さよならルンバ-二葉あき子 作詞 藤浦 洸 作曲 仁木多喜雄
一 このまま お別れしましょう あなたの言葉のまま ダリアの花びらさえも 恋の時すぎりゃ 色はさめる ああ さめた後から いくら泣いて泣いて 泣いてみたとて かえらぬ 恋の終わりは しおれた 花びら
二 それでは これでさよなら あなたの言葉のまま タバコのすいがらのように 道に捨てられた あたしなのね ああ つらいけれども いくら泣いて泣いて 泣いてみたとて かえらぬ 恋の終わりは はかない けむりよ さよなら さよなら さよなら
歌の背景 이 노래는 1948年(昭和23年) 10月에 Colombia에서 発売되었습니다. 昭和20年代 前半에는, Blues나 rumba가 붙는 히트曲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1948年에만, 이 노래 外에, 「バラのルンバ」「懐かしのブルース」「君忘れじのブルース」等이 発売되고 있었습니다.
rumba는 敗戦 後의 一種 開放的인 밝기에 매치된 것, Blues는 日本人 本來의 感傷主義를 刺戟했던 것이 히트의 큰 要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さよならルンバ」의 歌詞는 sentimental하군요. 「バラのルンバ」도 二葉あき子가 노래하였습니다. 두 作品 모두, 그女의 깊이가 있는 女声의 声域에 魅力이 있습니다.
二葉あき子(ふたばあきこ) 그는 1915年 2月 2日 広島駅의 바로 北側 広島県 広島市 大須賀町 二葉(現在의 東区二葉の里)에서 태어났습니다. 芸名은 二葉の里에서 安芸の国의 現地로부터 잡은 이름이며. 本名은 加藤芳江입니다.
広島県立 広島高等女学校(現 広島皆実高等学校)를 나와 1935年 東京音楽学校(現 東京芸術大学 音楽学部) 師範科를 卒業하였습니다 音楽学校在籍中 東京音楽学校의 奏楽堂에서 同校 期待의 歌手 増永丈夫의 아름다운 baritone을 듣고 感銘을 받습니다.
그 増永丈夫는 벌써 藤山一郎라는 流行 歌手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레코드 데뷔는, 在學 中에 Colombia로 吹込한 敎育 레코드. 卒業 後, 故鄕의 広島 三次高女(現 広島県立 三次高等学校)에서 教鞭을 잡습니다. 教師時代에도 上京하여 学校用 教材레코드를 吹込하였습니다.
1936年(昭和11年), 봄에 Colombia의 專屬이 됩니다. 「愛の揺り籃」가 最初의 레코드였습니다. 「あの夢この夢」「月に踊る」「乙女十九 」等에서 世上에 알려져 1939年, 松竹映画「春雷」의 主題歌「古き花園」이 大히트 하면서 人気歌手의 声価를 얻습니다. 이 曲으로 Blues를 노래하는데 自信을 가져 以後 많은 블루스를 히트 시키게 되었습니다. 戰時中에는 歌手로서 慰問 活動을 했으며. 戦時下인 1943年(昭和18年), 結婚하여 長男을 낫지만 곧바로 離婚하고. 그 後로는 自立의 女子로서 살았습니다.
1945年8月6日, 오랜만에 帰郷하기 爲해, 広島에서 芸備線의 汽車를 타고,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 原子 爆彈이 投下되고 터널을 나오면서, 버섯구름과 落下傘을 보았다고 합니다.
戦後가 되어, 「別れても」「夜のプラットホーム」「恋の曼珠沙華」「さよならルンバ」「村の一本橋」 等 많은 히트曲을 불렀습니다. 1948年의「水色のワルツ」는, 淸雅한 멜로디에 二葉あき子의 歌唱이 맞아, 사람들에게 빛을 내렸습니다.
日劇에서는 같은 Colombia의 淡谷のり子, 笠置シヅ子, 渡辺はま子等과 자주 舞台에 섰다고 합니다
1955年(昭和30年) 前後에는 高音이 나오지 않아, 意気를 喪失하고 帰郷하여. 칼로 自殺을 企圖했지만 未遂에 끝 였습니다. 그 後, 作曲家의 服部良一에게서「高音だけが歌じゃない」라는 激勵로 復歸하였습니다. 스스로 低音 発声法을 攄得하여 NHK紅白歌合戦에는 1951年의 第1回부터 1959年의 第10回까지 10回 連続으로 出演했습니다. 그 中에서 第6回부터 第10回까지는 二葉の歌のラジオ의 音声이 現存되어 있습니다 第6回에서의 代表曲의 하나인「バラのルムバ」로 紅組トリ를 맡는 等, 渡辺はま子・淡谷のり子・松島詩子・笠置シヅ 와 對等한 創世記의 紅白을 代表하는 女性 스타이기도 했습니다.
1982年에 紫綬褒章, 1990年에는 勲四等 瑞宝章을 受章하고. 1984年에 親舊 伊藤久男의 一周忌에 胡美芳, 池真理子, 並木路子, 安藤まり子와 「五人会」를 結成했습니다.
懐メロ歌手로서 21 世紀를 넘나들며 活躍했지만, 2003年 여름에 팬의 모임에서 隱退를 宣言하였습니다. 難聽이 進行된 影響으로 밴드의 演奏의 소리가 알아 듣기 힘들어지는 것이 隱退의 理由였다고 伝해지고 있습니다. 現在는 広島에 帰郷해 余生을 보내고 있습니다. 淡谷のり子、藤山一郎、霧島 昇등과 戦前・戦中・戦後를 代表하는 巨物 歌手의 大部分이 他界하는 中에, 그女는 그래도 오래 사는 巨物 歌手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