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野談函

허드레 취급을 당한, 청화백자죽문각병

bsk5865 2013. 10. 18. 20:13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0.18 16:00

 

허드레 취급을 당한, 청화백자죽문각병 |★....일반 게시판
황성욱 |  http://cafe.daum.net/enkamom/KWfw/13803

 


    청화백자죽문각병(靑華白磁竹文角甁, 국보 제258호) 

    이 병은 백자 병으로는 국내 제일의 명품으로 특히 8각으로 모깍이한 점이 특이하다. 크기도 한 자가 넘는 거물로, 특히 모깍이 수법은 주둥이에서 밑창까지 단숨에 칼로 훑어 내리며 깎아 내는 방법을 썼다. 그 수법이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정교하다. 동체(胴體) 하부에는 지평선을 나타내는 한 줄의 선을 돌려 대지(大地)임을 나타냈고, 그 땅의 기운을 받아 앞뒤로 크고 작은 대나무를 한 그루씩 배치하였다. 따라서 대나무가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듯이 보인다. 백자의 바탕이 흰눈이라면 대나무는 마치 엄동설한에도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의 당당한 기품과도 같다. 또한 백자에 명문(銘文)이 새겨진 것은 매우 귀한데, 이 병의 굽 언저리에는 ‘천(川)’자가, 굽 안 바닥에 ‘정(井)’자가 음각 되어 높은 품격을 인정받았다. 유약은 빙렬이 거의 없으며 담청색을 띠었다. 하지만 주둥이 부분이 수리되고, 굽다리가 높고 모래를 받친 흔적이 남아 있어 옥에 티가 끼인 것과 같다.


    모깍이를 한 백자 병

   1935년 무렵이다. 이 때는 백자보다는 고려 청자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컸던 시절이다. 일본인들은 고려 청자를 독식하며 일 만 원대에서 거래했지만 백자로는 2천원 이상으로 거래한 적이 없었다. 당시 기와 집 한 채 값이 약 2천 원 정도 했을 때이다. 젊어서부터 금속 유물에 밝았던 차명호는 어느 날 시청 앞에 있던 ‘우고당(友古堂)’에 들러서 진열된 고미술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김수명(金壽命)이었다. 그 때 차명호의 눈이 불화살처럼 날아가 박히는 백자 병이 있었다. “이 병은 특이하게도 모깍이를 했네요.” “누가 요즘 백자를 처더보기나 합니까. 청자나 값을 치지.” 차명호는 도자기에는 밝지 못했으나 이래저래 고미술품을 다루다 보니 도자기 또한 풍월을 읊을 정도는 되었다. 비록 동대문 근처의 호텔에서 비운에 숨을 거두었지만 지금도 부인되는 오영신(吳榮信)이 국보급 불상을 여러 점 수장한 대수장가이다. "주둥이 부분이 수리되었어요.“ 김수명 또한 이 병의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청자가 널려 있고 수리까지 된 백자인지라 마음에 두고 않았다.

   그러나 차명호의 눈에는 대나무 그림도 멋있고, 모양이 특이하고, 때깔도 손색이 없어 귀하게 보였다. 병을 잡은 채 이리저리 돌려보던 차명호가 소리를 질렀다. “굽 언저리에 글자가 있어요. ‘천(川)’자와 ‘정(井)’자 같은데요.” 백자에 명문이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해 사고자 결심을 굳히는 소리였다. 잘 만하면 한몫을 톡톡히 잡을 수 있어 보였다."이 병을 내게 팔아요.” “그렇시다.” 명품의 고미술품이 은밀한 장소가 아닌 가게 내 진열장에 뒹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나치거나 우연히 들린 손님이 보라고 진열한 것이다. 명품은 진열된 다른 물건까지도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무리 많은 고미술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중에 명품이 없으면 모두가 빛을 잃는다. 장수가 없는 오합지졸의 병졸로 싸잡아 취급당한다. 그러나 허드레 고미술품 중에서도 한 점의 명품만 있으면 전체가 빛을 발한다. 골동상은 고미술품을 절대로 낱개로 팔지 않는다. 명품을 끼운 전체를 묶어 파는 것이 개개의 값보다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계(群鷄)는 일학(一鶴)을 당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골동계의 생리이다.

    또 손님의 발길을 가게에 붙들어 놓는 구실을 한다. 고미술품에 빠진 사람이 만약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면, 그는 그 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돈이 모자라면 수시로 들러 작품을 감상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수중에 넣을 결심을 반복한다. 그만큼 고미술품은 사람을 잡아 두는 마력이 있다. 골동 인생만큼 만족을 모르는 인생도, 또 마음 졸이며 사는 인생도 없을 것이다. 사고 싶은 고미술품은 끊임이 없으나 정작 돈과 인생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인이 가치를 모르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특히 고서화나 전적류쪽에 많다. 서화는 워낙 작가가 많고, 그들의 호(號)도 다양해 웬만한 전문가도 그 전체를 꿰뚫어 보기는 어렵다. 또 낙관이나 필치로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함정에 빠질 염려가 많다. 고서화만큼 위조품이 많은 것이 없다. 현재 시중에 나도는 추사(秋史)의 작품과 흥선 대원군의 난 그림은 90% 이상이 공공연히 가짜라고 전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가짜와 진짜가 구분 없이 통용될 정도다. 중국의 경우 유명한 화가가 있으면, 어려서부터 그림을 모사 하는 기술을 배우고 진품과 똑같이 그려야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 어느 것이 진짜인지 그림만이 말할 수 있는 정도다. 또 돈벌이를 위해 가짜를 만드는 사람이 직업적으로 생겨나 1940년 대 후반에는 서화를 위조하는 전문 공장이 홍콩에 생겼다고 한다. 몰려드는 얼치기 수집가에게 진품이라며 비싼 값으로 파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얼마나 받겠소.” “1천 원만 내시오.” 대단한 거금이다. 주인도 제대로 가격을 부른 것이다. 만약 수리만 되지 않았다면 5천 원은 너끈히 불렀을 것이다. 젊은 차명호는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스스로는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송(一松) 이인영(李仁永). 평양 숭실전문학교 사학과 교수로 박봉의 생활고를 견디며 「삼국유사(三國遺史)」를 소장했던 사람이다. “이 백자는 내가 꼭 살터이니 절대로 팔지 마시오.” 차명호는 안달이 들어 주인 김수명에게 여러 번 다짐을 해 두었다. “어차피 요즘 누가 백자를 처다 나 봅니까.” 주인은 차명호의 얼굴을 살피며 믿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주일만 여유를 주세요, 꼭 돈을 구해 오겠소. 꼭 기다리세요. 예.”



    생사조차 모르는 이인영

   차명호는 즉시 평양으로 달려가 이인영의 사랑방으로 들이닥쳤다. “일송 선생님, 대단한 백자가 나타났어요. 1천 원 달랍니다. 팔각으로 모깍이한 병인데 크기도 한 자가 넘고 때깔이며 대나무가 기가 막힙니다.”차명호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흥분해 외쳤다. 이인영도 덩달아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요. 정말 귀한 것인가 보네요.” 말만 듣고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는 수중에 명품인 백자사각주전자(白磁四角注剪子)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제 팔각 병까지 입수하면 백자로는 당대의 대 수장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인영은 교수인 신분으로 그만한 돈이 없었다. “마침 돈이 없소. 며칠만 기다리세요. 어디 가서 급전이라도 빌려 보겠오.” 그 날로 이인영은 돈을 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가지고 있던 고서적을 팔 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서적을 알아주지 않았다. 여러 날을 지체한 뒤에 급전을 빌려다가 차명호에게 주었다. 그만큼 이인영은 이 백자 병에 대해 애착이 강했다. 돈을 받은 차명호는 즉시 서울로 달려와 이 병을 입수했다. “세상이 바꾸면 아마 이 병은 나라의 보물이 될 지도 모릅니다. 잘 간수하시오,” 백자 병을 오동상자에 포장하며 김수명이 차명호를 바라보았다. 차명호는 두둑한 구전을 기대하며 밤을 새워 평양으로 올라갔다. “차 선생, 수고했어요. 정말 대단한 명품이군요.”

   이 병은 유약이 투명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전반에 경기도 광주(廣州) 금사리(金沙里)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형태가 그 무렵 백자 중에서 가장 으뜸의 거물이다. 이인영은 가슴이 벅차도록 흥분해 차명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에는 최선을 다한 구전이 쥐어져 있었다. 그 후 이 백자 병은 이인영이 소장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소련 군정이 북한에 들어서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인영은 곧 서울로 월남했다. 월남을 하며 그는 그 동안 수집했던 귀중한 서적들은 모두 싸 가지고 내려왔다. 그 중에는 삼국유사․고려사․공신록권 등 이 나라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귀중본이 많았다. 서울에 정착한 그는 생활의 터전이 없어 어렵게 살았다. 그러자 소장했던 고미술품과 고서적을 대부분 1948년 남산 고미술품 대전시회를 통해 처분했다
.

   천하의 보물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이병직이 낙찰 받았고, 이 백자 병은 누구에게 팔렸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6.25 난리 통에 이인영은 납북되었다. 미처 피난을 갈 틈도 없이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에게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혀 지금까지 생사조차 모른다. 이 병은 현재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1991년 9월 20일 국보 제258호로 지정 받았다. 국보 지정 보고서는 원광 대학교의 윤용이(尹龍二) 교수가 썼는데, 글이 자못 아름답다.

   〈…이 병은 활달하면서도 운치 있는 죽문(竹文)으로 병의 형태에 걸맞은 그림을 갖추고 있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선비들의 기개를 잘 나타낸 이러한 각병은 조선 후기 문화가 꽃피는 18세기 전반의 시대적인 모습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보여진다.〉

(참고: 곽영대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