 한 뒤라서 부인 혼자서 집을 지키던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김동현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불상과 선사고분유물을 여러 점 가진 대 수장가로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여기가 김동현 선생댁이 맞습니까?”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진 사람이 남편 이름을 물어 오자, 부인은 바짝 긴장했다. “누구신데요?” “저는 엿장수입니다. 이 집에 오면 물건 값을 후하게 준다고 해서 왔습니다.” 부인은 마음을 곧 진정시켰다. 간판도 없는 집이지만 어떻게 알았던지 엿장수들이 출입을 했다. “그런데요. 왜 그러시지요?” “아, 예. 몇 점의 토기를 가지고 왔는데 좀 보아주세요?”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왔어요.” “잘 아는 고물상을 통해 들었어요.” 그 사람은 수더분한 목소리에 꾸임이 없었고, 더구나 사람을 속이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하는 폼이 도굴꾼의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안심을 하자, 마루에 올라온 엿장수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흔한 토기가 몇 점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옥이 십 여개 나왔다. 값도 별로 나가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어머, 토기들이네요. 이런 것들은 흔해서 돈이 되지 않아요.”부인도 오랫동안 골동품을 보며 살았기 때문에 안목이 높았다. 그러자 엿장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어디서 나온 물건들이어요?” “경북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에서 나왔어요. 밭을 갈다가 나왔는데 제가 가지고 올라온 겁니다.” “그럼 그곳에서 나온 물건이 이것들이 전부여요?” 토기를 잡고서 몸체와 굽 언저리를 살피던 중, 토기를 거꾸로 들자 그 속에 굴러다니는 물건이 보였다. 부인은 급히 그 물건을 집어들었다. 작고 네모난 도장으로 꼭지에는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져 귀해 보였다. “아저씨, 이것은 뭐여요?” 직감적으로 귀한 것이라 생각한 부인은 도장의 요모조모를 살폈다. 도장 아래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흙이 껴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유물에 글자 즉 명문(銘文)이 있으면 귀한 것임은 이미 알던 터였다. 비록 남편은 집을 비웠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회라고 생각 들었다. “함께 나온 물건이요. 만약 사신다면 거져 드리겠어요.” 그 사람은 힘들게 가지고 온 물건을 다시 가지고 내려가기보다는 적당한 값에 팔고 싶었다. “그래요. 그런데 유리옥은 너무 흔해서요.” 엿장수는 도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토기와 유리옥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래 얼마를 주시겠어요?” “음, 토기 값으로 30만원을 드리고, 이 도장 값으로 따로 20만원을 들이지요.” 부인은 남편에게 배워 고미술품에 대해 제대로 가격을 처 주었다. 특히 도장은 공짜로 얻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다른 곳에 가져갔더니 10만원도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소문대로 후하시네요.”

엿장수는 부인을 바라보며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자꾸 찾아올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쐐기를 박았다. “저희 집에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왜요?” “우리는 고물을 취급하지 않아요. 사정이 탁해서 이번만은 응한 거여요.” 그 사람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돈을 받아서 나갔다. 저녁때가 되어서 김동현이 돌아왔다. 부인이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도장을 내 보였다. “이거 귀한 거야. 이 명문 좀 봐.” 김동현은 흥분에 싸여 소리를 질렀다. 도장의 역사로 보아서도 한국 최고의 유물이며 또 일반인의 것이 아닌 옥새 정도의 가치를 지녀 보였다. “귀한 거여요?” “물론이지. 이것은 보물 급은 자신해. 당신의 안목도 대단하구먼.” 부부는 도장을 살펴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것과 토기만 가져왔어?” 김동현은 토기를 매만지다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너무 흔한 것들이라 가치가 없었다. “아니오. 유리 구슬 십 여 개도 함께 가지고 왔는데, 제가 보기에 집에 있는 것들보다 못해 그냥 돌려보냈어요.” “뭐요?” “왜 그러세요?” “여보, 고물은 함께 있어야 하는 거여요. 돈이 되고 안되고는 차후 문제요. 함께 있어야 당시의 생활이나 문화 수준을 비교하여 알 수 있어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기 때문이요.” 김동현은 유감스러워 혀까지 찼다. 부인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그 사람은 어디에 산다고 했소.” “몰라요.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어요.” 불안한 얼굴빛으로 부인이 모기 소리 마냥 말했다. 그러자 김동현은 한참 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체념의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아쉬움과 미련은 가시지가 않았다. 이 동인은 곧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병도(李炳燾)는 1966년 ‘한국 고대사편’ 258항에서 이 유물을 소개했고, 1968년에는 일본의 ‘조선 학보’에도 소개되어 국제적으로 사료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1971년 12월 21일 이 동인을 보물 제560호 지정하였다. 이 동인은 그 후 다른 국보급 문화재와 함께 1982년 이병철에게 양도되어 지금은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참고: 김동현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