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내 고향-남백송 작사 박두환 작곡 김기태
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 메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最初의 西洋式 圓形劇場 協律社 19世紀까지만 해도 우리 傳統 演戱에는 劇場이라는 槪念이 없었습니다. 판소리•假面劇•舞踊•줄타기•땅재주 等은 特別한 舞臺가 必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멍석만 깔면 그게 舞臺였습니다. 따라서 劇場 設備도 發達하지 않았습니다.
韓國 最初의 西洋式 劇場은 1902年 8月 서울 夜珠峴에 세워진 協律社입니다. 夜珠峴은 지금의 貞洞 새문안敎會 近處라고 傳해집니다. 이두현 서울大 名譽敎授는 著書 '韓國演劇史'에서 '國內 最初의 室內 常設劇場이자 皇室劇場(國立劇場)인 協律社가 開館하면서 新劇史의 첫 페이지가 열렸다'고 썼습니다.
協律社 設置와 關聯, 學界에서 大體로 받아들여지는 說은 六堂 崔南善(1890~1957)의 主張입니다. 그에 따르면 協律社는 光武6年(1902年)에 京城에서 高宗 皇帝(1852~ 1919) 卽位 40年을 紀念하는 慶祝式을 擧行하기 爲해 세워졌습니다. 奉常寺(祭祀를 主管하는 官廳)의 南쪽을 터서 콜로세움처럼 벽돌로 둥그렇게 지은 小劇場이었습니다.
유민영 檀國大 碩座敎授는 "판소리를 좋아했던 高宗 皇帝는 그림과 글 等 文化에 밝은 指導者였다"면서 "協律社 內部는 한쪽에 西洋式 舞臺가 있고 平平한 바닥에서 公演을 觀覽하는 構造였을 것으로 推定된다"고 말했습니다.
全國에서 170余名에 이르는 藝人들이 協律社에 모였스니다. <사진>(協律社 公演團 모습) 豫行演習을 했고 等級別로 給料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 콜레라가 流行해 가을로 豫定됐던 40周年 慶祝式이 이듬해로 延期되면서 協律社는 商業劇場으로 바뀌게 됩니다.
協律社 1號 公演은 ' 笑春臺遊戱'였습니다. 入場券은 누런 종이로 된 1원짜리 上等票, 붉은 종이로 된 70錢짜리 中等票, 푸른 종이로 된 50전짜리 下等票 等 세 가지였습니다. 協律社가 妓生과 광대의 管理機關 노릇을 하면서 商業性을 强化하자 評判은 점점 나빠졌고 廢止하라는 上疏文이 올라왔습니다. 1906年 4月 協律社는 門을 닫았습니다.
當時 協律社의 外觀을 記錄한 寫眞 資料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建物을 改 補修해 만든 私說劇場 圓覺寺 寫眞<사진>(협률사 자리에 붉은 벽돌로 리모델링한 원각사)을 보면 建物은 圓뿔形입니다. 圓覺寺에서는 1908年 11月 15日 韓國 最初의 新劇으로 評價 받는 '銀世界'가 公演됐습니다. 林芳蔚(1904~1961) 名唱의 外三寸인 金昌煥(1854~1927)이 主人公을 맡았습니다.
韓國 最初의 常設 映畵管으로는 1907年 門을 연 서울 鍾路의 團成社가 있습니다. 1934年 서울 太平路에 多目的 會館으로 開館한 府民館은 1950年 國立劇場을 始作으로 國會議事堂 等을 거쳐 現在는 서울市議會議事堂이 됐습니다. 解放 以後 門 연 代表 公演場으로는 1961年 서울 市民會館(現 世宗文化會館), 1975年 서울 奬忠洞 國立劇場 等이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