もずが枯木で-ボニー・シャックス 作詞 サトウハチロー 作曲 徳富繁
一 もずが枯木で鳴いている おいらは藁をたたいてる 綿ひき車はお婆さん コットン水車もまわってる
二 みんな去年と同じだよ けれども足りねえものがある 兄(あん)さの薪割る音がねえ バッサリ薪割る音がねえ
三 兄さは満州へ行っただよ 鉄砲が涙で光っただ もずよ寒いと鳴くがよい 兄さはもっと寒いだろ
歌の背景 이 詩는, 1935年(昭和10年) 10月 10日에「大日本雄弁会講談社」(講談社의 前身)으로부터 發行된 サトウハチロー著「僕等の詩集」에 揭載된 것인데. 이것을 읽고 感動한 茨城県의 中学校 教師 徳富繁가 멜로디를 붙였습니다.
이 詩에 非戦的인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인가, 別로 퍼지지 않고, 茨城県 内에서만 民謠와 같이 불려지고 있다가. 敗戰 後, 노래 運動이 波濤를 타고, 全國에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만. 이 詩에는 1個의 疑問이 있습니다.
이 詩를 텍스트(text)로서 읽는다, 卽 筆者의 意圖나 作成時의 事情이라는 것을 排除하고, 自救의 意味만을 꺼내 보면, 傳해져 오는 것은, 反戰이라고 말할 만큼 强하지는 않습니다만, 非戦 또는 厭戦의 message입니다.
1番과 2番에서는, 兄이 死亡한 외로움이 表現되고 3番에서는, 滿洲에서의 軍務의 嚴格함이 表現되고 있습니다.
疑問이라는 것은, 1935年인 이 時期에, 이러한 非戦的인 詩가, 어찌해 체크되지 않고 發表되었을까 하는 点입니다. 日本은, 1931年의 柳条湖事件을 口実로 満州事変을 일으켰고, 1932年에는 満州国 建国을 宣言하고, 1933年에는 国際連盟을 脱退하는 等, 国際的 孤立이 急速히 自招해 갔습니다.
게다가 1937年에는, 蘆溝橋事件을 契機로 本格的인 對 中國 戰爭에 突入했으며. 이 Fascism時代에, 社會主義 思想은 勿論, 自由主義的인 言動도 嚴히 統制되었습니다.
戰爭遂行이 國策이었으므로, 反戰 思想뿐만이 아니라, 非戦 厭戦的인 內容도 체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해, 이 詩는 檢閱을 通過했을까요. 그때 이 詩가 發表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戰後에 불러진 것과 큰 幅의 差異가 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想像을 했습니다.
여기서, 原詩를 照査해 보려는 생각이 났습니다. Web上에는「初出は講談社の少年倶楽部」라고 하는 情報가 많았기 때문에, 講談社의 資料 센터에도 찾아가, 1925年 前後의 같은 雜誌의 백 넘버(Back Issues)를 照査했습니다.
サトウハチロー의 詩나 文章은 每號에 실려 있었습니다만, 肝腎의「もずが……」는 끝내 發見되지 않았습니다. 余談입니다만, 講談社의 資料 群은, 電子 圖書化해 두지 않으면 貴重한 大衆文化 資料가 早晩 間에 썩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念慮하고 있습니다.
抛棄하지 않고, 「サトウハチロー記念館」(岩手県北上市)에 問議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同 記念館의 佐藤四郎 館長(ハチロー아들)으로부터, 처음의 詩를 複寫하여 關聯情報를 함께 보내왔는데. 몇 個所인가 差異点은 있지만, 字句로부터 傳해져 오는 것이 非戦 또는 厭戦의 message라고 하는 点에는 變化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 檢閱을 通過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 外에는 없습니다. 「この程度の内容なら、問題にされなかったのでは……」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戰爭 前의 檢閱은 매우 까다롭고, 6年 後에 對美유럽 戰爭이 始作되고 나서는, 단지 內容이 軟弱하다던가, 슬픔이나 離別을 取扱하고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 出版•上演이 禁止될 程度였습니다.
1935年 前後에도, 이 程度 뚜렷한 非戦 厭戦의 message가 있으면, 반드시 체크되었을 것입니다. 또 偶然히 檢閱官의 눈으로부터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이 詩로부터 非戦 厭戦의 nuance를 읽어낼 수 없는 만큼, 檢閱官이 国語力이 不足하다고는 생각할 수 가 없고…….児童用의 詩集으로도 想像할 수 있습니다. サトウハチロー가 이 詩를 어떤 생각으로 썼는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 出征 한 兄의 몸을 생각하는 男同生의 氣分을 素朴하게 表現한 것이, 結果的으로 非戦 厭戦 message로 나타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가 反戰主義者가 아니었던 것은, 戦時中에 戦争協力的인 児童詩를 몇 個인가를 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文章이나 詩로 戰爭에 協力한 것은, 그에게만 局限한 것이 아니고, 많은 文學者나 詩人이 戰爭을 讚美해, 그 遂行에 協力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サトウハチロー가 戦時中에 쓴 児童詩는, 戰後, 戰爭 協力的인 語句를 變更하여, 오래도록 愛唱되었습니다. 그런데 戰後, 一般的으로 불려지고 있는 歌詞가 原詩와 다른 것이 判明된 것은, 1960年代의 일입니다.
佐藤四郎 館長의 便紙에, 다음과 같은 內容이 있었습니다. 1960年代에 king record(講談社의 傍系会社)에서, chorus group의 ボニージャックス(男性4人의 合唱団)가「もずが枯れ木で」를 recording하게 되었을 當時. 長田暁二director가, 歌詞가 原詩와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サトウハチロー에 問議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對答했다고 합니다. 「確實히 내가 最初로 쓴 것과는 대단히 差異가 나지만, 左翼의 團體 等이 茨城県 民謡로서 노래하고 있는 것만 訂正 받으면, 모두가 親하게 지내고 있는 歌詞로 좋지 않은가」音樂에서도 美術에서도, 수수께끼가 많은 作品만큼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이 노래도, 그러한 作品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1番의「藁をたたく」은 나무망치로 벼 짚을 두드려 부드럽게 하는 作業입니다. 이 作業을 해 두지 않으면 벼 짚의 줄기가 弱해지지 않습니다.
「縄をなう」은, 벼 짚을 合쳐서 꼬아 한 개로 하는 作業입니다. 1950年代 初까지, 어느 農家에서나, 다음 해의 農事에 使用하는 새끼나 ムシロ 俵 カマス 等을 만들어 두는 것은, 겨울 동안의 重要한 일이었습니다. 1番의 綿ひき車는, 一般的으로 綿繰り車로 木花씨를 빼내는 것을 씨애라고 합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