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의 외로운 손-남인수 작사 반야월 작곡 박시춘
一 눈 쌓인 추풍령 고개 위에 서있는 외로워라 저 길손 눈물젖은 보따리 저고개 넘어서면 차디찬 타향산천 부모형제 두고서 어디 가느냐
二 고향을 떠날 때 울고 울든 우리님 날아가는 저 기럭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무정타 말해다오 사나이 굳은 결심 성공하면 가리다 고향 가리다
三 까치 떼 우짓는 날이 저문 황혼길 외로워라 저 길손 발걸음도 바쁘다 주막집 등잔불에 어리는 고향생각 봄이오면 가리다 찾아 가리다
毁損된 배설의 墓碑 한강을 굽어보는 서울 양화진 언덕의 외국인 공동묘지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배설(裴說•E.T.Bethell)<오른쪽 사진•배설 일가로 맨 왼쪽부터 배설, 부인, 아들>이 잠들어 있다. 그런데 무덤 앞 비석의 뒷면은 비문이 깎인 이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왼쪽 사진〉. 비석도 배설이 생전에 겪었던 수난 못지않은 시련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배설이 영국 '데일리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처음 왔던 날은 1904년 3월 10일, 죽은 날은 1909년 5월 1일이었다. 나이 37세.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永生)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한 맺힌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은 1910년 4월에 시작되었다. 모금을 알리는 아무런 광고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리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교포들의 성금 89환 60전이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모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신보, 1910.4.1.). 5월 10일에는 양기탁(20환), 박용규(5환), 임치정(5환), 신채호(2환), 장도빈•옥관빈•이교담(각 1환) 등 신보사에서 함께 일했던 인물들과 각지의 이름 모를 독자들이 1환, 2환 또는 몇십전씩을 내놓기 시작했다. 모금은 8월까지 이어졌다. 하와이의 '국민회' 서기 한범태(韓範泰)는 10월에 10전을 황성신문으로 보내기도 했다.
짧지만 정의로웠던 배설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배설이 죽은 지 1년 뒤인 1910년 6월, 비석이 완성되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대한매일신보사장 대 영국인 배설의 묘'라 쓰고 뒷면은 당대의 논객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긴 한국식 비석이었다.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공(公)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먹을 휘둘러서 이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公)의 공다운 점이요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원문은 한문)
이렇게 시작된 비문에는 배설의 약력과 그가 재산을 털어 신문의 운영에 보태면서도 "용왕매진하여 감히 기휘(忌諱: 꺼리거나 두려워 피함)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분분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고 썼다.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명논설 '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쓴 장지연이 배설을 위해 쓴 비명(碑銘)이다.
배설은 죽은 후에도 일제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이미 새겨진 비문을 깎아 없애는 옹졸한 짓을 저질렀다〈왼쪽 사진 횐 부분〉.
편집인협회가 전국 언론인들의 성금을 모아 작은 비석 하나를 1964년 4월 '신문의 날'에 세웠다. 서예가 김응현의 글씨로 깎인 비문을 복원한 것이다. 상처는 남아 있지만 오히려 후세에 말 없는 교훈을 던지는 비석이 된 것이다. 장지연은 이렇게 끝맺었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 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