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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사랑 탑-남백송///統監府 손에 떨어진 民族誌‘申報’

bsk5865 2014. 7. 23. 08:1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7.23 05:58

 

무너진 사랑 탑-남백송///統監府 손에 떨어진 民族誌‘申報’(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359 


무너진 사랑 탑-남백송


무너진 사랑 탑-남백송

작사 반야월 작곡 나화랑


반짝이는 별빛아래 소근소근 소 근대는 그 날밤
천 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사랑 모질게도 밟아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 탑아


달이 잠든 은물결에 살랑살랑 살랑대는 그 날밤
손가락 걸며 이별말자고 눈을 감고 맹세한 님아
사나이 벌판 같은 가슴에다 모닥불을 질러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사랑에 취해 있나
못 믿을 님아 꺾어진 장미화야


봄바람에 실버들이 하늘하늘 하늘대는 그 날밤
세상 끝까지 같이 가자고 눈을 감고 맹세한 님아
사나이 불을 뿜는 그 순정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행복에 잠겨있나
야멸찬 님아 꺾여진 장미화야


統監府 손에 떨어진 民族誌‘申報’

통감부는 한말 최대의 항일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했다. 신보사 사장 만함(萬咸, Alfred W.Marnham)〈사진〉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0년 5월 18일 주한 영국 총영사관의 증인이 입회한 가운데 판권과 시설을 7천엔(약 700파운드 이상)에 통감부에 양도한다는 비밀계약을 체결했다. 만함이 평가했던 금액은 5천엔이었으니 통감부는 만함의 기대치보다 훨씬 비싸게 사준 것이다. 그 대신 만함은 앞으로 한국에서 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일본과 영국은 통감부의 신보 매수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신보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裴說, E.T.Bethell)이 창간하여 국민의 뜨거운 지지와 민족진영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한문판, 한글판,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 등 3개 지면을 통해 피 끓는 논설로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국내외 항일투쟁을 격려했다.

일본은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이 신문을 폐간하거나 발행인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라고 영국에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배설은 두 차례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다. 1907년 열린 1차 재판은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영사재판으로 진행되었고, 이듬해에는 상해 주재 영국 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서 4일 동안 재판을 진행한 끝에 배설에게 3주 금고형을 내렸다. 배설이 상해에서 복역하는 동안 통감부는 신보의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여 영일(英日) 간에 외교분쟁까지 일으켰다.

만함은 '상하이 타임스'의 편집장이었는데 1907년 4월 신보의 영문판 편집자로 한국에 왔다가 1908년 5월 27일부터 신보의 발행 겸 편집인이 되었다. 영국이 배설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하고 상해에서 판사와 검사가 한국에 도착한 직후였다. 배설은 발행인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가 보더라도 신보는 배설의 영향 아래 있었고, 만함은 형식상의 발행인이었다. 하지만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은 후에는 신문의 소유권이 완전히 만함에게 넘어갔다.

만함은 배설과는 기질이 다른 사람이었다. 점잖은 성격이었지만 마음이 약했다. 배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져 싸우려는 투지에 불탔지만, 만함은 신문 경영을 단순한 사업으로 여겼다. 주한 영국 총영사 헨리 보나르(Henry Bonar)는 만함에게 신문의 발행권을 일본에 넘기라고 권유했다. 한일 강제합병 이후에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일본은 치밀한 공작 끝에 마침내 신보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헨리 보나르는 통감부가 신보를 매수하던 날 도쿄 주재 영국 대사를 통해 본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영국신문은 사라졌으며, 신문은 한국인 편집자의 이름으로 잠시 지속될 것이다. 일본은 오랫동안의 성가신 불평의 씨를 해결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6월 14일부터 신보의 발행인은 이장훈으로 바뀌었다. 민족진영의 보루였던 신보는 이리하여 통감부의 손에 들어갔고, 한일 강제합방 이후에는 총독부의 친일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作成者 黃圭源