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남인수///外部大臣이 獨逸 領事에게 暴行 當하다(D)|★....演歌 게시판
황성옛터-남인수 작사 왕평 작곡 전수린
一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 노나 아 괴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워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二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 노나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 메여 왔노라
三 나는 가리오 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어도 아 한 없는 이 설음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엣 성터야 잘 있거라
外部大臣이 獨逸 領事에게 暴行 當하다 1898년 주한 독일영사 크리인(口麟•F. Krien)이 외부대신 서리 유기환(兪箕煥)을 폭행한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6월 29일 크리인은 유기환을 독일영사관으로 불러 문밖에 서 있는 유기환의 팔을 내리쳤다. 이유를 묻자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외부(外部: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보낸 공문 두 장을 마당에 내팽개쳤다.'(독립신문 1898.7.2., 7.4., 7.6., 7.7., 매일신문 7.1., 7.2.) 전임 대신 이완용이 강원도 금성에 있는 금광 채굴권을 허가해 주기로 약속했는데도 유기환이 거절했다는 이유였다.
외부대신이 외국 영사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은 나라에 대한 모욕이었지만, 국가의 위신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하였는가를 드러낸 사례였다. 당시 독립신문과 배재학당 학생회가 발행하던 매일신문은 "독일영사는 남의 나라 하인에게도 하지 못할 무례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분개했다. 만민공동회도 대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정부에 보냈지만, 대한제국 정부가 이를 문제 삼거나 항의했던 흔적은 없다.
열강이 이권 탈취에 혈안이 되어 몰려오던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였다. 궁핍한 백성으로부터 더 이상 세금을 거둘 형편도 못 되어 국가 운영도 힘에 겨웠다. 황제와 측근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조달하기 위해 국익을 헐값에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한 영국 대리공사 가빈스(J.H.Gubbins)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은 열강의 이권 사냥꾼과 차관(借款) 알선꾼들의 새로운 사냥터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주한 영국공사 조단(J.N.Jordan)이 주일 영국공사 새토(Satow)에게 보낸 보고에 따르면, 한국의 외부대신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외교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량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황실과 외국 공사관 사이에 드리워진 하나의 장식적 휘장'으로서, 황제로부터 외국 외교관들을 격리시키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 국제정세에 어둡다 보니 대외관계 실무 면에서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황실도 만족시키고 외국인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했기 때문에 한 달이 멀다 하고 교체되었다. 외교정책에 일관성이 있을 리 없었다.
1902~1904년 사이 외부대신은 스무 번이 넘게 바뀌었다. 같은 사람이 잠시 물러나 대리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가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1902년에는 박제순에서 유기환(3.15.), 최영하(4.29.), 유기환(5.31.), 최영하(6.21.), 유기환(7.1.), 최영하(8.13.), 조병식(10.17.)으로 이어졌고, 1903년 이도재(1.30.), 이중하(7.20.), 이도재(7.29.), 이중하(9.1.), 성기운(9.15.), 이중하(9.21.), 이지용(12.23.)으로, 1904년 박제순(1.25.), 조병식(3.12.), 김가진(4.1.), 이하영(4.19.), 윤치호(8.22.), 이하영(9.2.)으로 정신없이 바뀌었다(조병식의 행차 모습,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94.9.1.).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MacDonald)는 조선의 빈번한 외부대신 교체가 '어떤 원칙의 결과가 아니라 어려운 자리로부터 도피하려는 소망 때문'이라며 '조선 궁중은 괴상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음모로 가득 찼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외교의 부재는 망국으로 이어졌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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