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초-금사향 작사 김다인 작곡 박시춘
一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二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내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차네 이 바닥의 정든 사람들 어디로 가네 전해 오던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소설과 신문만평을 도입한 오세창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개화기 '한성주보'(1886)의 제작에 참여한 이래, '만세보'(1906.6.17.∼1907.6.29.)와 '대한민보'(1909.6.2.∼1910.8.31.)의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35년의 일제 강점기가 끝난 뒤에는 서울신문 초대 사장(1945.11.20.)을 맡았다. 한말부터 광복 후에 걸쳐 3개 신문의 사장을 역임한 특이한 경력이다.
오세창은 '만세보' 제작에 두 가지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하나는 소설의 연재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 한자에 한글로 음을 다는 루비(ruby) 활자를 채용한 것이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는 창간 한 달 뒤인 1906년 7월 22일부터 연재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첫 신문 연재소설이자 최초의 신소설로 인정받는다. 일인 경영 한국어 신문 '대한일보'(1904.3.10. 창간)에 '혈의 누'보다 먼저 신소설 '일념홍(一捻紅)'과 '참마검(斬魔劒)'이 실렸지만, 한국인의 작품을 가장 먼저 게재한 신문은 만세보였고, 처음으로 이름을 밝힌 작가는 이인직이었다. 만세보에는 10월 14일부터 이인직의 두 번째 작품 '귀(鬼)의 성(聲)'이 연재되었다. 이인직은 만세보의 주필이었다. 연재소설은 광복 이후에도 신문제작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작가 입장에서는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발표무대였고 중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연재소설의 인기는 신문 판매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 1910년 2월 10일자 '대한민보' 만평. 바른 언론 '대한민보'가 '국민이라 자칭하는 악마' 친일지 '국민신보'를 훈계하는 장면. 루비 활자는 한자 옆에 깨알 같은 한글 활자로 음을 다는 방식이다. 한말 신문은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제국신문'은 한글 전용,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이었다. 국한문 혼용 신문은 한문에 한글 토를 다는 정도여서 어려운 문장이었다. 그러니 한글전용이나 국한문 혼용의 양 극단적인 편집은 어느 쪽도 독자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대한매일신보가 국한문판과 한글판 두 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 것은 한자를 선호하는 지식층과 한글 전용의 서민을 위한 배려였다. 만세보의 루비활자 채용은 국한문 혼용과 한글 전용의 효과를 동시에 노린 것이었으나, 일본에서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만세보 발행이 중단된 뒤 오세창은 대한협회가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을 맡았다. 이 신문은 처음으로 만평을 실었다. 신문만화의 효시였다. 작가 이도영(李道榮)은 동양화식 목판 작법으로 친일파를 비판하고 세태를 풍자했다.
서예와 전각(篆刻)에서 일가를 이룬 오세창은 서화계(書畵界)의 정신적 지도자로 1918년 근대 미술가단체의 효시인 서화가협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가 투옥되어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했다. 광복 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재출발하던 때 초대 사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고령으로 4개월 후 물러났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