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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슬픈 플렛트홈-남인수///安東 儒學者 李相龍, 鴨綠江을 건너다

bsk5865 2014. 7. 25. 13:11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4.07.25 06:21

 

이별의 슬픈 플렛트홈-남인수///安東 儒學者 李相龍, 鴨綠江을 건너다(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369 


이별의 슬픈 플렛트홈-남인수


이별의 슬픈 플렛트홈-남인수

작사 천봉 작곡 백영호


그 사람 잊어야지 그 이름도 잊어야지
행복을 빌어주고 떠나야 하는
정거장 대합실에 내 청춘이 외로워
타향 길 밤 열차야 손을 잡고 작별 인사
아~ 주고받을 사람도 없네


고향도 님도 잃고 마음 둘 곳 어드메뇨
천리길 차표 한 장 무거운 발길
바람 찬 플랫트 홈 트렁크를 들고서
서러운 운명이라 기적 소리 슬피 울 때
아~ 마후라에 눈물이 젖네


나 혼자 떠나 간다 밤 열차에 몸을 싣고
미련이 남은 사랑 한이 되어도
세월이 흘러가면 잊을 날이 있으리
담뱃불 연기 따라 그림자는 사라지고
아~ 유리창에 밤비가 오네


安東 儒學者 李相龍, 鴨綠江을 건너다

'칼날보다 예리한 저 삭풍/ 차디차게 내 살을 에는구나/ 살 도려냄은 참을 수 있건만/ 애 끊어짐 어찌 슬프지 않으리.'

1911년 1월 한겨울 안동의 유학자 이상룡(李相龍, 1858~1932)〈큰 사진〉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지은 시이다. 이상룡은 고성 이씨 종손으로 안동의 대부호였으며, 퇴계학통의 적통을 계승한 유학자였다. 국운이 기울자 퇴계학파의 의리정신으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신하면서 가산을 바쳤다. 그는 1905년 1만5천금으로 가야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9년에는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을 펼쳤다. 그가 안동의 혁신 유림들과 함께 세운 '협동학교'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그는 가산을 정리한 뒤 일가친척을 거느리고 집단으로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때 '서사록(西徙錄)'이란 일기를 남겼는데, 일기에서 "국치를 당하여 죽음을 결행하지 못한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대장부라면 철석같이 굽히지 않는 태도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라며 "게다가 간도는 단군의 후예, 고구려의 옛 땅이니 결코 이민족의 땅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내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는 1909년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말부터 1911년초 사이 이회영 이동녕 김창환 여준 등 각도의 대표적 인사 100여명이 길림(吉林) 유하(柳河)의 삼원보(三源堡)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이상룡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또 한 편의 시는 강인한 투쟁의지를 보여준다.

'내 밭과 집을 벌써 빼앗고는/ 내 처자까지 넘보누나/ 차라리 이 머리를 베일지언정/ 무릎 꿇어 노예가 될 수는 없도다.'

이상룡은 도강 직후 서간도에서 이회영 이동녕 등과 함께 교육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新興)강습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성장하여 2000명 이상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여기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이상룡은 1919년 서간도의 독립군 부대인 서로군정서 독판이 되었고,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상룡의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10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다. 동생 이상동,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및 조카 3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외숙 권세연도 의병장이었으며 처가 역시 독립운동가 가문이었다. 그는 종손으로서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독립운동에 바쳤기 때문에 해방 후 후손들의 생활은 많은 곤란을 겪었다. 손주 며느리 허은 여사〈작은 사진〉에 따르면,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큰아들과 외동딸은 소학교 졸업 후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다녀야 했고, 막내아들은 납부금을 못내 중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허은 여사는 "이런 생각을 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선대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고 했다.(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일생을 구국운동에 헌신하고 재산마저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친 이상룡 선생의 후손들을 국가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