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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일루-남백송///韓國을 도운 英 外交官 헨리 코번

bsk5865 2014. 7. 17. 08:34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4.07.17 06:33

 

일자일루-남백송///韓國을 도운 英 外交官 헨리 코번(D)|★....演歌 게시판

黃圭源 | 1 http://cafe.daum.net/enkamom/KTiH/5331 


일자일루-남백송


일자일루-남백송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그렇게 야속히 도 떠나 간 임을
잊자다 또 못 잊고 그리는 마음
한 글자 한 눈물에 젖는 글월을
보낼까 쓰건마는 부칠 길 없네


못 보낼 글월 적던 붓대 멈추고
하늘가 저 먼 곳에 꿈을 부르니
눈물에 젖는 글월 얼룩이 저서
가슴속 타는 불에 재가 되려네


韓國을 도운 英 外交官 헨리 코번

을사늑약 체결 3일 뒤인 1905년 11월 20일 헨리 코번(Henry Cockburn) 〈작은 사진〉 주한 영국 대리공사가 서울에 부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견제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지만, 기울어진 약소국의 운명을 돌이킬 힘은 부족했다.

코번은 1880년 3월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뒤 줄곧 중국에서 근무하다 1905년 주한 영국 공사관으로 부임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첫 번째 일은 '영국공사관'을 '총영사관'으로 격하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한국에서 영국 총영사관은 독자적인 외교 교섭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처지를 동정했던 코번은 일본통감부에 호감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당국과 친밀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또 본국에는 영일(英日)동맹을 중시했던 외교방침에 벗어나는 태도로 비쳤다.

코번이 고종을 알현한 날은 1905년 11월 29일이었다. 다음 날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한국이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영국이 도와 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일본군과 충돌했다.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큰 사진〉(프랑스 '르 프티 주르날', 1907년8월4일자에 실린 사진 모사화)으로 많은 시민이 다치고 1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민영환에 이어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도 자결하면서 코번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 지방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다.

코번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문제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裴說: E.T.Bethell)을 한국에서 추방하라는 일본의 요구였다. 배설은 통감부로부터 두 번(1907년, 1908년) 기소당했다. 배설의 첫 번째 재판은 코번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영사재판을 진행했다. 코번은 영국의 치외법권을 내세워 배설을 옹호했다. 코번이 일본과 가장 격렬하게 충돌했던 사건은 1908년 7월 국채보상금 횡령혐의로 구속된 신보의 총무 양기탁 재판 때였다. 통감부가 양기탁을 구속하자 코번은 일본과의 외교분쟁을 감수하면서 양기탁을 보호하려 했다. 양기탁은 영국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의 구속은 영국인의 영업을 방해하는 행위가 된다는 논리였다.

그는 일본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영국 외무성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결국 한국 근무를 마지막으로 1908년 9월 15일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이듬해 7월 16일자로 사임하여 29년에 걸친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조기 퇴직은 한국을 도와주려다 맞은 불운이었다.

코번과 한국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손자 패트릭 코번은 런던의 권위지 '인디펜던트'의 외교담당 대기자로 활동하면서 2007년 12월 6일자에 '헨리의 전쟁-강제 인도에 반대한 투쟁'이라는 기사를 썼다. 할아버지 코번이 양기탁을 일본에 넘기지 않기 위해 일본과 대결하던 이야기였다. 이라크를 비롯한 전쟁터를 누비던 기자 패트릭은 할아버지가 떠난 지 100년 만인 2008년 11월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